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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혁명…부패로 살찌는 "붉은 자본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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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혁명…부패로 살찌는 "붉은 자본가들"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해방 40년 베트남, "붉은 자본주의"로 가는가?

베트남 노동조합 간부가 말했다. "나는 공산당원이지만, 우리 아들은 공산당을 싫어하고, 다당제를 주장한다. 아마 내 아들이 기성세대가 될 쯤엔 다당제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예순 정년이 일 년 남은 그는 하노이의 보통 시민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부패는 모든 곳에 퍼져 있다. 내가 몸담은 노동조합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사는 한국에는 부패가 없는가. 베트남에서 부패 문제가 심각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해방이나 혁명의 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다. 우리를 부패했다고 비판하는 서방은 부패가 없나."

베트남은 유럽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마무리 중이다. 미국이 추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에도 열심이다. 미국의 요구에 따라 경제 활성화를 위한 TPP 참여의 대가로 공산당 권력 독점을 뒤흔들지도 모를 결사의 자유를 법제화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대한민국도 비준하지 않은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제87호(결사의 자유) 비준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부패와 불평등이 가장 심각한 문제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베트남에 아무도 없다. 문제는 부패와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다. 베트남은 갈림길에 서 있다. 사회주의 유산을 깡그리 버리고 자유방임 자본주의로 치달을 것인가.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보존하면서 사회주의의 성과를 유지하는 조절 자본주의로 나아갈 것인가. 베트남의 오늘은 향후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갈 것이 확실한 북한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도 시사점이 크다.


"붉은 자본가들"의 정치적 계산과 경제적 욕망에 좌우될 것처럼 보이는 베트남의 미래는 도시와 공단에서 넘쳐나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의지와 계급적 행동에 의해서도 그 경로가 영향을 받을 것이다.


영국 언론 <가디언>의 인터넷판 기사, '베트남 40년: 공산주의의 승리는 어떻게 자본주의 부패에 굴복했나'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소제목은 역자가 달았다. 1편에 이어진 이야기다. (☞관련 기사 : "엄마가 조각났다...이를 주워야 했다")

몇 해 전까지 사이공의 대형 신문사 앞에는 상냥한 여인이 언론인들에게 커피를 팔았다. 그녀의 이름을 아는 이는 없었고, 그냥 커피 레이디로 불렀다. 그녀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대개는 평화가 온 다음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이게 베트남 공산당이 지금 거짓말을 하는 맥락이다.

그녀는 해방의 날을 기억한다. 전쟁이 끝났다는 환호. 세계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군대를 쳐부순 공산주의의 힘에 대한 순수한 자부심.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 두려움도 있었다. 폭력적인 보복과 약탈의 소문이 돌았다. 커피 레이디는 총을 들고 거리에 드러누운 미친 사람들이 겁났다. 개인적인 이유로 그녀는 슬펐다.

"보통 사람들의 삶은 힘들었다"

몇 해 전, 그녀는 사이공 근처 해변 도시인 붕 타우의 미군 기지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거기서 로널드라 불린 한 군인을 만났다. 뉴욕 출신인 그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상공으로 정찰기를 조종했다. 둘은 사랑에 빠졌다. 로널드는 짧은 통보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잠시 동안 편지가 왔다. 미국에 오도록 후원할 거라 했다. 곧 편지는 끊겼다. 여자는 남자가 돌아오지 않을 걸 알았다. 새로운 체제가 알면 화를 입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로널드의 편지를 태워버렸고, 그의 소식을 다신 듣지 못했다. 해는 흘러 이제 예순넷 백발이 된 지금, 절 옆에 조용히 앉은 채 여전히 슬픔을 느낀다.

