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석은 독특한 작가다. 현재 네이버에 연재 중인 웹툰 <송곳>은 '까르푸 파업'을 배경으로 노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이다. <송곳>에 앞서 인천지역 광역버스인 '삼화고속 버스 파업'을 다룬 단편 <24일차>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젊은 작가들 중 노동 문제를 다루는 거의 유일한 만화가가 아니냐"는 질문에 "젊은 작가 뿐 아니라 나이 든 작가들 중에서도 노동 문제를 다루는 작가는 드물다"고 뼈 있는 농으로 답했다. 최 작가는 "6월 항쟁을 다룬 <100℃>를 작업하면서 가졌던 찝찝함"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한 AS 차원에서 노동 문제를 다룬 작품들을 그리게 됐다고 한다.
시대적 분위기 때문일까? 윤태호 작가의 <미생>, 최 작가의 <송곳> 등 과거에는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던 작품들이 주목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최 작가는 "노동자 입장에서는 불황이 꽤 오래됐고, 국가는 성장해도 노동이 가져가는 분배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는 현식을 이제 인식한 것 같다. '희망이 없다'는 것을 계속 확인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꼽았다.
정말 '희망이 없냐'고? 최 작가는 "세상 바꾸기는 엄청 쉽다. 투표 한 번만 잘하면, 결과가 뒤집힐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고 했다. 다만 '투표를 잘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 하나 있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생각할 시간'이 주어져야 하며, 이는 곧 '노동'과 직결된 문제다.
'조각 미남 만화가'라는 외형적 조건과 너무 안 어울리게 시종일관 진지한 최 작가와의 인터뷰는 지난 1월 27일 저녁 그의 작업실이 있는 경기도 부천의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편집자
"<송곳> 반전, 이미 나왔다"
프레시안 : 지난해 2월, <송곳> 연재 초기에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했다. 당시만 해도 <송곳>이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1년이 지난 지금 반응이 굉장히 뜨거운 것 같다.
최규석 : '굉장히' 뜨겁진 않다.(웃음) '네이버' 웹툰 순위를 보면 알겠지만, 10위 안에 없다. 더 올라가면 좋은데, 특별히 어떻게 하면 올라가는 건지 몰라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웃음)
프레시안 : 당시 인터뷰에서 "작품에 반전이 몇 번 나"올 것이라고 했었다. 아직 이야기가 진행 중이긴 하지만, 반전이 뭔가?
최규석 : <송곳>은 이제 중반을 넘었다. 지금까지 진행된 내용에서 반전은 주인공 '이수인'이 '푸르미 노동조합 노조지부장'이 못 된 것이다. 놀랄 만한 반전이다.(웃음)
* <송곳> 3부 3회 : '푸르미 노동조합 일동지부 임원 선거'에 출마한 이수인 과장은 주강민 주임을 상대로 총 20표 중 3표를 얻는데 그쳐 사무장을 하게 된다. 선거 다음 날, 푸르미 노조 이수인 사무장은 주강민 노조지부장에게 "안녕하십니까! 지부장님!!"이라며 깍듯하게 인사한다.
프레시안 : 주인공과 관련해 <송곳> 끝 부분을 살짝 공개한다면?
최규석 : 뻔하다.(웃음) '이수인'의 모델이 김경욱 한국까르푸-이랜드 일반노조 위원장이란 사실을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송곳>은 작은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까르푸 상황에서 끝난다. 510일간 진행된 '이랜드 파업투쟁'처럼 큰 싸움까지 다루지는 않는다.
프레시안 : 사람들이 '이랜드 파업투쟁'을 기억하는 건, 절반이지만 승리했기 때문 아닌가?
최규석 : <송곳>에서 2007년 '이랜드 파업투쟁'을 다룬다면, 입체적인 사건 구성을 위해 할 일이 많아진다. 특히 정부와 맞장을 뜨는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 노무현-이명박 정권의 입장과 각 정당들(열린우리당, 한나라당, 진보정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에 민주노총 입장까지 나와야 한다. 상황을 제대로 보여주기가 힘들다. 개인적으로 큰 규모의 이야기를 즐거워하는 편도 아니고….
