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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관 "나라 꼴 이런데 꿈꾸라고?…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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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두관 "나라 꼴 이런데 꿈꾸라고?…부끄럽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8전 3승 5패' 김두관 전 지사

시장과 도지사를 선거로 선출한 지 20년. 지방자치 역사는 아직 일천하지만, 시간이 길러 낸 이들이 어느새 우리 정치를 이끌고 있다. 서울시장 출신 대통령이 나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차기 대선 후보로 현 지방자치단체장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역대 지자체 선거가 많은 정치인을 배출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인물은 누가 뭐래도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다.

마을 이장으로 시작해 민선 1기 남해군수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까지. 그는 지방자치의 상징 같은 정치인이다. 지난 2010년에는 구(舊) 민주당(현(現) 새정치민주연합)에 처음으로 영남권 광역단체장 당선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하지만 화려한 승리의 이면에는 훨씬 더 많은 패배가, 여전히 성성한 지역주의와 함께 드리워져 있다.

그런 그가 중앙 정치에 뛰어들었다. 2012년 민주당 대선 경선과 이듬해 총선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셨지만, 고향으로 내려가는 편안한 길 대신 패배를 안겨준 경기도 김포에서 새로운 정치에 도전하고 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풀뿌리 정치를 대안인 양 얘기하지만, 실천하는 이를 찾기란 어렵다. 촌바닥 풀뿌리 정치인 김두관, 그의 지난날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봤다.

▲ 김두관 전 지사. ⓒ프레시안(최형락)

- 고향 경남에서 '8전 3승 5패'라는 전적으로 끈질긴 정치 인생을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김포에서 제2의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이유가 뭔가.

지난해 7·30 재보궐 선거 당시 김포에서 출마하면서 '당락에 관계없이 이곳에서 중앙 정치를 시작하고 마무리하겠다'고 각오했다. 지방 정치는 남해군수에서 경남도정으로 마무리한 셈이다. 선거 때 유권자들이 '선거에 떨어지면 경남으로 다시 가버릴 거 아니냐'는 말을 하더라. '새롭게 중앙 정치를 시작했기 때문에 김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대부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유권자를 만날수록 진심을 이해해주는 이들이 있었고, 사실 그 덕에 적지 않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 작은 꿈이 있다면, 분단된 조국 대한민국의 가장 남쪽 남해에서 태어났지만 통일이 되면 제일 북쪽인 함경북도 온성에서 여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지금 분단 상황에서 김포와 맞닿아있는 곳이 북한의 개풍군이다. '조강(祖江)지역'이라고 한강과 임진강, 북쪽의 외선강과 연결된 곳이다. 사람들은 김포시가 북한과 접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분단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정치인은 엄격하게 말하면, 정치인의 자격이 없다고 본다. 내가 김포를 선택한 이유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재보궐 선거 차 갑자기 와서 20일 만에 선거를 치렀기 때문에 시민들의 선택을 받기는 힘들었다. 아쉬움은 있지만, 무려 43퍼센트(%)의 지지율을 보내준 유권자들에게 굉장히 고맙다. 그래서 오히려 선거가 끝난 다음 날부터 김포를 알아 가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경남에서만 선거를 여덟 번 치렀다. 군수 선거 두 번, 국회의원 선거 세 번, 도지사 선거 세 번 출마했다. 군수 선거는 두 번 다 이겼고, 국회의원 선거는 세 번 다 떨어졌다. 도지사 선거는 도전 세 번 만에 당선됐다. 전적으로 말하면, 경남에서 8전 3승 5패이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곳은 경남이다. 그러나 이젠 경남을 떠나왔고, 김포를 제2의 고향으로 새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 대중에게 '김두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이장에서 장관까지'일 것이다. 그런데 29세 젊은 나이에 이장이 되기 전까지 '청년 김두관'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학생활은 어땠나.

당시 남해에서 공부를 잘하면 진주로 유학을 많이 갔다. 그런데 나는 공부도 중간 정도였고 형편도 유학을 갈 상황이 아니어서 남해 종합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1977년에 국민대 어문계열 체육학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등록금이 없어서 입학을 못 했다. 당시 형과 함께 2년 정도 농사를 지었다. 형이 나를 많이 아껴서 '대학교에 합격한 후 군대를 다녀오면 형편이 좀 나아져 다시 공부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예비고사를 보고 경북 영주에 있는 영주경상전문대학교(現 경북전문대) 행정과에 들어갔다.