커피 레이디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미국 남자와 사랑에 빠져 괜찮은 삶을 꿈꾸던 평범한 베트남 여인이었다. 해방의 날은 더 편안한 시절을 가져오지 못했다. 우선 새로 생긴 협동 공장에서 일거리를 찾았다. 하루 11시간 등을 구부린 채 재봉틀을 돌려 소량의 쌀과 더 작은 량의 고기를 얻을 수 있는 배급증을 얻었다. 여러 해 동안 남자 형제와 작은 집을 나눠 써야 했다. 그는 섬유 공장에 다녔다. 경제는 십년 동안 침체했다. "보통 사람의 삶은 힘들었다."

미국은 베트남을 폐허 상태로 만들었다. 폭격으로 도로와 철도, 교량과 운하를 파괴했다. 불발탄과 지뢰가 시골 곳곳에 널렸다. 심지어 농부들이 일하는 논에서도 발견됐다. 고성능 폭약과 에이전트오렌지로 오백만 헥타르의 숲이 불모지가 됐다. 새 정부는 남베트남 촌락 3분의 2가 파괴됐다고 추정했다. 사이공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고아들과 넘쳐나던 마약은 미국이 남긴 유산의 일부였다. 새 정부 추산 전국적으로 피난민 1000만 명, 전쟁미망인 100만 명, 고아 88만 명, 불구자 36만2000명, 그리고 실업자가 300만 명에 달했다.

▲1965년 미군 헬기가 남베트남의 베트공 기지를 공격하고 있다.ⓒAP


서방의 잔인한 경제 봉쇄


경제는 혼돈 상태였다. 해방의 날이 왔을 때, 인플레이션은 900%로 치솟았다. 논의 나라인 베트남은 쌀을 수입해야 했다. 파리 평화 회의에서 미국은 박살난 인프라 재건에 35억 달러를 제공키로 합의했지만, 단 1센트도 지불하지 않았다. 미국은 공산당 정부의 적인 사이공 정권에게 빌려주었던 수백만 달러를 갚으라고 요구함으로써 빈궁한 나라를 모욕했다. 베트남 경제는 세계와의 무역과 원조를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전쟁에서 지자마자, 미국은 전쟁으로 파산한 나라와의 수출입을 금지함으로써 무역 봉쇄를 강요했다. 또한 다른 나라에 압력을 가해 미국의 정책을 따르도록 했다. 같은 방식으로 미국은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유네스코 같은 국제기구들이 베트남에 원조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미국은 에이전트오렌지가 심각한 질병과 선천적 기형을 유발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보상금으로 자국 참전군인들에게 20억 달러를 지불했다. 하지만, 200만이 넘는 베트남 희생자들은 아무 보상도 받지 못했다.

이런 적대적 경제 봉쇄 속에서 어느 경제 모델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베트남의 사회주의 프로젝트가 붕괴하는 건 불가피했다. 베트남은 조야한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했고 농민들에게 배급증을 주면서 곡물을 넘기도록 강요했다. 생산 인센티브가 없으니, 소출도 엉망이었다. 인플레이션이 전시 수준으로 폭등했고, 다시 쌀을 수입해야 했다. 1980년대 초 공산당은 "사회주의 지향의 시장 경제"라는 노선을 공식 채택했다.

미국이 강요한 굴욕적 타협

이 전환으로 커피 레이디는 1988년 봉제 공장을 떠나 노점상이 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네 시에 일어나 시내로 나가 커피를 준비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다섯 시면 신문사 앞에 작은 의자를 놓고 일을 시작했다. 90년대 내내 모든 게 변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허용됐다. 사기업이 장려됐다. 자유로운 상거래, 자유로운 시장, 이윤, 임금이 돌아온 것이다.

정부는 비밀리에 워싱턴에 타협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재건 원조금 35억 달러, 에이전트오렌지와 전쟁범죄에 대한 보상 요구를 중단했다. 심지어 구(舊) 사이공 정권의 전쟁 부채 1억4600만 달러 상환에도 동의했다. 양보를 받은 미국은 1994년 거의 20년 동안 베트남을 질식시켰던 무역 봉쇄를 해제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기금 공여 기관들이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경제는 한 해 8.4% 성장했고, 곧 베트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쌀 수출국의 하나가 됐다.

