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시민들이 정부 관료나 전문가에게 '양심'과 '상식'을 기대하지만, 부질없는 소망인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에 관료, 전문가, 정치인들은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정부가 어떤 정책결정을 하느냐에 따라서 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가 달린 기업들, 이익집단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정부의 정책결정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관철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로비, 매수와 같은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래서 관료나 전문가들은 '영혼 없는 관료', '영혼 없는 전문가'들이 되기 쉽습니다. 돈, 자리 등이 이들을 유혹합니다. 이처럼 이권으로 물든 정책결정구조가 지금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전력 문제는 대표적으로 이권에 의해 정부정책이 좌우되는 분야입니다. 정부는 '공익'을 얘기하지만, 사실은 '사익'입니다. 원전이나 석탄화력발전소 같은 대규모 발전소를 짓는 것은 철저히 '사익'을 위한 것입니다. 국가공동체를 생각한다면, 이런 발전소들을 지어댈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부는 숫자를 조작해 발전소를 지을 명분을 만들어냅니다. 국가에너지기본계획, 전력수급기본계획 같은 계획에서 원전과 석탄화력발전소를 대량으로 짓기 위해 전력수요를 부풀립니다. 수요를 부풀려야 대규모 발전소를 지을 명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그런 숫자 조작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22일 <조선일보> 한삼희 논설위원은 '電力 마피아의 통계 왜곡'이라는 칼럼을 통해 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통계 이야기라 약간 복잡할 수는 있지만, 핵심을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2014년 1월 정부는 제2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23개인 원전을 40개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부는 대한민국의 경우, 최종에너지 소비 대비 전력소비 비중이 19.0퍼센트(%)(2011년 기준) 수준에 불과해서 OECD평균인 22%에도 못 미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2035년까지 전력소비 비중을 27.2%로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원전을 대량으로 짓겠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의 통계 잡는 방식과 국제에너지기구(IEA)가 통계 방식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의 통계처리 방식을 따르면, 대한민국의 전력소비 비중은 25.1%입니다. 이미 OECD 평균보다 전력소비 비중이 더 높은 것입니다.
정부 관료들이 통계 잡는 방식의 차이를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원전을 많이 지어야 한다는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비교할 수 없는 수치를 비교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숫자 조작'으로 시민들을 혼란에 빠뜨리려고 한 것입니다. 정부가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것은 시민들을 상대로 사기 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한민국의 1인당 전력소비량은 2011년 기준으로 1만162킬로와트(kwh)에 달합니다. 미국을 제외한 웬만한 선진국들보다는 높은 수준입니다. 독일, 프랑스, 일본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런데 통계수치를 엉터리로 비교하여, 마치 대한민국이 전력을 더 생산·소비하는 게 '선진국'으로 가는 길인 것처럼 만든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제2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전력수급기본계획, 송전선이나 변전소 건설, 원전과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처럼, 이권이 개입된 곳이면, 이런 '숫자 사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2013년 2월에 발표된 6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도 전력수요를 부풀리기 위해 이상한 방법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국회 예산정책처에서 나온 보고서에서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전력수요를 부풀리기 위해 쓴 대표적인 방법은 전기요금 상승률을 낮게 잡는 것이었습니다. 6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는 2013년부터 2027년까지 소비자물가상승률을 43%로 예측했습니다. 그런데 산업용 전기요금은 이 기간 동안 13% 증가하는 것으로 잡았습니다. 소비자물가상승률에 비해 산업용 전기요금 상승률을 훨씬 낮게 잡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기요금이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에 산업용 전기소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지금도 산업용 전기요금이 너무 낮기 때문에 산업용 전기소비가 증가해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1달러의 GDP(국내총생산)을 만들어 내기 위해 소비하는 전력량이 OECD 평균에 비해 1.8배에 달합니다. 그런데 정부는 전력수요 예측을 하면서 앞으로도 산업용 전기요금 증가율을 소비자물가 상승률보다 낮게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제로 전력수요를 부풀려서 잡은 것입니다.
더욱 문제인 것은 2013년에서 2027년까지 주택용 전기요금 상승률은 소비자물가상승률(43%)보다 높은 55%로 잡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산업용 전기요금 상승률 13%보다 훨씬 높게 잡은 것입니다. 주택용 전기요금은 많이 올리겠다는 얘기입니다.
현실이 이러니,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권이 정책을 좌지우지 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시민들은 이런 '숫자 사기'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알려주지를 않으니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 틈을 이용해서 이해관계집단과 정부관료,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국가의 전력정책을 주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일반 시민이 전력정책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비전문가가 뭘 아느냐'는 식의 얘기가 돌아옵니다. 그래서 이것은 민주주의 문제이고, 인권문제입니다.
2012년 1월 16일, 경남 밀양에서는 한 70대 농민이 분신자살을 했습니다. 송전탑 공사에 항의하며 '내가 죽어야 문제가 해결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분신하신 것입니다. 엉터리 계획과 그것에 바탕을 둔 원전건설과 송전탑공사로 인해 일어난 일입니다. 내일이면 그의 분신 2주년이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 제가 책을 한 권 냈습니다. <착한 전기는 가능하다 - 우리가 몰랐던 전기이야기>(한티재 펴냄)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지난 3년 동안 대한민국의 전력정책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민들을 속여서 불필요한 발전소와 송전선들을 대량으로 건설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밀양 송전탑만 하더라도, 고리의 낡은 원전들을 폐쇄하고 새로운 원전을 건설하지 않는다면 필요 없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이것은 여러 차례 얘기한 바 있습니다.
제 주장은 전기를 쓰지 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전기, 원전의 위험 속에 우리를 빠뜨리지 않는 전기,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는 전기를 쓰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착한 전기’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사실 외국에서는 이미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뒤떨어져 있을 뿐입니다.
이런 와중에 정부는 올해 상반기 내로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수립하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엉터리였는데, 갑자기 잘할 리는 만무합니다. 그래서 이 계획부터 바로잡을 수 있도록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착한 전기는 가능합니다.
<주간 프레시안 뷰>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만의 차별화된 고급 칼럼지입니다. <프레시안 뷰>는 한 주간의 이슈를 정치/경제/국제/생태/세월호 등으로 나눠 각 분야 전문 필진들의 칼럼을 담고 있습니다.
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국제는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이 맡고 있습니다. 생태와 세월호는 각각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원장이 격주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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