초기에는 '이 학교를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많았다. 그런데 한 번은 모 여대생들과 미팅을 한다고 해서 내심 기대했는데 한참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어 물어보니, 여학생들이 우리 학교하고는 미팅을 안 하려고 한다는 것 아닌가. 본인들이 2년제 대학교 학생이라 남자는 4년제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아, 4년제 대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웃음). 그래서 영주경상전문대 졸업 후, 동아대로 편입했다.

그때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편입학 시험에서 1등을 했다. 사실 전두환 전 대통령 덕을 톡톡히 봤다. 전 전 대통령이 사학재단의 불법편입학을 강력히 단속하라고 지시해 부정편입학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김두관'이 동아대에 편입할 수 있었다. 나중에 '전두환 물러가라'고 집회하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면서 한번 신세를 지고 한번 신세를 갚았다(웃음).

- 당시 학생운동으로 옥살이한 후, 남해로 내려갔다. 갑자기 고향으로 내려간 계기가 있었나?

내 안의 DNA와 정동남 선배와 같은 주변 사람들 영향으로 '사회를 바꿔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원래 1982년 4학년 때 군대에 갔는데 제대 후 바로 복학하지 않고, 서울에서 월간지 <신동아> 외판원을 하다 문익환 목사와 백기완 선생이 주도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산하 서울민통련 사회부장 간사를 했다. 그때 청주지역 집회 담당으로 가서 민주헌법쟁취 도민결의대회 등을 조직하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을 했다. 그러다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돼 청주교도소에서 잠시 살았다.

그 안에서 고민을 해보니, 서울에는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도 많고 인재도 많으니, 나는 남해로 내려가서 사회변혁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민통련 출신 선배들이 교도소에 많이 다녀갔는데, 출소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들 물었다. 그래서 '난 고향으로 가서 지역운동부터 시작하겠다'고 했더니, 선배들이 '사람은 나서 서울로, 말은 제주로 간다는데 넌 서울에서 계속 운동을 하면 기회가 있을 텐데 왜 그러느냐'고 했다. 하지만 난 고향에서 뿌리부터 다져야겠다고 다짐했고, 출소 후 바로 고향으로 갔다.

1988년에 뒤늦게 졸업한 후 쭉 고향에 있었다. 당시 농민운동은 카톨릭농민회나 기독교농민회 등 종교단체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그런 걸 탈피해서 자주적인 농민운동을 해야겠다는 움직임이 농민 현장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곧, 전국농민협회가 생겼고 거기서 사무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 1988년 처음 공직선거에 출마했다. 어떤 계기로 출마했나?

그해 4월 총선이 있었다. 전국농민협회와 인천민주노동자연맹, 87년 대선 백기완 후보 선거대책본부, 반제반파쇼민족민주화투쟁위원회(민민투),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 등의 그룹들이 기존 정치권은 썩었기 때문에 우리가 깃발을 들 때라며 '민중의 당'을 선언했다. 그래서 나갔는데, 민중의 당과 한겨레 민주당 등은 한 석도 당선되지 못했다.

우리가 정세를 주관적으로 오판한 것이다. 기존 정치에 대한 환멸을 등에 업고 깃발을 들면,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아주 주관적 착각에 빠져 당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당 지지율 5%를 얻지 못해 자동으로 해산됐다. 4년 뒤 훨씬 많은 명망가들이 함께한 것이 '민중당'이다.

-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정치 활동이나 사회 운동에 무기력감 내지 패배감이 팽배해 있는 것 같다. 88년 총선 후 고향에 돌아가 1995년 군수 선거에 출마하기까지 어떤 활동을 했나.