<송곳>은 처음부터 전혀 이슈가 안 된 사건으로 끝내고 싶었다. 작품 속 '푸르미'라는 회사도 그렇게 비상식적인 곳은 아니다. 사람을 팬다거나, 차로 깔아뭉갠다거나, 어디 가둬놓고 반성문을 쓰게 하는 등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는다. 현재 한국 상황에 비춰 평균 이상의 사업장일 수 있다. 인원 감축을 위해 꼼수를 쓰지만, 비슷한 규모의 사업장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정도다. 사측이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노동 강도가 세면 사람들은 계속 바뀐다. 다만, '푸르미'가 순환 주기를 좀 빠르게 하려던 것인데, 이상한 사람(이수인) 한 명이 끼어 문제가 발생한 셈이다.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그러나 크지 않은 사건을 중요한 일로 느껴지게 그리고 싶었다. 누가 봐도 '저건, 너무 하네'라고 할 만한 사건을 '이것 보세요'라고 얘기하고 싶진 않다. <송곳>의 목적은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이수인이다!" 외칠 사람, 어디 없소?
프레시안 : 갑을 논란에 분노한 사회적 분위기 덕에 윤태호 작가의 <미생>(2012년 1월~2013년 10월 '다음'에서 연재. 2014년 tvN에서 드라마로 방영)과 <송곳>이 주목받고 있는 것 같다. 다만,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나도 을(장그래)이다!'라는 생각으로 호응하는 것 같아 아쉽다.
최규석 : <미생> 같은 경우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따라서 애초에 예상했던 반응을 고집하기란 불가능하다. 요즘 먹고 살만한 이들도 "나도 미생이다!"라며 자신을 '미생'이라고 지칭한다. 작품의 인기가 어느 정도 선을 넘어가면, 원작자든 주변 누구든 작품을 어떻게 해볼 여지가 없다.
<송곳>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만약을 대비해 작품을 시작할 때 말뚝을 박아 놨다. <송곳> 주인공 '이수인'은 노조 간부다. 그 사실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이수인이다!"라는 말을 웬만해서는 할 수 없다.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내가 노조 간부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송곳>은 <미생>에 비해 제동장치가 훨씬 강력하다. 작품 초기부터 그 부분에 신경을 썼다.
1318세대 이야기를 담은 <울기엔 좀 애매한>(사계절출판사 펴냄. 2010)이 몇만 부 이상 팔리자,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사회적 문제에 집중해서 작품을 구성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이런 정도의 문제는 언제든 있으니 좀 더 긍정적으로 살아야겠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욕심이긴 한데, '작품의 핵심(작가의 의도)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결론은 '무식하게 해야 한다'였다. 무식하게….(웃음) 그래서 노동 문제를 알리려면, 주인공이 노조 간부나 노조 활동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곳> 인기가 올라간다고 해서 작품이 애초 예상과 많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프레시안 : <미생>은 자신이 비정규직 사무직이 아니어도 "나는 미생이다!"라며 공감대를 느낀다. 그러나 영화 <카트>(부지영 감독, 염정아·문정희·김영애 출연, 명필름 제작)는 유명 배우가 출연하고 능력 있는 제작가가 뛰어들었지만, 대중 흥행에는 실패했다. 노동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미생>과 달리 <카트>의 소재가 불편했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화이트칼라 문제에 비해 블루칼라 문제를 불편해하는 것 같다.
최규석 : <미생>과 <카트>의 흥행 여부가 소재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작품이 엄청나게 성공하는 건 소재의 영향일 수 있는데, 망하는 건 소재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다른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기피하거나 낯설어할 소재라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어야 한다.
