셋은 친구다. 더 정확히는 대학 동기다. 함께 '와이포'이라는 타이포그래피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졸업 후에는 디자이너로 서로 각자의 길을 걸었다. 한 명은 영국 유학길에, 나머지 두 명은 디자인 회사에 입사했다. 그러던 그들이 지난 2013년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을 만들었다. 디자인을 통한 사회적 참여를 모색하고 싶어서였다. 권준호(34), 김어진(34), 김경철(33) 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 세 명을 지난 14일 서울 이태원동에 있는 '일상의실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일상의실천'은 디자인을 단순히 사물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데 사용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으로써의 디자인을 모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셋에게 사회 참여 방식은 디자인인 셈이다.
출판사 후마니타스, <고래가 그랬어>, 녹색연합 등 다양한 출판‧시민‧사회단체들과 작업을 같이 했다. '그들'이 만드는 콘텐츠가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도록 디자인하는 일을 했다. 반응도 좋다. 녹색연합과 작업한 <2012 녹색연합 연례보고서>는 월간 <디자인>에서 선정한 '2013년 한국 디자인 연감' 그래픽부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싸이 변호사가 명예훼손으로 1000만 원 소송"
좋은 일 뒤에는 나쁜 일이 있다고 했던가. 얼마 전, 1000만 원짜리 손해배상소송에 휘말렸다. 가수 싸이 측 변호사가 권준호 씨의 글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며 손배소를 제기했다. 권준호 씨 입장에서는 황당할 따름이다. (☞ 관련기사 : 테이크 아웃 드로잉과 일상의 실천)
"3월 초에 싸이 측 변호사와 용역이 카페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집기를 철거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때 저도 현장이 있었죠.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카페 운영진 중 한 명이 용역이 들어오는 것을 막다 문에 목이 끼어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어요. 그런 모습을 하나하나 목격했어요. 화가 났죠. 이태원 한복판에서 무슨 짓인가 싶었어요. 여러 언론사가 취재해갔지만 그날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기사에서 찾아보기는 힘들었어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할 수 있는 일이 인터넷에 글을 쓰는 정도라고 생각했어요.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그리고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의미를 설명하는 글을 썼어요. 이 글을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보도자료로 사용했는데, 싸이 측 변호사가 저와 '테이크아웃드로잉'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 줄 알았나 봐요. 곧바로 1000만 원짜리 소송을 걸었어요."
그간 용산 참사, 세월호 등 다양한 사회 이슈에서 디자인을 통해 목소리를 내왔음에도 아무런 소송을 당하지 않았던 그였다. 심지어 '연장전'이라는 신문 작업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을 닭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유독 싸이 측에서만 '딴지'를 걸고 있는 셈이다. 권준호 씨는 새삼 권력보다 자본이 더 무섭다는 것을 느낀단다.
'일상의실천'과 '테이크아웃드로잉'이 관계를 맺은 것은 1년여 정도 됐다. '일상의실천'은 이 카페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디자인하고 있다. 권준호 씨는 이곳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권준호 씨는 "그렇다 보니 싸이 측에서는 우리와 '테이크아웃드로잉'이 아주 긴밀한 관계인 줄 알고 고소를 한 듯하다"며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테이크아웃드로잉'과 우리는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의 관계일 뿐"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어진 씨가 "돈이나 청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글을 썼다가 이 고생"이라며 소송에 휘말린 권준호 씨를 약 올렸다.
"사회이슈를 어떻게 디자인을 통해 보여줄까 고민했죠"
친구라서 그런지 사이가 꽤 좋아 보였다. 이들 세 명이 함께 일하기 시작한 지는 약 2년여 정도밖에 안 되지만 알고 지낸 지는 10년이 훌쩍 넘었다. 사실 처음에는 같이 일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 디자인 공부를 위해 영국으로 떠났어요. 대학 때부터 사회이슈에 관심이 많았죠. 내가 관심 있는 주제를 어떻게 디자인해서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을지를 늘 고민했어요. 또한, 그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디자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다행히도 영국 대학 교수가 학기 초 학생들에게 '우리 학교에는 스타일이라는 게 없다. 너희가 만들어야 한다' 이러더라고요."