나는 다시 대중운동 조직으로 돌아갔다. 1991년 당 기초위원 선거가 있었는데, 함께 운동했던 선후배들이 출마하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나는 농민회 활동과 '책사랑' 북카페 운영 등 남해군민과 대중을 대상으로 한 정치 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해 경남도위원 출마 대신 이듬해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려 한다며 출세주의자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욕심이 많아서 그랬던 게 아니라, 밑바닥에서 국민을 모으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프레시안(최형락)
1995년에 지방선거가 있었는데, 당시 난 신문을 만들어 배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군수로 출마하라고 하길래,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진심으로 하는 얘기였다. 주위 사람들이 "행정이 너무 썩어서 바꿔야 하는데 <남해신문> 김두관 사장이 군수를 맡으면 잘할 것 같다"며 출마를 적극 권유했다. 그래서 나도 선배들에게 농담 삼아 "'김두관'이라고 안 썩으라는 법 있나요?"라고 했더니, 선배들이 "김 사장이 물들려면 3년은 걸릴 텐데, 민선 1기 3년 동안은 마음 놓을 수 있다"고 했다.(웃음). 신문사 동료들에게 출마 얘기를 했더니, '<남해신문>이 이제 좀 자리 잡으려고 하고, 남해청년조직이나 책방이 이제 좀 굴러가려고 하는데, 군수로 출마했다가 떨어지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이 다 무너지니까 나가지 마라'고 했다. 다들 정세를 분석하며, '나가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신문을 만들면서 민심을 들어보니, 선거에서 열심히만 하면 군민들의 지지를 40% 정도는 받을 수 있겠더라. 그래서 출마했다. 그렇게 준비도 없이 도정에 대한 정의감만 가지고 나서 '55대 45'로 이겼다. 당시 38세로, 시군구청장 중 최연소 단체장이 됐다.

정말 준비 없이 군수가 됐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다. 지방자치가 잘되려면 지방언론의 역할이 중요하고, 지방자치 정부와 언론의 관계가 건강한 긴장관계가 되면 지방자치가 내용상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선거를 돌이켜보면 농민회, 남해사랑청년회, 책사랑 나눔을 통해 인문학 강좌도 하고 시인도 초청하는 등 지역사회 활동의 광범위한 기반이 있어 가능했던 것 같다. 당시 민자당 안방이었던 경남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으니 말이다.

- 2002년 6월 13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민주당) 소속으로 경남도지사에 출마했다. 영남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기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처음에는 무소속으로 나가 성적을 잘 낸 다음, 그해 연말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노무현 전 장관이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면서 상황이 부산·경남·울산 광역단체장 당선은커녕 후보를 내기도 어려웠다. 여당에서는 YS 때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한이헌 후보를 부산시장 후보로 내보냈다. 난 원래 무소속으로 나가 당선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30% 이상 지지를 받아서 연말 대선에서 노무현 당시 민주당 후보의 지지를 더 이끌어내는 데에 보탬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민주당으로 나가면 유권자 지지를 10%나 받을까 말까 했다. 그래서 무소속으로 나가야겠다고 확고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무현 후보가 세 번이나 전화해 "김 군수 도대체 어떤 정치를 하려고 하길래 나와 정치를 안 하려고 하느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락을 떠나서 '저런 분이면 평생 정치를 같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지역주의에 맞서 온 사람 아닌가. 그래서 결심했다. 군수를 두 번이나 한 터라 초반 지지율이 30% 이상 나왔다. 그런데 민주당에 입당하고 나니, 지지율이 9%로 떨어지더라. 2002년 선거에서는 16.5%에 그쳤지만, 4년 뒤 2006년엔 25.5%를 받았다. 그리고 2010년 53.5%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지방선거 역사가 25년 정도 된다. 그동안 부산·울산·대구 광역단체장 중 새누리당(구(舊) 한나라당) 세력을 뛰어넘은 후보는 내가 유일하다. 지난해 선거에서 부상시장으로 출마한 오거돈 후보가 새누리당의 아성을 뛰어넘을 뻔했지만, 안 됐다. 2010년 선거 당시 오 후보는 부산의 주류였고, 난 민주당-민노당-국민참여당-시민사회 등 범야권 후보였다. 정체성을 분명히 한 중도개혁세력의 후보였다. 지금도 내가 조금 주목받은 부분이 있다면, 영남에서 새누리당을 유일하게 처음으로 이긴 정치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 '김두관' 이름이 대중에게 다시 한 번 강하게 각인된 것은 2010년 지방선거였다. 총선까지 포함하면 무려 여섯 번의 도전 끝에 영남의 아성을 깨뜨렸다. 이는 지역 구도를 이겨낸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다. 낙선을 연이어 경험하는 동안 흔들리거나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을 텐데, 도전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소명 의식이 있었고 풀뿌리 운동으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다. 한국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지역주의라고 생각했다. 특히 영남의 지역주의다. 호남의 지역주의는 어떻게 보면 소외와 차별에 대한 저항 차원이다. 어느 정도는 이유가 있는 지역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영남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역주의다. 어떤 점에서는 명분 없는 패권적 지역주의다. 이 패권적 지역주의를 스스로 돌파해보고 싶었다.

