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알에이치코리아 펴냄) 일부가 29일 언론에 공개됐다.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총괄 기획한 이 책은 2013년 5월 집필을 시작해 1년 10개월가량 걸렸다고 한다. 김두우 전 수석은 "이 전 대통령의 기획에 의존·구술돼 집필된 책이 아니라 참모들의 집단 기억을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책은 거센 사회적 비판을 받는 이 전 대통령의 4대강 사업과 한·미 쇠고기 협상, 대북 정책, 한·중 또는 한·일 관계에 대해 놀랄 만큼의 자화자찬과 자기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프레시안>이 입수한 회고록의 내용을 일부 전재한다. 책은 오는 2일 출간된다.
■ 4대강 사업 및 대운하 사업
이 전 대통령은 책에서 "세계 금융위기가 들이닥쳤을 때 우리가 신속히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22조 원에 이르는 혈세를 투입하고도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녹조 등 환경적 문제를 만들어 낸 4대강 사업을 두고,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재정사업이었다고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해 이 전 대통령은 '4대강 사업은 대운하 건설 위장 사업'이라는 사회 일각의 주장과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대해 "비전문가들이 단기간에 판단해 결론을 내릴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세계적 금융위기 중) 4대강 살리기 사업은 환경개선과 경제위기 극복을 한꺼번에 만족시키면서 적시에 추진될 수 있었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은 한국이 세계 금융위기를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보다 빨리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내가 대운하를 만들기 위해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벌였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주장이다."
"(4대강 사업이 대운하 건설 위장 사업이라는) 주장은 퇴임 후 감사원의 4대강 살리기 사업 감사 결과에서까지 나왔다. 입찰 시공 과정에서 부정이나 불법 행위가 있는지를 파악해야 할 감사원이 ‘대운하 위장설’ 같은 것을 발표하는 행위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 4대강 살리기 사업은 감사원의 비전문가들이 단기간에 판단해 결론을 내릴 수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대가뭄이 닥치자 4대강 반대론자들은 ‘녹조’ 문제를 들고 나왔다. 과거 가뭄이 오지 않아도 갈수기에는 4대강이 녹조로 뒤덮였던 사실을 외면한 주장이다. (…) 4대강 살리기 사업의 본질이 왜곡되고 정치 쟁점화되는 과정에서 국익을 훼손시키면서까지 국제사회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반대하는 일부 시민단체들 모습을 보며 나는 큰 안타까움을 느꼈다."
■ 한·미 쇠고기 협상과 촛불집회
MB 정부 초기 엄청난 규모의 촛불 집회를 불러일으켰던 한·미 쇠고기 협상에 대해선 이 전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뢰도를 높이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협상의 여지"가 좁았던 탓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탓으로 이 전 대통령은 돌리고 있다.
"광우병 사태는 한·미관계 신뢰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원칙을 지킨 것이 국제사회에 깊은 인상을 줬다. 세계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한국의 국가부도 사태를 막은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이나 한국의 G20 참여 등 굵직한 외교적 성과 이면에는 광우병 사태로 쌓인 국제사회의 신뢰가 있었다."
"한·미 양국 대통령이 몇 차례에 걸쳐 약속한 일을 마무리짓지 않은 채 퇴임하겠다니, 넘겨받은 이 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가슴이 답답했다. (중략) 뼛조각 사건과 그로 인한 수차례의 한·미 정상 간 약속으로 협상 여지가 좁아진 것은 바로 그들(민주당)이 집권하던 때 벌어진 일 아니었던가."
"어청수 경찰청장에게 ‘시위대가 청와대에 들어오는 일이 있더라도 인명 피해가 있으면 절대 안된다.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대처해달라'고 당부했다. (중략) '명박산성' 비판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물리적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 대북 정책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북한이 다섯 차례 넘게 정상회담을 제안해 왔지만, 때마다 큰 규모의 식량 지원이나 도로 건설 재료 등을 요구해 결국 무산됐다고 밝혔다. 또 연평도 포격 이후 2010년 극비 방한했던 북한 보위부 인사가 대통령 면담 불발 후 빈손으로 귀국한 후 처형됐다는 이야기를 미국을 통해 전해들었다고도 밝혔다.
"2009년 8월 23일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단을 청와대에서 접견했다. 인사가 끝나자 김기남 노동당 비서가 남북정상회담을 언급했다. 나는 남북정상회담이 과거처럼 정작 중요한 문제는 언급하지도 못하면서, 대북 지원 논의만 하는 것이라면 회담을 할 필요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2009년 10월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싱가포르에서 우리 측 인사와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통보해왔다. 북한 핵 문제, 국군포로와 납북자 송환 등을 주요 의제에 포함시키되, 정상회담을 위한 대가성 지원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침으로 확정했다."
"북한은 임태희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서명한 내용이라며 세 장짜리 합의서라는 것을 들고 나왔다. 정상회담을 하는 조건으로 우리 측이 옥수수 10만t(톤), 쌀 40만t, 비료 30만t의 식량을 비롯하여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 달러어치를 제공하고 북측의 국가 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를 우리 정부가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2010년 6월 국가안전보위부 고위급 인사 명의로 메시지를 보냈다. 국정원 고위급 인사와 접촉하고 싶다는 요구였다. 7월 국정원 고위급 인사가 방북했다.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 사과와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를 요구하자 북측은 '(당사자가 아닌) 동족으로서는 유감이라 생각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2010년 12월 5일 북측 인사는 비밀리에 서울로 들어왔다. 대좌 1명, 상좌 1명과 통신원 2명을 대동했다. 양측은 협의 끝에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2011년 초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와 접촉한 북측 인사가 공개처형됐다는 것이다. 당시 권력 세습을 준비하고 있던 김정은 측과 군부에 의해 제거됐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2011년 5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중 정상회담이 열렸다. 원자바오가 이렇게 말했다. '오랜 친구로서 저는 대통령께서 결심을 내려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성사되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북한은 과거 전례대로 대가를 요구해왔습니다. 북한의 조건을 받아들이면 정상회담을 구걸하는 것이 됩니다. 남북관계도 정상화될 수 없습니다.'"
"(2012년 1월 9일) 원자바오 총리는 회담을 마친 뒤 댜오위타이 만찬에서 "저는 북한의 '젊은 지도자'(김정은)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당시는 북한이 김정은으로의 권력 이양을 서두르면서 대남 비방에 몰두할 때였다. 나는 "우리는 늙고 은퇴하는데 북한은 젊은 사람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50~60년은 더 집권할 텐데 참으로 걱정입니다"라고 했다. 원자바오는 "그렇지만 역사의 이치가 그렇게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나는 북한의 장래를 두고 '그리 오래 참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
■ 한·일 관계
"2012년 8월 6일, 청와대에서 독도 방문과 관련하여 회의를 가졌다. 나는 취임 전부터 임기 중 독도를 방문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조용한 외교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대통령이 방문하여 우리 영토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각인시키는 행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 역시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갈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한다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
"일본 정부는 2012년 3월 사사에 겐이치로 외무차관을 보내는 등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쟁점은 우리 정부가 요구하는 일본 총리의 사과와 일본 정부 차원의 경제적 보상 여부,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2012년 10월, 이동관 특임대사가 사이토 쓰요시 관방 부장관과 접촉했다. 2012년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개최되는 아세안 및 동아시아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을 열어 위안부 문제를 최종 합의하기로 했다. 노다가 직접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서한을 보내 사과를 하고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할머니들에게 피해 보상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이 9부 능선을 넘었다. 그러나 아세안 정상회의 직전 중의원 해산 결정이 내려지면서 협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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