프레시안 : <송곳>은 대중적인 정서상 사람들이 기피할 만한 노조 간부를 주인공으로 정면승부 하고 있다. 혹시 '이수인'이라는 캐릭터 때문에 작품이 사장(死藏)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은 없었는지?
최규석 : 어떤 작품을 하던 '망하면 어떡하지?'와 같은 공포는 늘 있다. <송곳>은 또 장편이기 때문에 망하더라도 끝까지 가야 한다는 점에서 더 무섭다. 사장된 상태에서 작품을 계속 끌고 간다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지금도 반쯤은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웃음)
프레시안 : <송곳>을 보면, 많이 생각한 끝에 조탁한 문장이 자주 나온다.
최규석 : 의도한 바다. <송곳>은 대중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작품에 임했기 때문에 작품에 성공 코드를 몇 개 구성해 놨다. 주인공(이수인)이 잘 생겨야 한다. 캐릭터에 카리스마(구고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명언, 명대사!
"노동 문제 놔두고 민주화를 기뻐한 들 무엇하리!"
프레시안 : <송곳>에 앞서 인천지역 광역버스인 '삼화고속 버스 파업'을 다룬 단편 <24일차>(다큐멘터리 만화 모음집 <사람 사는 이야기>(휴머니스트 펴냄. 2011)에 수록)를 냈다. 노동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이유가 뭔가.
최규석 : <프레시안>에서 만평을 그리고 있는 손문상 선배 때문이다. 한 번 본 사이였는데, 어느 날 새벽에 술 취한 채 전화를 해서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 그래서 "직접 하시죠"라고 했더니, "젊은 사람이 해야지"라고 했다.(웃음)
사실 6월 항쟁을 다룬 <100℃>(창비 펴냄. 2009)를 작업했던 게 제일 컸다. 당시 노동 문제에 대해 못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100℃>를 하면서 가졌던 찝찝함이랄까? '노동 문제를 놔두고 민주화된 세상을 기뻐해 본들, 무엇하겠는가!'라는 마음이 있었다. <송곳>은 <100℃>에 대한 AS 차원인데, AS가 너무 길어지고 있다.(웃음) <송곳>을 통해 노동 문제를 얘기하고 나면, 개인적으로는 다음으로(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송곳>은 사회적 책무를 강하게 의식하며 그리고 있다. 노동 문제가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화가는 자영업자기 때문에….(웃음) 그렇다고, 노동 문제에 대한 연대 의식도 아니다. 다만,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이런 곳이다'라는 생각에 따른 '복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아주 부조리한 일이 상시로 일어난다면, 그건 내 문제다. 우연히 내 일이 아닐 뿐이지, 내 일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강력 범죄는 사회의 시스템 문제일 수 있지만 (시스템을 만드는데) 사회 공동체가 게을렀거나 무능했거나 실패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수 있다. 더군다나 '범죄가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지향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리고 어떻게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런데 노동 문제는 지향점 자체가 갈린다. '노동조합 놈들, 다 없애야 한다'라는 게 우리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다. 열악한 노동 조건은 공동체가 무능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공동체가 가해자라고 생각한다. 지향점 자체를 바꿔야 한다.
프레시안 : 작품을 위해 취재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취재 과정에서 이야기가 바뀐 경우도 있나?
최규석 : 대학시절을 그린 <습지생태보고서>(거북이북스 펴냄)는 사전 취재 없이 만들었다.(웃음) 취재로 이야기가 바뀐 건 <송곳>이다. '구고신'이 주인공이었다가 '이수인'으로 바뀌었다. '구고신' 중심의 <송곳>을 기획했다가 여러 번 엎었다. 김경욱 노조위원장을 인터뷰할 때도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작품을 구성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직업군에 대한 것뿐 아니라, 노동 운동에 대한 흐름도 알아야 했다. 무엇보다 법적인 문제가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웬만큼 해서는 스토리를 쓸 수가 없겠더라. 그러던 중에 김경욱 노조위원장을 만났다. 그런데 당시 파업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줬다. 인터뷰를 이야기로 바꾸는 과정이 힘들긴 하지만, 내 상상력이 맞는지 틀린지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야기 전개가 한 사람 인생으로 한정되어 있어, 안심됐다.
