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시즌, 127경기를 남겨둔 시점에서 NC 테임즈의 홈런 수는 ‘0’개였습니다. 넥센 박병호는 120경기를 남겨둔 시점에서야 비로서 시즌 1호 홈런이 터졌죠. SK 김광현이 시즌 3승째를 따낸 건 4월 29일로, SK의 남은 경기 수는 102경기였습니다.
2015시즌, 127경기를 남겨둔 지금 NC 테임즈의 홈런 수는 8개입니다. 지난해 기준으로 이제 막 개막시리즈를 치렀을 뿐인 박병호는 홈런 5개를 치고 있습니다. 126경기를 남겨둔 롯데 황재균도 벌써 25개의 안타와 8개의 2루타를 때려냈습니다. SK 김광현은 이미 3승을 벌어둔 상태로 127경기를 앞두고 있고, 임창용과 윤길현은 벌써 5세이브를 따냈습니다. 모두 지난 시즌 기준이라면 팀이 100경기 정도 남겨둔 시점에 나왔을 기록들입니다.
하지만 이번 시즌부터 KBO리그는 팀당 144경기를 치르게 되며, 21일 현재 각 구단은 팀 당 126경기 내지 128경기를 남겨둔 상황입니다. 조금 비약해서 이야기하자면, 선수들은 저마다 누적 기록을 잔뜩 적립한 상태로 이번 주부터 시즌 개막을 맞이하는 셈입니다. 어디까지나 비약이긴 합니다만.
당연한 소리일지 모르나, 야구 역사에서 경기 수의 증가는 종종 대기록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로저 매리스가 61홈런으로 베이스 루스의 시즌 최다홈런 기록을 깨뜨린 해는, 팀당 경기 수가 162경기로 늘어난 1961년이었습니다. 이에 당시의 어떤 사람들은 로저 매리스의 기록을 인정할 수 없다며 생떼를 쓰기도 했죠.
KBO리그도 다르지 않습니다. 경기 수가 108경기에서 120경기로 늘어난 1989년, KBO리그에서는 한시즌 최다 안타(이강돈 146개), 최다 도루(김일권 62개), 최다 4사구(김성한 93개) 등의 대기록이 쏟아졌습니다. 경기 수가 126경기로 늘어난 1991년에는 빙그레 장종훈이 역대 처음으로 시즌 150안타 이상(160개)를 때려냈고, 35홈런으로 1988년 김성한(30홈런)을 넘어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도 세웠습니다. 역대 최초 100타점 이상 타자도, 100득점 이상 타자도 1991년 장종훈의 몫이었습니다. 장종훈은 이듬해인 1992년에는 41홈런을 쳐내며 역대 최초의 40홈런 타자가 되기도 했죠.
이런 신기록 행진은 경기 수가 늘어난 1991년 당시 이미 예상된 결과였습니다. 1991년 4월 5일 한 일간지의 스포츠면에서는 “늘어난 경기 수 기록경신에 청신호”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런 예측을 내놨습니다. 기사 내용 중 최동원의 탈삼진을 제외한 대부분의 예측이 적중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1991 프로야구는 새 팀 쌍방울이 끼어들어 경기가 없는 월요일을 빼놓고는 모든 팀들이 쉬는 날이 없이 날마다 경기를 치러, 팀당 126경기를 소화해야 한다. 경기 수가 이렇게 늘어남으로써 그만큼 각종 기록의 경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중략)… 이 기록들은 올해도 거센 도전 속에서 경신될 확률이 높은데 특히 이강돈의 최다안타와 장종훈의 최다타점은 스스로가 경신을 다짐하고 있어 눈여겨볼 만하다. 경기 수가 늘어났지만 지난 2년간 깨지지 않았던 ‘기록의 사나이’ 김성한의 30홈런과 233 최다 루타 역시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중략)… 투수 부문에서 최동원의 223 최다 탈삼진(84년), 송진우의 38 최다 세이브 포인트도 경기 수에 발맞춰 기록 경신이 기대된다.” (<한겨레> 정의길 기자)
이번 시즌은 많은 면에서 기사에 나온 1991년 당시와 유사합니다. 새로운 구단이 가세했고(쌍방울-kt), 지난해까지 있던 휴식일이 사라지고 이제는 월요일을 뺀 매일 경기를 치릅니다. 경기 수가 전년도보다 늘어난 것도 공통점입니다. 새로운 기록이 나오기에는 아주 이상적인 조건입니다. 산술적으로만 따져도 이미 5홈런을 때린 박병호가 남은 126경기에서 작년만큼의 홈런(52개)를 추가한다면, 57홈런으로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이 가능합니다. 24타점의 테임즈도 남은 127경기 동안 작년과 똑 같은 타점(121점)을 추가하면 이승엽의 한 시즌 최다타점(144점)을 넘어설 수 있죠. 이외에도 과거에는 ‘넘사벽’처럼 여겨졌던 누적 기록 상당수가 올 시즌 거센 도전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운 구단의 창단도 대기록 양산을 부르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새로운 팀이 창설되면, 그만큼 리그에서 뛰는 선수 숫자가 늘어납니다. 이전에는 1군 무대에서 좀처럼 뛸 기회가 없던 1.5군 내지 퓨처스리그 선수들이 대거 1군 경기에 선을 보이게 되죠. 이는 리그 최고 엘리트 레벨 선수들에게는 굉장히 유리한 조건입니다. 이전까지는 아주 가끔씩만 마주치던 리그 평균 이하 선수들과 상대할 기회가 늘어난다는 얘기니까요.