권준호 씨는 대학 졸업 이후 영국 왕립예술대학(Royal College of Art)의 커뮤니케이션 아트&디자인과(현 비주얼 커뮤니케이션과)로 진학했다. 그곳에서는 제주 해군 기지 반대와 용산 참사와 탈북 문제 등 무겁고 민감한 주제를 다뤘다. 특히 졸업 작품으로 선보인 ‘Life: 탈북 여성의 삶’은 2011년 영국 잡지 <크리에이티브 리뷰Creative Review>가 선정한 올해의 스페셜 초이스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만들었던 용산 참사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한국에 귀국해서 전시회를 따로 열기도 했다. 그는 숨진 철거민들과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적은 ‘천공 종이 악보’가 뮤직박스를 통과하면서 오르골 소리가 울리는 작품을 통해 용산 참사를 기억하고자 했다. (☞ 바로가기 : 저기 사람이 있다)
"솔직히 한국사회에 대해 별로 기대를 안 했지만, 용산 참사를 지켜보면서 실망을 넘어 절망했어요. 처음에는 용산 참사를 주제로 작업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지속해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수준이었죠. 그러다 이 주제로 작품을 만들어보겠다고 결심하고 담당 교수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러면서 이 문제가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그 교수가 하는 말이 30년 전 대처가 수상일 때도 용산 참사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고 했어요. 시대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자본에 의해 소외된 자들이 밀려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죠."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디자인 하려니 힘들더군요"
김어진 씨와 김경철 씨는 권준호 씨와는 달리 한국에 남아 디자이너의 길을 걸었다. 디자인 회사에 취업해 각종 디자인 관련 업무를 진행했다. 하지만 권준호 씨와는 달리 한국에서의 디자이너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자신이 납득하기 어려운 디자인을 하려니 괴리감이 상당했다.
"회사에 다니던 때였어요. 전기‧전자 중소기업 회사의 디자인 의뢰가 들어왔어요. 그 회사 관련 정보 수집을 위해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온통 사회이슈 기사만 뜨더라고요. 이미지 사진들은 노동자들이 울고 있는 사진이 대부분이었죠. 보통 기업 이름을 검색하면 경제신문 인터뷰 기사, 주식기사 등이 뜨는데, 정반대였죠. 그 회사는 노동자들을 문자로 해고한 기륭전자였어요."
다행히 김어진 씨는 그 회사 디자인 작업은 안 하게 됐단다. 하지만 그때부터 일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월급쟁이 아닌가. 회사에서 일이 들어오면 그것을 열심히 하면 되고, 그게 나의 포트폴리오가 된다. 그것에 만족하는 게 디자이너의 삶 아닌가', '노동자를 부당하게 해고하는 기업의 이미지를 디자이너가 깨끗하고 좋은 이미지로 만들어준다면 그 디자이너는 좋은 디자이너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이 이어졌다. 그러다 결정적인 계기가 생겼다. 김어진 씨가 다니는 회사에 서해아라뱃길 브랜드를 디자인하는 일이 들어왔다. 2억 원 규모였다. 억 단위 프로젝트는 여간해서는 잘 생기지 않는지라 회사는 그 프로젝트를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때 다니던 회사 사람들 성향이 보수적이지 않았어요. 당시 촛불 집회가 한창이었는데, 사람들이 단체로 참여하기도 했죠. 그런데도 서해아라뱃길 프로젝트를 받았어요. 아이러니한 일이었죠. 직원들이 그때 매우 힘들어했어요. 저도 힘들었죠. 그때 더는 이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김어진 씨 회사 근처에 김경철 씨 회사가 있었다. 매일 저녁 그를 불러 하소연을 했단다. 김경철 씨의 고민도 김어진 씨와 비슷했다. 김경철 씨 회사는 주로 대기업 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디자인해준 회사 회장이 횡령 혐의로 체포됐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거짓말하는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둘이 의기투합해 회사를 만든 이유다.