프레시안 : 배우 김의성 씨가 최규석 작가를 다음 인터뷰 대상자로 추천하며, 이런 질문을 했다. <송곳>과 반대되는 노조 파괴 전문 컨설팅 회사를 다룬 작품을 할 생각은 없나?
최규석 : 노조 활동가 '구고신'을 중심으로 <송곳>을 기획할 때만 해도 '구고신'과 노조 파괴자와의 대립이 주된 스토리였다. 막상 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은 있는데, 조금 아쉽다.
그런데 한국의 노조 파괴 방식은 썩 재밌지 않다. 그냥 힘으로 누르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들은 바로는, '노조 파괴 전문가가 경찰을 동원할 연줄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판가름이 난다고 한다.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주인공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노조 파괴 작전을 짜야 하는데, 작품 소재로 '획기적이다' '신선하다'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2011년 복수노조 설립이 합법화된 후, 사측 입장에서는 노조 파괴 매뉴얼이 더 간편해진 것 같다.
프레시안 : 창작하는 사람으로, 작품 활동을 다양하게 하고 싶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순수연애물을 그린다든지….
최규석 : 순수연애물, 기획하고 있다. 진짜 순수한 연애물! 연애 학습 만화 같은?(웃음) 연애물을 해도 주인공이 처한 현실이 있으니, 사회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듣게 될 것 같다.(웃음)
프레시안 : 그런 지점에서 최규석 작가의 그림과 스토리 모두 굉장히 현실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만화'라고 하면, 현실과 다른 '만화적 상상력'을 기대하지 않나?
최규석 : 요즘 누가 그런 말을 쓰나. '만화적 상상력'은 사어(死語)에 가깝다. 과거에도 현실적인 만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만화'라고 하는 가짜 이미지를 따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기대서 말하는 것일 뿐이다.
프레시안 : 자전적 성격이 강한 작품을 주로 그린다.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으니, 소재를 '가족'으로 옮겨서 기존과 다른 30대에 걸맞은 작품을 그릴 생각은 없나?
최규석 : 이제는 자전적 얘기, 웬만해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가족이 생겼기 때문에 가정을 지켜야 한다.(웃음)
"반실업 상태 20대에게 돈벼락을…"
프레시안 : <무일푼 만화교실>(바다출판사 펴냄. 2005), <TOON>(서울문화사 펴냄. 2000)을 그린 박무직 작가(닉네임 '보이치')의 어시스턴트로 11개월 동안 일한 사람이 지난해 9월 온라인 카페('방방곡곡 창작을 배우는 사람들')에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폭력적인 언사를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를 시작으로 박 작가의 어시스턴트로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는 증언이 쏟아지면서 논란이 됐다. 반면, 윤태호 작가가 자신의 문하생(어시스턴트)에게 "최소한의 생활 여건"과 "화실을 그만둘 경우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월급과 4대 보험을 주고 있다고 밝혀 대조를 이뤘다(1월 26일 자 <한국일보> 인터뷰). 만화계에서는 여전히 '열정 노동'이 강요되고 있는지?
최규석 : 일단 '노동'에 '열정'을 굳이 붙일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열정 노동'이란 말은 자칫하면 '열정'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열정'이란 평범한 인간이 아주 잠깐 가지게 되는 소중한 자원이다. "돈 따위 주지 않아도 좋으니 내가 만든 작품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하는 젊은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는 동력 아닌가. 문제는 이들의 열정을 욕심껏 이용하다 내다 버리는 범죄 행위에 있다.