90년대 내내 공산당 안에는 새 조류인 자본주의에 대항해 사회주의를 지키려던 당파들이 강력하게 존재했다. 혼돈에 빠진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들 분파는 극적으로 빈곤을 감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베트남 인구의 70%가 공식적인 빈곤선 아래에서 살았다. 1992년엔 그 비율이 58%, 2002년엔 32%까지 떨어졌다.

동시에, 정부는 모든 마을에 초등학교를, 거의 모든 마을에 중고등학교를 지었다. 또한 무상의료의 기본 토대를 세웠다. 사회주의 당파들은 새로운 자본주의 수단을 지령하는데 충분한 정치적 힘을 갖고 있었다. 90년대 세계은행은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조건으로 수억 달러에 달하는 추가 대부금을 공여하겠다고 세 번이나 제안했다. 베트남 정부는 거절했다.

하지만 2000년부터 변화 속도는 빨라졌고 정치적 균형은 변했다. 국제 공여 기구와 외국 투자자들의 지속적인 압력을 받아들여 베트남 정부는 결국 국영기업의 매각을 승인했다. 또한 미국과의 무역 협상을 성사시켜, 마침내 2006년 세계무역기구 회원국 자격을 얻었다. 이는 외국 투자와 원조의 급증을 뜻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에서 승리자로 등장한 이후 30년 만에 베트남은 세계화된 자본주의 경제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결국 서방이 승리한 것이다.

배신당한 혁명


이 모든 변화를 사이공 거리의 커피 레이디는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변한 게 없었다. "벌이는 같고, 같은 집에서 산다"고 그녀는 말한다. "가게엔 물건이 많아졌지만, 값도 계속 올랐다. 나라는 변했지만,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건 아니다. 연줄을 가진 사람은 부자가 됐다." 요 몇 해 동안 그녀는 베트남 브랜드인 쭝 응우옌(Trung Nguyen) 커피만 팔았다. 그녀는 여전히 가난하지만, 쭝 응우옌 커피 회사를 소유한 남자는 자유로운 기업 활동의 새로운 조류에 올라탔고, 지금은 1억 달러 자산가가 되었다.

신문사 사무실엔 응우옌 꽁 케가 앉아 있었다. 그는 커피 레이디의 노점상 옆 건물에서 <딴 니엔(Thanh Nien)>을 편집했다. 케는 편집장 시절 사이공의 조직폭력배와 고위관료들 사이의 연줄을 폭로하고 공적 자금 절도에 연줄 좋은 가문들이 연루됐다는 추문을 다룬 기사로 권력자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베트남 정부는 공식적인 검열 제도를 어설프게 운영하고 있는데, 매주 편집장들을 소집해 뭘 다루고 뭘 숨길 지를 통보한다. 하노이는 화요일에 사이공은 목요일에 소집한다. 케는 2008년 해고됐다.

작년 11월 케는 위험을 또 무릅썼다. <뉴욕타임스>를 이용해 정부에 언론 자유 허용을 요구했다. 지금은 뉴스 웹 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무실에 앉아 일을 저지른 것이다.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자기 대의의 배신자가 됐다고.

"처음엔 혁명을 성공시킨 사람들이 정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가장 공정한 방식으로 나라를 발전시키고 번영케 하겠다는 좋은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잘못되기 시작했다. 혁명에 참가했던 이들이, 투명하겠다고 선언했던 이들이 결국 자신들의 약속과 사상을 배신해 버렸다."

부패와 불평등


케 자신도 혁명의 일부였다. 1970년대 초 학생으로 반미 선동을 했고, 삼년 동안 철창신세를 졌다. 여러 해 동안 당원이었다. 그는 당 지도부가 경제에 시동을 걸기 위해 자본주의라는 수단에 의지했던 이유를 이해한다. 하지만, 그는 신자유주의 동전의 어두운 면, 즉 부패와 불평등을 목도해 왔다.