"운동의 언어를 대중에게 다가가는 '언어'로"
자신들 스스로 해보고 싶은 디자인도 있었다. 대중과 격리된 시민‧사회단체의 '언어'를 디자인을 통해 좀더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언어'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2008년 촛불집회 때였어요. 그때 집회에 나가서 느낀 게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들만의 언어를 쓴다는 거였어요. 그렇다 보니 집회 바깥쪽, 즉 집회 밖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반인들은 그들이 집회를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죠. 이들의 간극을 줄이고 싶었어요. 그들이 쓰는 언어, 발행하는 간행물 등을 좀 더 중간지점으로 끌어오면 괴리감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게 시각언어를 만들어내는 디자인의 힘이라고 생각했어요."
김어진 씨가 2009년 김경철 씨와 둘이서 회사를 만들 때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후 영국에서 돌아온 권준호 씨가 2013년 동참하면서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회사가 자리 잡았지만 처음엔 쉽지 않았다. 시민·사회단체를 쫓아다니며 디자인의 중요성을 피력했지만, 그런 제안을 처음 접한지라 생소하게 쳐다보았다. 작업한 내용을 인쇄해서 인권영화제, 녹색연합, 앰네스티 등 서른 곳에 우편으로 보냈지만 어느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김어진 씨는 "그때 든 생각은 촛불집회 때 느꼈던 카페 안과 광장의 괴리가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였다며 "시민·사회단체에는 디자이너가 필요한 게 아니라 활동가의 목소리가 중요하고 이런 목소리를 단순히 인쇄해줄 사람만을 필요로 했다"고 설명했다.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일 처리 과정에서 절차나 기준이 없는 점도 이들을 힘들게 했다.
"대부분이 '우리가 좋은 일 하니 너희도 보태라'는 식으로 디자인을 의뢰해요. 당연히 일하면 그에 따른 보수를 받아야 하잖아요. 막말로 최소한의 금액밖에 없다면 그거라도 주면 돼요. 많은 돈을 벌려고 이 일을 하는 게 아니니깐요. 하지만 '돈을 얼마 준다' 이런 개념 자체가 없는 곳도 상당해요. 게다가 계약서 자체를 쓰지 않는 경우도 많았죠. 매우 안일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번은 노동단체 관련 디자인 업무를 맡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작업을 한창 하던 중, 그쪽 담당자가 잠적을 해버렸어요.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죠. 황당했죠. 게다가 나중에 어렵게 작업한 디자인을 보내줬는데, 그것을 안 쓰고 다른 것으로 대체했어요. 우리에겐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죠.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어요. 그때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권준호 씨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섭섭하다고 했다.
김어진 씨는 "시민‧사회단체가 이런 식이니 좋은 마음 먹고 이쪽으로 왔다가 상처받고 나가는 사람이 많다"며 "제 발로 온 사람들에게 제대로 대우해 주는 구조를 만드는 게 장기적으로 이쪽 진영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김어진 씨는 "그런 시스템 없이 심장만 가지고 일하라는 게 지금의 모습"이라며 "이러한 흐름이 스스로 고립된 상황을 만들고 대중과의 견고한 벽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 프로젝트 하는 순간, 다시 회사생활로 돌아가겠더라고요"
이들은 앞으로도 자기들이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하면서 세상과,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와의 거리를 좁히고 싶단다. 즉,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회사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여러 대기업에서 디자인을 부탁하는 제안이 왔었죠. 아직 기억나는 게 현대자동차의 브라질 월드컵 관련 전시그래픽 요청이 들어왔어요. 금액도 상당했어요. 우리가 평소 하는 디자인 비용에서 0이 더 붙었죠. 그런데 그때 출판사 후마니타스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관련 책 디자인을 하기로 결정된 상태였어요. 현대차와 관련된 디자인을 할 수 없겠더라고요. 현대자동차도 쌍용차만큼이나 노사문제가 심각하잖아요. 그것을 하는 순간, 다시 예전 회사생활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상의실천은 대기업의 프로젝트는 가능한 한 맡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보다는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프로젝트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큰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닌 또 다른 즐거움을 지금의 일에서 찾고자 노력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디자인이 지속되기를 희망해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