만화계 얘기를 하자면, 프로 작가와 달리 어시스턴트들은 열정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프로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스승과 제자 관계로 밥값 정도에 허드렛일을 시키며 기술을 가르치다, 일정 수준이 되면 작업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되고 원고료를 받는다. 당연히 노동법 기준에 맞지 않는다. 이 경우, 스승-제자 관계와 고용자-피고용자 관계가 뒤섞여 있다는 점도 문제다.
상시적으로 어시스턴트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적정임금을 주고 정식으로 채용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월 200만 원 이하를 받는 작가가 대부분인 환경에서 어시스턴트에 대한 처우를 무조건 강요하기란 어려운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결국 만화계 임노동 수준이 전체적으로 상승돼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최저고료를 올리는 수밖에 없다. 만화 서비스 업체들이 작가의 최고 소득이 얼마라며 자랑한다. 바람 같아서는 '최저 소득이 얼마인지'를 자랑했으면 좋겠다. 1등 하는 작가가 수십 수백억 원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막 작가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활 가능하고 다음 작품을 준비할 수 있는 수준의 원고료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물론 다른 문제도 있다. 원고료가 전체적으로 올라가면 여력이 안 되는 업체에서는 작가의 수를 줄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기존 만화가들이 지망생들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격이 될 수도 있다. 이는 만화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단기 노동을 하는 젊은 노동자에게도 적용된다. 반(反)실업 상태에 있는 젊은이 모두에게 돈을 주는 방식이 아니고는, 이들의 생활 수준을 고려한 합당한 방법이 없어 보인다.
"'희망' 찾아 혁명한다고? 투표만 잘하면 된다"
프레시안 : 유럽과 달리, 우리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나 정치적 소재를 정면으로 다루는 만화가 경우가 거의 없다.
최규석 : 대중문화 장르 자체에 사회 문제를 다루는 경우가 별로 없지 않나?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서나 드라마에 사회적·정치적 소재가 조금씩 등장했다. 노무현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넘어가면서 거대한 양대 세력, 즉 반대파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정파적인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정치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은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대중 장르 내에서 정치적 소재가 다뤄진 지 얼마 안 됐다.
프레시안 : 앞으로 계속 이런 방향의 작품 활동을 할 계획인가.
최규석 : 사회성이 섞이긴 하겠지만, 모르겠다. (사회성 있는 만화가) 재미없기도 하고….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재미가 있겠는가.(웃음) 할수록 조심해야 할 것이 계속 생긴다. 노동 문제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최대한 손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품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날뛰게 된다. <송곳>에서 반전을 삭제한 것처럼 편집해야 할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다.
프레시안 : '샤를리 에브도 테러'와 관련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쪽과 시사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 자체를 '표현의 자유'로 보기엔 과하다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사건을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최규석 : 이번 사건은 혐오 발언과 관련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은 오래됐지만, 세계적으로 이를 잠재울 만한 강력한 논리가 나오진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신뢰하고 있는 지식인 친구도 어려운 문제라고 하더라. 그래서 아직 판단하지 않고 있다. 똑똑한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에 대해 나까지 열심히 고민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조금 늦게 따라가면 어떤가.(웃음)
프레시안 : 사회성이 강한 일종의 르포르타주 만화가 대중에게 읽히고 인정받기 시작한 게 MB정부 들어서라고 말했다. '을' 논쟁이나 <미생>, <송곳>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진 게 박근혜 정부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는지.