경남에 오면, 민자당(YS계)이나 한나라당에 입당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국민을 피로 제압하고 집권한 민정당, 이후 공화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이 그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정치를 안 하면 안 했지, 광주의 학살을 자행한 주역들이 속한 민정당의 후예로 정치할 수는 없다는 신념이 있었다. 영남에서 민자당이나 한나라당으로 소속으로 출마하면, 유리하다는 걸 누가 모르나. 그러나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무소속이나 야당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 2012년 대선 경선 때 경남지사를 사퇴한 것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경선에 나가더라도 현직을 사퇴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굳이 사퇴까지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공직자가 임기 중간에 사퇴하는 걸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풀뿌리 자치 운동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고, 지난 1998년에 군수에 재선됐을 때 김민석 전 의원 등 386 후배 국회의원들이 '선배, 매일 촌에서 자치할 거냐. 서울에서 정치하자'고 했었다. 그러나 난 '유권자와의 약속이 중요하다'며 '임기를 마친 후 다른 일을 해야지, 중간에 사퇴하고 국회의원으로 나갈 생각은 없다'고 했었다. 비슷한 권유는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2010년 경남지사로 당선돼 도정을 하면서 '김두관 지사 덕에 이렇게 달라지는 구나' 하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다음에도 우리 쪽 사람이 도정을 맡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경남지사 임기를 마치고 2017년쯤 중앙 정치에 도전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경남지사 당선 1년 후인 2011년 가을쯤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서 경남까지 찾아왔다. 애초에 난 '선거 나가라는 얘기할 거면 오지도 말라'고 했었다. 그랬더니 다들 하는 얘기가 "아무래도 도지사 4년 임기 다 못 지킨다"였다.

당시에는 문재인 후보가 결심하기 전이었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박근혜 후보에 대항할 사람이 김두관 지사밖에 없다'고 바람을 많이 잡았다. 그때 나 스스로도 박근혜 후보보다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이미지가 워낙 대비되기도 하고 야권 후보들이 다들 망설이는 모양새여서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결심하게 됐다.

그런데 막상 뛰어들어 보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1등은커녕 3등밖에 못 했다. 당시 경남에 비정규직지원센터, 보호자 없는 병원, 모자이크 프로젝트, 야권공영지방정부, 노인틀니보전사업 등 도민들의 호응이 좋았던 창의적인 사업이 많았다. 그래서 지역 유권자들은 나에게 기대가 컸을 텐데, 내가 후보 경선에서 이겨 기대처럼 박근혜 후보를 꺾고 민주개혁정부를 수립했다면 도민들이 지금처럼 섭섭해하겠는가. 그런데 자기가 잘나서 뽑아준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하겠다고 해서 뽑아줬더니 바람이 들어 중도 사퇴했다. 평생 갚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셈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당시 주위에서 김문수 경기지사처럼 사퇴하지 말고,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떨어지더라도 다시 경남지사 임기를 채우면 되는데 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내 철학은 다르다. 도지사는 종합행정책임자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할 일이 많다. 살림을 총괄해서 책임지는 사람이 두 달 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봤다. 도지사직을 유지한 채 대선후보 경선에 나가는 것은 경남도민들에게 두 번 죄를 짓는 거라고 생각했다. 안 하면 몰라도 정리하고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대통령 선거는 '사즉생'을 각오해도 쉽지 않은 일이고, 그런 일 앞에서 스스로 퇴로를 열어놓은 사람은 형세가 불리하면 반드시 퇴로를 따라 도망가기 마련이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그렇게 돌아간 셈이다. 김문수 전 지사는 2006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도지사직을 수행했다. 2012년 박근혜 후보와 대선후보 경선을 과감하게 했다면 최소 10%의 지지율은 얻었을 것이다. 경기지사 직을 사퇴하고 나섰다면, 지금쯤 새누리당 차기 대선후보 중 한 명으로 독보적인 1위를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정치적으로 내가 스타트를 너무 빨리해서 실격패를 당했다면, 김문수 전 지사는 스타트가 늦어 실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치라는 게 '타이밍의 예술' 아닌가 싶다.

