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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은 '천황'의 목을 치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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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은 '천황'의 목을 치지 못했나?

[동아시아를 묻다] 황제와 천황

교토와 천황

교토에 다녀왔다. 천황이 1000년을 머물던 곳이다. '천황'과 '일본'은 불가분이다. 여전히 천황제 국가라는 점에서 교토야말로 일본 문명의 배꼽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천황을 일왕(日王)으로 고쳐 불러야 직성이 불리는 식민지 콤플렉스는 서둘러 떨쳐버리는 편이 낫겠다. 천황을 천황으로 대접해야 한다. 그리고 골똘히 궁리해야 한다. 어째서 일왕이 아니라 천황이었던가. 그제야 비로소 지정학적 '동북아'가 아니라 지리 문명적 지평에서 일본의 예외성이 또렷하게 포착된다. 일본은 중화 세계와 동떨어져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황이 존재할 수 없었다.

일본 전에 야마토(大和)가 있었다. 야요이 시대, 고분 시대, 아스카 시대까지 한반도의 문화가 야마토에 미친 영향이 상당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경합했던 시절에는 야마토가 한반도의 합종연횡에 당사자이기도 했다. 신라는 당과 결탁했고, 야마토는 백제를 지원했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하자(660년), 백제의 후예들이 대거 야마토로 망명했다. 야마토는 백제의 재건을 위해 재차 군사를 파병하기도 했다. 백촌강 전투이다(663년). 이 전쟁에 패함으로써 마침내 야마토는 반도와 멀어져갔다. 통일신라와는 좀체 친선을 유지하지 못했다. 야마토 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백제계 도래인들에게 통일신라는 모국을 멸망시킨 원수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도가 반도와 소원해짐으로써 야마토는 '일본'이 되어갔다.

'일본(日本)'이 처음 국호가 된 것이 689년이다. 그리고 '천황'이란 명명도 비로소 등장했다. 천황(天皇)은 황제(皇帝)보다도 높은 개념이다. 즉, 천황이라고 이름 짓는 것에서부터 천자(天子), 즉 중국(당나라)의 황제에 대항하는 뜻을 담고 있었다. 수나라 때부터 야마토 조정이 책봉을 거부했다는 기록도 있다. <수서(隋書)>에 따르면,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라며 서언을 보냈다고 한다.

일본이 정식으로 중국에 사신을 보내 국호와 왕명 변경(대왕(大王)에서 천황으로)을 고지한 것은 702년이다. 그럼에도 측천무후는 개의치 않고 불문에 부쳤다. 일본을 중화제국의 외부로 간주한 것이다. 흉노나 선비 등 북방 유목민들과 달리 바다 건너 일본이 안보의 위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방관하고 방치한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나 1894년 청일전쟁은 상상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894년 일본은 견당사(遣唐使)를 폐지했다. 청일전쟁 딱 1000년 전이다. 일본과 중화 세계의 분기를 극적으로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당풍(唐風)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 시대가 저물고, 국풍(國風) 문화가 싹을 틔우는 후지와라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일본화가 진행되었다. 가마쿠라 시대(1185~)에는 무사 시대가 열렸다. 무로마치 시대(1336~1573년)에는 선종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래서 교토가 자랑하는 금각사와 은각사 등 환상적인 선종 사찰을 낳았다. 무사도와 선종(ZEN)은 천황과 더불어 일본을 상징하는 핵심 지표가 되었다.

반면 한반도와 베트남 및 북방 유목민들은 중국의 영향이 지대했다. 그럼에도 중국에 저항하며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탈중국을 위한 중국화'의 기제가 가동되었다. 가령 베트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939년이다. 중국에의 종속이 끝남과 동시에 '중국화'는 도리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중앙 집권 체제가 확립되고 문인 관료제가 정착하였으며 유교 사상이 보급되었다. 13세기에는 과거 제도도 시작되었다.

일본만이 중화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독자노선을 걸었다. 그 상징적인 풍경을 연행록에서 간취할 수 있다. <열하일기>를 읽노라면 연암이 중국, 베트남, 류큐의 사신들과 필담을 나눈다. 더불어 몽골과 티베트 등 북방 민족들과의 조우도 인상적이다. 그런데 유독 일본인만은 없다. 남경과 북경, 열하를 축으로 1000년간 진화해 왔던 중화 세계의 다자 관계에서 열외로 있었던 것이다. 간혹 일본이 중화 세계로 (재)진입하고자 시도했던 적이 있다. 첫 번째가 임진왜란이요, 두 번째가 청일전쟁이었다. 어설프고, 거칠었다. 그만큼 낯선 존재였다.