최규석 : 그건 가정이라서 '박근혜 정부여서 그렇다'라고 얘기하긴 힘들다. 다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불황이 꽤 오래됐고, 국가는 성장해도 노동이 가져가는 분배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는 현식을 이제 인식한 것 같다. '아, 희망이 없구나' 하고. 그래서 '희망이 없다'는 것을 계속 확인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정서가 작품에 반영되고, 사람들은 이런 작품에 위안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김준혁 PD가 1월 21일 자 <뉴스타파> 미니 다큐 '꼰대 vs 선배' 편에서 "각 세대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의 20대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했다. 최규석 작가 역시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최규석 : 잔인하지는 않다.(웃음) 감각이 무딘 사람이라, 항상 '이 정도면 온순하지!'라고 생각한다. 세상 바꾸기 엄청 쉽다. 대한민국은 합법적인 혁명이 허용된 정치 체제다. 투표 한 번만 잘하면, 결과가 뒤집힐 수 있다. 농담이지만, 공산당이 집권당이 될 수도 있다.(웃음) 우리에겐 언제나 희망이 있다.(웃음) 투표만 잘하면 된다. 혁명을 위해 피 한 방울 흘릴 필요가 없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일정 비율로 똑똑한 사람 있어야 한다.(웃음) 한 30~40퍼센트(%)? 각종 사회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 또 토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잘 굴러간다. 결국 사람들에게 '생각할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그래야 고민하고 투표한다.
그런데 '생각할 시간'이 어디서 나오나? 누가 갖고 있나? 우리 '시간'은 '사장(갑)'이 갖고 있다. '생각할 시간'을 빼앗아 와야 한다. '생각할 시간'이 곧 돈인데, 시간이든 돈이든 빼앗아 와야 한다. 그래야 신문 한 자라도 더 보지 않겠는가! '생각할 시간'을 만들려면, 노동의 힘이 강해져야 한다.
정치는 우리 삶과 직결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회 활동 등을 통해 '정치의 힘(선거의 힘)'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노동 문제는 특히 내 통장과 직결된 문제라 굉장히 중요하다.(웃음) 자신의 의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노조 조직률이 높아지면, 정치 활동의 훈련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시민이 일상에서 정치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럼 '큰 정치(여의도 정치)'도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다양한 사회 문제 중에서도 유독 노동에 관심이 많은 이유다. 여타의 사회 운동을 할 수 있는 기본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노동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문제 즉, 성 평등·환경 등에 신경을 쓰려면 더 많은 '시간'이 있어야 한다.(웃음) 책 한 자라도 보며,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으려면 일단 '시간'이 있어야 한다. '생각할 시간', 즉 사람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들어 준 다음 '열심히 주장하세요'라고 하면 알아서 할 것이다. '시간'이나 '시장'이 없는데, 열심히 떠든다고 사람들이 들어주겠는가. 마음의 여유가 없는데…. 그러니, 매번 (정치나 노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모여 여기저기 후원하며 꾸역꾸역 하는 거지.(웃음)
★ from 최규석 to 연상호최규석 씨가 추천한 '단박 인터뷰' 네 번째 주인공은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 <창>(2012), <사이비>(2013) 등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입니다.최규석 작가와 연상호 감독은 대학 시절부터 친구이자 동료로, 만화계와 애니메이션계 소문난 '케미 커플'인데요, 사실 최규석 작가는 연상호 감독을 추천하며 "물어볼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애니메이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듣는 친구인 만큼 '제2의 연상호'를 꿈꾸는 이들을 대신해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현재와 미래'라는, 영화 <인터스텔라> 만큼이나 거대하고 심오한 질문을 던졌습니다.연상호 감독은 인터뷰 섭외에 흔쾌히 응하면서도 최규석 작가 질문에는 "너무 많이 물어보는 거라, 다른 얘기 하죠?"라며 허허 웃었습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단박 인터뷰' 덕에 '한국 애니메이션의 젊은 거장'과 카카오톡 주고받는 사이가 됐는데요. 어떤 인터뷰가 될지 기대되시죠? 커밍 쑨~!
* '단박 인터뷰'는 2015년 <프레시안>이 새롭게 연재하는 조합원과 독자 참여형 인터뷰입니다. 이번 인터뷰에 질문을 보내주신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조합원은 이후철(피터팬 79), 문근영(아사검) 씨입니다. 고마운 마음에 두 분 앞으로 최 작가의 사인을 받았습니다. 잘 보관하고 있다가 꼭 전달하겠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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