- 선거에 여러 번 도전하는 동안 가족들 고생도 많았을 것 같다. 가족과 평소에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인가?

사회를 바꾸는 데 가장 중심은 정치라고 생각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도 있지만, 대학 다닐 때부터 정치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정치가 세계 일류가 되는 게 우리 사회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부인과 10년 연애했다. 사귈 때도 '난 사회운동을 할 거라 경제적으로 가난할 수 있지만,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다. 집사람이 나중에 고백하길, '그래도 자식을 낳으면 가정의 경제 문제를 신경 쓰겠지'라고 생각했단다. 정치하는 내내 경제적 어려움은 집사람이 다 극복해줬다. 오히려 굉장히 응원해줬다. 아이들도 건강하게 커서 참 고맙다. 집사람이 워낙 헌신적으로 잘 해줘서 늘 고맙게 생각한다. 가족이 내 뜻을 이해해줘 큰 힘이 되고 있다.

- 평소 지방자치를 강조하며 대기업의 지방 이전을 주장하는 모습이 수도권 유권자 입장에서는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지역구를 수도권인 김포로 옮겼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연방제에 가까운 수준의 지방자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암울하게 하는 상황이다. 서울이 이렇게 복잡한데, 사람들은 왜 몰려들까. 돈과 사람과 정보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수도권 집중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교통·환경·주택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이에 따른 부담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지금 국정운영 기조는 '분수 효과'를 이야기하며 수도권이 잘 되면 지방도 잘 된다는 접근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지역을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 특화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지방혁신도시를 추진했다. 당시 균형발전 정책은 수도권과 비수도권, 중앙 정치와 지방 정치가 서로 상생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수도권 규제를 강화하고 지방의 규제를 완화해도, 정보와 돈이 서울에 집중돼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방치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 2013년 봄부터 1년 동안 독일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어떤 점을 살펴보고 왔나.

독일이 통일된 지 25년 정도 됐다. 유럽 경제난 속에서도 독일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독일이 유럽의 중심국가로 발돋움한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무엇보다 일류 정치 때문이다. 2013년 9월에 총선이 있었는데 메르켈 총리가 속해있는 기민당이 과반에 다섯 석이 못 미치는 311석을 얻었고, 사민당·좌파당·녹색당이 319석으로 과반을 넘었다.

한국 기준으로 보면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총리를 했을 텐데, 독일은 다르더라. 집권당은 과반에 가까운 지지를 받고 야권은 과반 이상의 지지를 받은 총선 결과에 대해 기민당이나 사민당은 '대연정하라'는 민의로 해석했다. 그래서 독일 역사상 세 번째로 대연정을 했다. 한국 상황에 비추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연정을 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독일은 정부수립 후 단 한 번도 연정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한 정당이 과반수를 넘은 적은 딱 한 번이다. 독일은 항상 연정을 통해 국가를 이끌었다. 독일 정치의 특징은 아데나워부터 메르켈까지 총리 가족이나 친인척의 뇌물·부패 스캔들에 관련된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아데나워 총리는 가족 식사 중에 손자가 커서 할아버지처럼 총리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집안에서 총리 한 명이면 족하니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할 정도다. 그게 전통이고 문화다.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는 도지사가 바뀌고 시장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면 정책이 모두 바뀐다. 그런데 독일은 정책 승계 문화가 아주 잘 되어 있다. 아데나워가 집권한 이후 강력한 친 서방정책을 폈다. 1969년에 빌리 브란트가 집권하면서 동유럽 물꼬를 터야 한다며, 이른바 동방정책을 한 것이다. 당시 동독에 원조도 많이 하게 돼 기민당이 반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콜 정부로 넘어오면서 오히려 동방정책을 승계해 동독에 더 많은 지원을 했다. 결국 1990년 동서 통일을 이뤘고, 통일로 인한 혼란이 이제는 잦아들고 있다.

2000년대에는 사민당의 슈뢰더 정부에서 노동시장 유연성을 위해 '하르쯔 개혁'을 했다. 사민당의 주된 지지기반이 민주노총인데, 이들은 당시 사민당이 배반했다며 사민당사 앞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다. 결국 다음 선거에서 사민당은 노조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기민당이 다수당이 돼 메르켈이 총리가 됐다. 하지만 메르켈은 집권 후 '슈뢰더가 지지기반을 잃으면서도 하르쯔 계획이라는 결단을 내렸다'며 이를 그대로 승계했다.

