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취임을 일주일 앞둔 2008년 2월 18일, 청와대 관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마주했다.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과 임태희 당선인 비서실장이 배석했다. ~ 노 대통령은 청와대 생활을 마무리하는 소회를 장시간 털어놓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나누고 싶었던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내가 말문을 열었다. "한미 쇠고기 협상을 마무리 짓기로 부시 대통령과 수차례 약속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남은 임기 중 처리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노 대통령은 미국과 약속했다는 점은 시인하면서도 한미 쇠고기 협상이 타결된다고 미국 의회가 FTA를 처리해준다는 보장이 없다고 했다. ~ 이로써 한미 쇠고기 협상을 마무리 짓고 떠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를 안고 찾아갔지만 뒷맛이 씁쓸했다.
다음 달 2일 출간될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알에이치코리아 펴냄)에 담긴 내용이다. <프레시안>이 입수한 회고록 내용 중 '내부로부터의 도전 광우병 사태'에서는 2008년 5월부터 8월까지 이어진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에 대한 이 전 대통령의 생각이 자세히 담겨 있다. '자화자찬'식 화법은 여전했다.
이 전 대통령은 한미FTA의 선결 조건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건 관련 "(인수위 시절 참여정부의) 한덕수 총리가 우리 측 인사를 통해 내가 대통령을 직접 만나 해결하는 길밖에 없을 것 같다는 뜻을 전해왔다"며 "대통령 당선인인 내가 제안한다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취지라고 생각했다"고 당시 노 대통령을 만난 배경을 설명했다.
앞서 2007년 12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은 30개월 미만으로 제한할 경우에 한해 한미 쇠고기 협상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는 2008년 1월 26일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미국 측에 "더 이상 쇠고기 문제에 대한 논의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입장을 통보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2월 18일 청와대 만남은 성과 없이 끝났다"며 "결국, 나는 한미 쇠고기 협상과 관련하여 큰 딜레마를 안고 대통령에 취임해야 했다. 일련의 사태로 우리 국민들은 '미국산은 30개월 미만의 뼈 없는 쇠고기만 안전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그런데 전임 정부가 미국에 'OIE 권고를 존중하여 한미 쇠고기 협상을 타결하겠다'고 한 약속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고 밝혔다.
국제수역사무국(OIE) 권고에 따르면 미국과 같은 당시 ‘광우병 위험통제국’ 쇠고기 교역에서 7가지 광우병 위험물질(SRM)을 뺄 경우, 30개월령 이상 쇠고기를 수입하도록 돼 있다.
이 전 대통령은 "국민을 안심시키려면 미국과의 약속을 깨야했고, 약속을 지키자니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형국이었다"며 "전임 대통령이 여러 차례 약속한 상황이라 협상의 여지도 크지 않았고 미국은 OIE 기준 준수를 요구했다"고 덧붙였다.
"촛불 집회, 순수한 국민 뜻 편승해 대통령과 정권 무너뜨리려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 협상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한 뒤 "우리 측 협상단은 4월 16일 '협상 중단'이라는 초강수까지 두면서 협상에 임했다"며 "그 결과 강화된 사료 금지 조치 및 쇠고기 연령 표시 등 미국 측 양보를 다수 얻어냈다. OIE 기준보다 강화된 타협안이었다"고 당시 쇠고기 협상을 평가했다.
하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한미 정상회담을 위한 졸속 협상을 했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이 전 대통령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반응이지만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며 "수차례의 한미 정상 간 약속으로 협상 여지가 좁아진 것이 바로 그들이 집권하던 때 벌어진 일이었다"고 불만을 표현했다.
미국산 쇠고기 협상으로 5월부터 청계광장에서 진행된 촛불집회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을 할애해 자신의 당시 심경을 설명했다. 이 전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는 (광우병) 괴담이 연예인 팬클럽으로 확산된 결과, 여중고생들이 참석자의 주류를 이뤘다"며 "여기에 일부 연예인들이 동참하면서 집회는 급속히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후 공기업 노조를 비롯해 시민단체 등도 집회에 합류하기 시작했다"면서 그 이유에 대해 "새 정부의 공기업 개혁에 대한 논의가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해석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가 공기업 조직을 통폐합하고 정원을 줄이며, 일부 공기업은 민영화를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이 공기업 노조를 자극했다는 것.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임직원들에게 쇠고기 수입 허용 조치는 정부에 저항하는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이 전 대통령은 분석했다.
뿐만 아니라 이 전 대통령은 정치 세력들도 집회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대선 불복 세력이 건강을 염려하는 순수한 국민들의 뜻에 편승해 대통령과 정권을 무너뜨리려 했다는 것.
이에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당시 조건은 집권여당에 모두 불리한 조건이었다고 이 전 대통령은 평가했다. 공영방송은 전임 정부가 임명한 경영진과 노조가 좌우하고 있었고 국회 역시 임기가 1개월 남짓 남은 17대 국회의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 이 전 대통령은 이런 국회의원들에게 의욕이 있을 리 없었다고 꼬집었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 배경을 두고도 "일부 정치 세력들이 괴담을 퍼뜨리고 공포를 조장하는 상황에서 일단 국민을 안심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정부의 입장을 국민에게 합리적으로 전달할 통로가 막혀 있었다. 대통령‧실장 중심으로 모든 수석이 언론사를 분담해 언론사 간부들과 기자들을 만나 이 문제를 설명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밝혔다.
"광우병 파동 때, 원칙 지킨 것이 국제사회에 깊은 인상"
이 전 대통령은 광우병 쇠고기 집회에서 등장한 '명박 산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명박 산성'은 시위대가 청와대로 진입할 수 있는 길목에 컨테이너를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것을 일컫는다.
이 전 대통령은 "경찰이 청와대로 향하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무리하다가는 자칫 불의의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걱정에 '시위대가 청와대에 들어오는 일이 있더라도 인명 피해가 있으면 절대 안 됩니다.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대처해주세요'라고 어청수 경찰청장에게 당부했다"며 "('명박산성'에 대해) MB식 소통이 이런 것이냐' 하는 비판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물리적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비판을 받은 '회전문 인사'도 언급했다. 당시 광우병 파동으로 이명박 정부 1기 청와대 참모진 6명이 사퇴했다. 이 전 대통령은 "광우병 사태는 전체 내각이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며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사퇴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퇴한 6명에 대해 "가슴이 아팠다"며 "이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시 정부를 위해 일하도록 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사퇴를 수락했다"며 "이날 사퇴한 참모진 대부분은 임기 중 다시 중용되어 국가를 위해 큰일을 했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광우병 파동으로 얻은 점도 많다고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광우병 사태가 터졌을 때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은 우리 정부가 결국 정치적 결정을 내릴 것이라 전망했다"며 "그러나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원칙을 지킨 것이 국제사회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자기 나름의 성과를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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