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부터 탈북청소년들의 사회 적응을 돕는 재단의 이사로 일하다 보니, 탈북자들에 대한 자료를 접할 기회도 있고, 안성에 있는 하나원도 가끔 방문하게 됐다. 하나원에 갈 때마다 마음이 짠해져서 돌아오곤 하지만, 최근 하나원을 방문하면서 한 영상자료를 보고 유독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길지 않은 홍보용 영상으로 하나원에서의 탈북자 교육과 생활을 담고 있었다. 영상 속의 탈북자들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걸 보는 나는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화면과 함께 '부모형제', '타향살이', '희망', '남녘 하늘' 그리고 '대한민국'이란 자막들도 지나갔다. 투박한 그들의 미소를 대하면서 그들의 외로움과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아 스스로 못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하나원은 극심한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아사자가 속출했던 1990년대 후반,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으로 들어오는 탈북자가 급증하던 시기에 문을 열었다. 1997년 1월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이후 7월 본격적인 업무를 수행했다. 이어 2012년 12월에는 제2하나원이 화천에 개원했다. 2015년 현재, 남한에는 2만 7824명의 탈북자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정착해 살고 있다.
탈북자들은 12주간의 하나원 교육을 마친 후 남한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탈북자들은 남한으로만 들어오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사선을 넘어왔다. 그러나 남북한의 발전격차를 감안한다면, 그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40~50년 뒤의 미래사회에 도착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의연한 척해도 내심 문화적인 충격은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혀 경험하지 못했고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옮겨진 탈북자들에게 12주간의 교육은 남한사회 적응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하나원을 졸업한 이후가 더욱 중요하고 절실할 것이다.
물론 하나원은 탈북자들에게 성별, 연령별, 맞춤형 교육을 시행하고 있고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의 활동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 덕분에 탈북자들 중에는 남한사회의 일원으로서 성공적인 안정된 삶을 사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탈북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미 북한으로 다시 돌아간 '재입북자'가 두 명이나 나왔다. 그리고 남한보다 차라리 외국에 가서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미국 등 제3국으로 간 사람들도 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남한에 온 탈북자들이 남한이 아닌 다른 곳으로 삶의 터전을 바꾸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을 보듬지 못한 우리의 책임은 없는지, 그리고 이들을 싸늘하게 대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탈북자들만의 책임일까? 통일은 우리 모두를 위한 소명이다. 탈북자들에게 남한 사회에서의 적응교육을 시키면 그걸로 우리 책임은 다한 것일까? 아니다. 탈북자들과 더불어 살아갈 우리 사회 '원주민'들에게도 탈북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적응교육이 필요하다.
하나원은 북한 주민이었던 사람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불편이 없도록 교육하는 곳이다. 그런데 하나원은 어떤 의미에서는, 탈북자들에 대한 교육보다 더 큰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나원은 미래의 통일을 준비하고 예행 연습하는 곳이다. 탈북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북한사회의 실상과 북한 주민의 의식, 사고방식과 행동유형을 종합, 분석한 자료들은 통일을 준비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것이다.
박근혜정부 대북정책의 화두는 '통일'이다. 통일을 준비하고 기반을 구축한다는 차원에서 작년 7월 통일준비위원회(이하 통준위)도 출범시켰다. 통준위가 활동을 시작한 지 거의 9개월이 돼가지만, 과연 통일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는지는 미지수다. 지난 3월 중순, 통준위 민간 부위원장의 '흡수통일 준비' 발언 논란이 있었다. 하순에는 통준위 모자보건 관련 민간 위원들의 개성공단 방문 때 '북한 붕괴 시 대응 방안'이라는 자료가 담긴 USB를 북한당국에 뺏기는 사건도 있었다. 이 때문에 통준위가 본의 아니게 남북관계에 또 하나의 새로운 걸림돌이 되어가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준위가 흡수통일준비 기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조직 이름에 걸맞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연구와 사업 방향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통준위가 진정으로 통일을 준비하려면, 통일헌장 제정이나 북한 엘리트층 처리계획 수립이 아니라 남한의 국민이 된 탈북자들 끌어안기 계획부터 세우는 것이 일의 순서일 것이다. 3만명에 육박하는 탈북자들도 따뜻하게 감싸 안지 못하면서 북의 급변상황 시 어떻게 졸지에 2500만 명이나 되는 북한 주민을 끌어안겠다는 엄두를 낼 수 있을 것인가. 굳이 독일통일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통일준비의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탈북자들의 남한 사회 적응 교육도 필요하지만, 우리 사회 일반주민들의 '탈북자 보듬기', '탈북자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같은 교육도 필요하다. 통일교육에서 '북한 바로 알기' 교육이 비중이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는 탈북자를 따뜻하게 보듬고 돕는 일도 통일교육에서 비중있게 다뤄졌으면 한다. 우선 지역의 지도급 인사들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들에게 탈북자 끌어안고 보살피기 교육을 시키는 것도 생각해 볼만하다. 탈북청소년들의 고충을 감안할 때, 초․중․고에서 관련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도 이같은 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다.
통준위는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는 상황에서 성급하게 개성 쪽으로 눈을 돌리다가, 또는 먼 훗날의 일을 너무 앞서서 연구하다가 논란이나 자초해서는 안 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차라리 안성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안성맞춤'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남한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는 탈북자들이 우리 사회의 완전한 구성원으로 거듭나도록 돕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40~5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먼저 온 통일 전령사들의 안정된 남한사회 정착계획부터 세우는 것이 진정한 통일준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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