거칠게 말해 엘리트 타자에게는 패전조 투수를 상대로 타율을 끌어올리고 홈런을 때려낼 기회가, 수준급 투수에게는 약한 타자를 상대로 삼진을 잡아내며 한숨 돌릴 기회가 그만큼 많아지는 셈입니다. 장효조가 경기 후반 나오는 패전처리 투수를 두들겨 타율을 올리고, 선동열이 6-7-8-9번 타자를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통과하던 옛날 옛적과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다음 표를 한 번 보시죠.
위 표는 2014시즌 KBO리그 타자와 투수들을 대체선수대비 기여승수(WAR) 1.0이상/WAR 1에서 0 사이/WAR 0이하의 세 집단으로 분류한 뒤, 각각의 평균 성적을 구한 것입니다. WAR 1승 이상의 타자들은 평균적으로 3할 타율에 4할 가까운 출루율, 5할대 장타율을 기록했습니다. 1승 이상의 투수들은 지난해 기준으로는 준수한 4점대 평균 자책에 좋은 볼넷/삼진 비율을 보였습니다.
반면 대체선수레벨이나 그 이하 선수들은 타자는 평균 OPS 0.563, 투수는 평균자책 7.36으로 1군에서 자리를 잡기 힘든 성적을 남겼습니다. 최근 신생구단이 새로 1군에 등장하면서, 리그에는 WAR 상위권의 엘리트 선수보다는 대체레벨 이하의 선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상위 레벨 선수들이 일방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퓨처스리그는 이런 현상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무대입니다. 21일 현재, 퓨처스리그에서 전체 타율 1위는 경찰청 소속 안치홍입니다. 안치홍은 14경기를 치른 현재 타율 0.469에 장타율 0.776으로 ‘본즈급’ 기록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안치홍은 1군 무대에서도 리그에서 손꼽히는 엘리트 타자였습니다. SK에서 2013시즌 14홈런을 때린 한동민도 상무에서 14경기동안 7홈런 20타점을 기록 중입니다. 140km/h 이상 빠른 볼과 다양한 변화구를 던지는 에이스 투수들에게서 벗어나, 아직 완성도가 떨어지는 퓨처스 레벨 투수만 상대하자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죠.
2013년 이후 KBO리그 엘리트 선수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구단 증설로 1.5군과 2군급 선수를 1군에서 상대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리그 상위레벨 선수들은 개인 기록에서 적잖은 이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공인구 이슈까지 겹치면서, 많은 선수들이 지난 시즌 개인 기록에서 집단으로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습니다. 20승 투수와 50홈런 타자, 200안타와 14년만의 노히터 대기록이 한 시즌에 쏟아져 나왔죠.
리그 상위권 선수와 하위권의 격차가 벌어지는 이런 흐름은 10구단 kt 위즈가 추가된 올 시즌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지난 두 시즌보다 더 심해질 지도 모르죠. 이미 1군에서 통할 만한 1.5군급 선수들은 먼저 창단한 NC 다이노스가 대부분 데려간 상황이니까요.
일찍이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대표작 <풀하우스>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야구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됨에 따라 ‘시스템 전체의 변이폭이 축소’되어 예외적 존재인 4할대 타자가 사라졌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2015시즌 큰 폭의 게임 수 증가와 새 구단의 가세는 안정적으로 굴러가던 기존 KBO리그 시스템에 커다란 ‘변이’를 가져오는 요인일 수 있습니다.
꼭 굴드가 예로 든 4할 타율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최다홈런이든 최다타점이든 퍼펙트 게임이든, 이전에는 없던 ‘예외적 존재’가 등장하기에 이번 시즌만큼 이상적인 조건은 다시는 없을 겁니다. 2000년 이후 오랫동안 나오지 않던 노히터게임이 지난해부터 한꺼번에 몰아서 나오고 있는 건,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닙니다. 박병호는 늘어난 경기 수만큼 더 많은 홈런을 때려내고, 김광현은 많아진 등판 기회만큼 더 많은 승수를 챙기겠죠. 정성훈은 2군에서 갓 올라온 투수들을 두들기며 안타를 추가할 것이고, 양현종은 1군이 낯선 타자들을 상대로 더 많은 삼진을 솎아낼 겁니다.
2015 시즌, 144경기와 10구단 체제에서 우리는 KBO리그의 숱한 역사적 기록이 깨지고 전에 없던 대기록이 탄생하는 장면을 끊임없이 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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