거리 곳곳에서 부패와 불평등을 볼 수 있다. 어두웠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사이공은 상업 활동으로 북적거린다. 하지만 사이공은 모든 면에서 빈곤의 흔적이 역력한 개발도상국의 도시다. 동 커이 거리가 있다. 신흥 엘리트가 500달러짜리 헤르메스 티셔츠, 1만5000달러짜리 베르사체 손목시계, 6만5000달러짜리 금박 송아지 가죽으로 된 4인용 의자가 딸린 오리털로 채워진 식탁을 살 수 있는 방종한 부의 섬이다.

거리 모퉁이에는 있는 콘티넨털 호텔에선 한 끼 가격이 노동자의 주급인 식사를 판다. 레스토랑 이름은 호찌민 얼굴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르 부르주아.

케는 공공 프로젝트에 10달러가 배정됐다면, 7달러는 누군가의 주머니로 흘러간다고 말했다. 정말? 베트남 국가 예산의 70%가 도둑질당하고 있다? 믿기 어려운 비율의 절도다. 통역을 통해 말하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공중에 휘젓는다. "50에서 70% 사이."

작년 국제투명성기구는 베트남을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했다. 100점 만점에 31점으로 118개국보다 나빴다.

"붉은 자본가들"

부패가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베트남에선 관리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팔아 가족의 편의를 봐주는 게 하나의 전통이다. 하지만, 현 지도부 하에서 그 수준이 새로운 단계에 달했다는 주장이 있다. 사람들은 특히 베트남의 거대한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하는데서 문제가 커졌다고 말한다. 일부 정치인과 관료들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이나 자기 가족을 고위직에 앉힌 것이다. 베트남에서 2년간 동남아의 개발 문제를 연구한 영국 학자 마르틴 게인즈버러의 말이다. "관리들은 개혁주의 이상에 고무되기보다 부패한 욕망에서 동기 부여를 받아왔다. (...) 우리가 종종 '개혁'이라 부르는 것은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금융 및 기타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얻으려는 경쟁자의 시도에 다름 아니다."

최근 세 달 동안 한 웹 사이트가 베트남 파워 엘리트들의 비행에 관한 주장을 상세히 실었다. <쩐 중 꾸엔 륵('권력의 초상화'라는 뜻)>이란 이름의 사이트는 서류와 녹음자료, 동영상으로 주장을 뒷받침했다. 사실이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지만, 관찰자들은 이 사이트가 경쟁 상대에 손상을 가하는 데 내부 정보를 이용할 만큼 힘을 가진 정치인의 작품으로 추측했다. 사이트는 비밀스런 도둑질의 세계에 대한 짧은 경험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사이트는 한 지방 관리가 100만 달러가 든 가방을 집으로 배달했고, 그 덕택으로 "대개발"에 참여한 부동산 회사가 1억5000만 달러의 세금을 내지 않게 됐다고 주장하면서 최상층 인사를 공격했다. 그 회사는 지방 관리와 최상층 인사에게 빌라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사이트는 지도급 정치인 두 명을 지목하면서 이들이 부패 은행가에 대한 기소를 막았으며, 대가로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국영기업에서 1억 달러가 누이의 은행계좌로 흘러들었으며, 그 인척은 지금 사업을 스무 개나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사이트는 고위 군부 인사가 자기 아들의 회사를 이용해 군대 땅을 팔아 사적 이익을 남겼다고 비판했다. 그 사람이 "거대 부패 네트워크"의 일부라는 주장을 담은 은행 직원의 편지를 수백만 달러가 표시된 은행계좌와 함께 사이트에 올려놓기도 했다.