우리는 상대 진영의 정책을 승계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남북관계가 그렇다. 이는 엄청난 기회비용이다. 정책의 방향이 잘못됐다면 고쳐나가는 게 당연하지만, 좋은 정책인데도 당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승계하지 않는다. 이는 국민보다 자기 당, 자기 정파를 우선하는 것이다.

독일은 정책 승계 문화, 여야 간 대화와 타협을 통한 연합정치가 가장 강력한 장점이다. 민의가 그대로 국회의석 수에 반영되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바로 정책 선거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단순다수대표제이다. 내가 김포에서 43%를 얻었는데, 결국은 나를 지지했던 43% 지지자들의 표는 사표(死表)가 됐다. 이게 단순다수대표제의 결정적인 문제이다. 우리나라는 내각 책임제에 대한 아픈 기억도 있고, 또 분단 상황 때문에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국민들이 의식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나라이다. 많은 유권자들이 내각제는 정국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전혀 그렇지 않다.

- 최근 개헌, 선거제도 개혁 논의가 간간이 나오고 있다. 일전에 정치제도 개혁에 대해 '지역구 200명, 비례대표 200명 수준이 적절하다'는 견해를 언급한 적이 있다. 선거제도개혁은 어렵기만 한데….

우리나라는 국회의원 수가 적은 편이다. 영국의 경우 인구 10만 명당 의원이 1명이다. 전체 인구 5000만 명이면 의원은 500명 규모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단원제기 때문에 국가 인구·경제 규모로 볼 때 의원 수는 더 적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299명에서 1명을 늘리는데도, 온 국민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늘리니 마니 하는 것은 국회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국회의원 수를 늘리는 데 굉장히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늘리자고 주장하는 이유는 세계 경제규모 15위(2009년 기준)로 7번째 무역대국인 우리나라가 380조 원 규모의 예산을 다루려면, 훨씬 더 많은 각계각층의 전문가가 국회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계층·세대·지역·남북 등 갈등지수가 굉장히 높다. 이를 해소하는 것이 정치 영역이다. 각 이익집단들이 충돌하면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100만 명 정도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 이익집단이면, 대표 1명 정도는 국회에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럼 5000만 명이면 국회의원이 500명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갈등을 녹이고 해소해 국가의 미래비전을 만드는 곳이 국회인데, 지금 우리 국회는 법조인과 언론인이 다 가져가고 있다. 진정한 민의의 전당이 아니라, 왜곡되고 있다. 비례대표도 정말 직능 대표나 전문가가 아닌 당권 주자 내지는 당 지도부에서 알음알음 관계의 사람을 데려다 놓으니 실력도 없는 사람이 비례대표를 하기도 한다.

꼭 지역구 의원 200명, 비례대표 의원 200명이 아니어도 일단 비례대표 수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다만 현행 국회의원 300명의 급여를 총액으로 해서 의원 수만 확대하면, 의원 1인당 연봉은 줄어들지만 의원 수를 늘리는데 예산이 더 들어가지는 않는다. 연봉이 줄어든다고 해도 의원들이 먹고사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1억2000만 원이던 연봉이 9000만 원으로 줄겠지만, 뭐 어떤가. 국회의원이 더 잘 살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런데 (의원들이 나서서) 하지 않는다. 국민들은 하라고 하지만, 의원들은 자기 살과 가죽을 벗기는 일이니 아파서 안 한다.

- 국회뿐 아니라 당장 새정치민주연합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앞으로 어떤 전략을 가지고 유권자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보는가.

새정치민주연합은 정말 위기다. 국민들에게 "국회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아마 95%는 "해산하라"고 할 것이다. 근데 국회는 해산할 수는 없다. 야당이 건강하면 여당도 보다 세심하고 정교하게 국정 운영을 하게 돼 결국 국민들에게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야당이 야당 같지가 않으니, 여당이 자신들 마음대로 하고 있다. 그 피해는 결국 국민들이 입게 된다. 당연히 초심으로 돌아가 기득권을 버려야 국민에게 신뢰를 받고 수권 정당의 면모를 갖출 수 있다. 실제로 당 혁신을 위한 방안은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실천으로 연결이 잘 안 된다.