황제와 천명

천명(天命)이라는 것이 있다. 중국의 황제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사상이다. 천명은 왕조가 교체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하나의 왕조가 계속 이어진다면 정통성이 달리 문제가 될 까닭이 없다. 특히 한 왕조가 무너지고 다음 왕조가 생겨날 때 천명의 여부는 관건적이다. 천명이 곧 민의(民意)라는 사고방식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왕조가 붕괴하는 것은 백성들의 지지가 없기 때문이다. 새 왕조의 개창은 인민들의 지지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명사상은 왕권신수설과 같은 허장성세가 아니다. 정치적 변혁, 혁명의 이념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즉. 역성혁명이란 단순한 권력 교체,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이념의 문제, 리(利)가 아니라 의(義)의 문제였다. 그래서 정의롭고 보편적인 이념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새 왕조가 정통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맹자의 충격'은 민주 국가, 복지 국가의 먼 기원이었다.

천명은 추상이나 허언으로 그치지 않았다. 사관이라는 구체적인 제도로 뒷받침이 되었다. 사관은 통치자의 행동 하나 하나를 기록하고 평론하는 임무를 맡았다. 물론 동시대에 탄압받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후대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러한 탄압의 시대 자체가 비판적으로 기록되었다. 만세의 불명예를 사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지배자는 더더욱 역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천명에 바탕을 둔 주권자는 신이 아니라 사(史)를 모셨다. 역사란 곧 미래의 민의였기 때문이다.

이 천명사상이 1000년간 중화 세계에 널리 전파되고 공유되었다. 고려 왕조의 개창(918년)부터 그러하다. 고려의 출발은 통일신라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건이었다. 명실상부 최초의 '역성혁명'이었다. 태조 왕건은 신라의 국왕과 후백제의 왕을 왕조의 친족으로 편입시켰다. 고려 왕조가 '선양(禪讓)'에 의해 탄생했음을 과시한 것이다. 즉, 무력에 의한 권력 쟁취(쿠데타)가 아니라 역성혁명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달리 말해 천명이라는 유교 관념에 기초한 첫 번째 권력 교체였다.

그리고 관료제와 유학의 도입이 증진되었다. 그럴수록 문존무비(文尊武卑) 경향이 강해졌다. 신라만 해도 화랑이라는 무인 문화가 활달했다. 그러나 중화 세계형 문명화가 진행될수록 문관 우위가 뚜렷해졌다. 반발한 무인이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 12세기말 '(최 씨) 무신정권'이다. 그럼에도 일본의 무사 정권과는 달랐다. 고려의 무인은 어디까지나 무관(武官), 즉 관료였기 때문이다. 이미 고려는 일본과 매우 다른 사회였다.

반면 일본의 천황은 천명과 무관한 존재했다. 천황의 정통성은 신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 혹은 천황 자체가 신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혈통 이외에 존재를 정당화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만세일계를 누릴 수 있었다. 고쳐 말해 만세토록 혁명이 부재했다는 말이다. 정치권력의 정통성이 민의의 실현이나, 보편적 이념의 구현에 있다는 발상이 자리 잡지 못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상징적이다. 천황 지배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천명한 문헌이다. 사마천의 <사기>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역사'였다. 그래서 유독 일본만은 <조선왕조실록>이나 베트남의 <대남실록>에 비견될 역사 기록물이 없는 것이다. 천명의 부재가 혁명의 부재를, 혁명의 부재가 역사(의식)의 부재를 낳았다. 즉, 일본에서는 과거사 청산의 부재야말로 '역사적인 것'이다. 목하 동아시아 역사 분쟁의 근저이고 기저이다.

천명과 민주

메이지유신은 천명 없는 혁명이었다. 천황의 목을 친 것이 아니라, 천황을 섬김으로써 에도 막부를 타도한 것이다. 민중 혁명이 아니라 하급 무사들의 반란이었다. 천황이 옷을 갈아입고 교토에서 에도(도쿄)로 천도했을 뿐이다. 전후 민주주의 또한 천명 없는 혁명이라는 점에서 일관되었다. 천황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인간 선언'으로 전쟁 책임 일체를 면죄 받았다. 천황제 파시즘이 상징 천황제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책임지지 않는 권력, 도덕이나 이념과는 무관한 권력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였다.

이를 기획한 맥아더의 선택은 탁월하고도 노회한 것이었다. 천명이 부재한 일본 역사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점령 통치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전범들과 그 후예 또한 자민당의 주축으로 재기할 수 있었다. 즉 대일본제국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또 다시 역성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그 천명 없는 민주야말로 '전후 민주주의'의 빈곤이자 빈약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전후 민주'마저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따라서 작금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나 '우경화' 또한 전혀 예외적이거나 일탈적인 현상만은 아니라고 하겠다. 오히려 일본사의 관성이 재차 발현되고 있는 것에 가깝다. 일본과 중화 세계의 어긋남이 갈수록 뚜렷하게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신냉전'이니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 또한 황제와 천황으로 상징되는 오래된 역사의 갈림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고졸하고 고즈넉한 교토에서 수심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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