국가는 때때로 부패를 인정하고 부패를 척결하기도 한다. 작년 말 세간의 이목을 끈 재판이 열렸다. 전직 국영기업 임원 네 명이 뇌물과 사기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두 명은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케는 이 재판들이 전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노동법 물 타기

"우리는 수백만의 목숨을 독립과 평등과 바꿨다. 감옥에서 나는 전쟁이 끝나면 부패 없는 나라가 될 것이라 상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라의 발전은 이뤄져야 하지만, 적법하게 돈을 버는 사람들을 해하는 쪽으로 가선 안 된다.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불법적인 방식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을 허용해선 안 된다."

그는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다. 초기 보여준 공정한 경제 발전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은행 2012년 보고서는 "불평등이 다시 의제가 되고 있다"고 했다. 2014년과 2010년 사이 하위 10%의 소득이 5분의 1이나 떨어진 반면, 상위 5%의 소득은 전체 소득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가장 심각한 불평등은 농촌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수백만의 농부가 공장이나 도로 건설 때문에 토지를 잃어야 했다. 90년대 초, 거의 모든 농촌 가구(91.8%)가 땅을 갖고 있었다. 2010년에 되자 농촌 가구의 22.5%가 땅이 없게 됐다. 빈농층은 도시로 대거 유입되어 민영화된 기업에서 해고당한 수십만의 노동자들과 합류하고 있다. 이 거대한 인간 파도는 개인집이나 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비공식 부문"이나 새로운 산업 단지와 수출 가공 지역으로 빨려들고 있다.

비공식 부문에선 어떠한 보호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산업 지역에서조차 실질적인 보호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베트남의 노동문제 전문가 안지 응옥 쩐 교수는 자신의 책 <결박(結縛) Ties That Bind>에서 한때는 진보적으로 유명했던 이 나라의 노동법이, 부분적으로는 미국상공회의소 같은 단체들의 로비로 물 타기 된 지 오래라고 설명한다. 국가가 후원하는 노조들은 약화됐고, 이 노조들은 파업을 조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외국인 투자와 국영기업 민영화의 방식으로 베트남에 들어온 투자가 급증함에 따라, 국가는 인민의 편에서 행동하는 정부의 모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국가 조직과 기관 일부는 자본가들과 연합하고 있다."

모든 노동자가 최저 임금을 보장받고 있다. 1990년 첫 도입 당시 최저 임금은 "생활 임금"에 맞는 수준에서 정해졌다. 생활필수품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 해가 흘러 외국 자본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정부는 최저 임금을 동결했고, 인플레이션은 최저 임금의 실질 가치를 떨어뜨렸다.

고삐 풀린 신자유주의로 가나


그 결과 2013년 4월에는 정부의 통제를 받는 노조가 최저 임금이 생활 필수 비용의 50%는 되어야 한다며 항의에 나서기도 했다. 노조연맹에 따르면, "도시 노동자 대부분은 극빈하고 육체적으로 쇠약한 상태다. 노동자들은 싸고 허름한 셋방에 살며, 생활비를 최저 수준으로 줄였다. 영양실조와 건강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이제 의료와 교육은 더 이상 무상이 아니다. 세계은행 보고서는 "소득이 기본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을 더 많이 결정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정부는 빈곤층을 위한 마을 보건소보다 부유층을 위한 병원에 훨씬 더 많은 재정을 지출했다.

베트남은 경제가 마비된 국가가 절대 아니다. 전쟁 복구는 거의 기적에 가깝다. 특히 영국같이 발전한 나라들에서 빈곤이 느는 동안 빈곤을 줄인 나라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두 체제에서 가장 나쁜 것인 권위주의 사회주의 국가와 고삐 풀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마감되고 있다.

이 둘의 결합은 베트남 인민으로부터 돈과 권리를 박탈하면서 혁명의 수사 뒤에 숨은 극소수 엘리트의 주머니를 채우고 있다. 전쟁에선 승리했지만 평화에선 패배한 베트남의 지도자들이 사회주의자라는 주장은 속빈 선전에 불과해 보인다. 한 때 목숨을 걸었던 전직 게릴라가 한 말처럼 "그들은 붉은 자본가들이다."


▲베트남의 오늘. ⓒ윤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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