새정치민주연합 차원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을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하면, 첫째 당의 계파주의를 극복해야 하고, 둘째 당의 리더십을 확립해야 하며, 셋째 서민들에 대한 경제노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 특히 새정치민주연합은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지만, 실제 서민들에게 와 닿는 경제정책이나 방향은 미비하다. 당 리더십 문제도 새 지도부가 어떤 혁신안을 가지고 나올지 기대하고 있다. 계파주의 청산, 리더십의 확보, 민생의제들을 추진할 확고한 입장과 추진력을 갖고 유권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야당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사회적·경제적 양극화 문제가 심각하다. 2012년 대선 경선 당시 '서민 생활비 경감'을 주장하며 브라질 룰라 대통령의 소득향상 정책을 언급했다. 최근 증세논란과 복지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룰라 대통령의 중요 정책 중 하나는 '보우사 파밀리아'(Bolsa Familia)다. 보통 가난한 집에서는 아이들을 학교에 못 보내는데, 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조건으로 가계당 얼마씩을 지원해주는 정책이다. 내가 대선 경선 당시 주장했던 것은 통신비·유류비·주거비·등록비를 인하해 주면서 가처분소득을 높여주는 정책이었다. 보우사 파밀리아 정책과 실질적인 측면에서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 현실상 비용 부담이 더 앞선 문제라고 봤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의 의지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 여당이 어떤 가치관과 철학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하느냐에 달려 있다. 종편에서 평론가들이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를 논쟁하며 서민을 엄청 생각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있자면, 착각이 들 정도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에게는 지원하고 돈 많은 이건희 손자에게는 지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저 사람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어려운 사람을 생각했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무상급식을 한 번 봐라. 가난해서 돈 내지 않은 아이들과 돈 내고 같은 식당에서 밥 먹는 아이들이 모르겠는가. 이게 얼마나 비교육적인가. 부모들이 제일 걱정하는 게 자기 자녀들이 왕따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건데, 밥 한 끼를 가지고 나라를 가를 일이 있나. 그런데 종편에서는 무상급식을 하면 나라가 망할 듯 이야기한다. 세계 경제규모 15위, 7대 무역대국에 소득이 2만3000불이고 구매력지수가 3만1000불을 자랑하고 있는 나라에서 학생들 밥 한 끼도 못 먹일 정도로 예산을 못 짜면 시장이고 도지사고 다 그만둬야 한다. 참 희한한 논리로 얘기하는데 안타깝다. 한국 사회는 왜 이렇게 연대와 관용과 배려가 없는지.

- 요즘 세대 갈등이 주목받고 있다. 취업 문제뿐 아니라, 출산·보육은 물론 임금 수준이나 세제에 이르기까지 청년층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요소가 누적되어 있다.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싶은지'에 대한 설문에 따르면, 국가 기관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싶다는 응답이 제일 높다. 노량진 학원가에만 30만 명이 몰려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왜 공무원을 하려고 하겠는가. 직업의 안정성 때문이다. 원래 연봉이 보장되면 안정성이 보장이 안 되거나, 직업 안정성이 보장되면 연봉이 낮거나 그렇다. 이 두 가지가 다 좋은 게 공무원밖에 없고 그러니 몇백 대 1의 경쟁률이 되는 것이다. 공무원 평균 연봉은 5000만 원 정도지만 정년이 보장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가장 우수한 사람들이 공무원으로 몰린다는 사실은, 곧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둡다는 뜻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최고의 엘리트가 과학 분야 쪽으로 가야 그 나라에 미래가 있는데, 흐름이 반대다. 청년들이 공무원으로 몰리지 않게 해야 한다. 이걸 만드는 게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꿈을 키우라고 말하기가 부끄럽다. 나라 꼴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꿈꾸라고 말하기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뭔가 희망을 주는 말을 기대했을 텐데, '부끄럽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 김두관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사회적 관계는 즉, 공동체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제약 없이 사회에 헌신할 수 있는 게 자유 아닐까? 개개인이 그런 자유를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이상적인 목표다.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다. 다시 한 번 부끄러운 말이지만, 젊은 세대가 각자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며 보람을 추구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 및 정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조경일 연구원이 담당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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