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삼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계열사들을 한꺼번에 4개나 한화그룹에 매각하는 '빅딜'을 결정했다. 이 사건을 기업의 입장이 아니라, 팔려나가는 계열사 직원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매우 시사적이다.
최근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정규직이 과보호되고 있어 비정규직만 양산된다"거나 "외국기업들이 해고가 어려워 국내에 투자하기 어렵다고 한다"면서 슬슬 "모든 한국 노동자의 하청업체 직원화"를 기획하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매각이 결정된 계열사들은 삼성그룹 내에서 '서자'로 분류된 업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재계에서는 삼성그룹 계열사들은 삼성전자라는 전자(前子)와 나머지 계열사인 후자(後子)로 나뉘는데, 후자 중에서도 일부 계열사는 '서자'라는 얘기가 농담처럼 떠돌고 있다.
그래도 이건희 회장이 장악하고 있을 때는 일종의 '삼성왕국'으로 '서자'들도 가족의 일원으로 끌어안는 가부장적인 기업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3세 후계자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부담일 뿐이다. 글로벌 기업환경이 엄혹한 상황에서 '경험과 능력 부족'인 후계자들이 '모든 가족'을 끌어안고 가기 힘들 것이라는 점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당장 7500명에 달하는 '서자' 계열사들의 삼성맨들은 지금 망연자실하면서 "토사구팽을 당했다"고 배신감에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건재할 때는 노조를 금기시하는 삼성의 문화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가족문화로 그나마 명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삼성은 "노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진급하거나 오래 버티기 힘든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삼성맨들 사이에서도 '이래서 노조가 필요하구나'는 생각이 절실해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이번 매각 결정이 경영권 승계가 관련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더욱 참기 어려운 모양이다.
'서자' 계열사 삼성맨들 "경영승계 위해 토사구팽 당했다"
가장 인원이 많은 방산업체 삼성테크윈 직원들은 매각 방침에 집단 반발하고 나섰다. 사업장 별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성명까지 발표했다. 경남 창원에 있는 삼성테크윈 제2사업장 직원 대표 기구인 '21세기협의회'는 27일 성명에서 "37년간 우리의 피와 땀으로 일궈온 회사를 삼성그룹의 이해관계에 따라 오너가 경영 승계를 위한 구조개편 작업 목적으로 한화그룹에 하루아침에 매각 결정된 것은 그야말로 토사구팽”이라고 주장했다. 제2사업장은 항공기 엔진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직원은 1600여 명이다.
삼성테크윈 제3사업장 노동자협의회도 "독단적으로 이루어진 매각에 대해 노동자협의회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성명을 내며 반발했다. 삼성테크윈 3사업장은 육군 주력 포병 무기인 K-9자주포 등 방산부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6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삼성테크윈에는 비대위를 통해 연대투쟁을 해나가는 동시에 향후 상황에 대비해 노조를 구성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화는 삼성테크윈 등을 인수하며 관련 임직원을 100% 고용승계하고 5년 동안 고용을 보장한다는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봉 수준도 삼성에서 받던 수준을 유지할 전망이다.
하지만 가뜩이나 기획재정부 고위관계자가 "정규직 정리해고 절차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고용보호 하향 평준화'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 상황에서 '팔려가는 삼성맨'들이 이런 약속을 그대로 믿을 리 없다.
삼성 계열사 매각의 배경에 경영 승계가 있다는 시각은 '피해의식'을 가진 삼성맨들의 오해일까? 아닌 모양이다. 월가를 대표하는 경제전문지 <월스트리저널>은 삼성의 계열사 매각 결정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삼성전자 지배력 강화 위해 모든 수단 동원할 것"
"삼성그룹의 오너 일가가 '체스판'에서 첫 수를 두었다. 투자자들은 인내심을 갖고 결과를 기다려라. 지난 5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이후 대대적인 구조개편이 진행되고 있다.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삼성SDS가 이달 상정되고 오너 일가가 소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제일모직(에버랜드와 합병)도 12월 상장 예정이다.
26일에는 한화그룹에 계열사들을 매각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동시에 삼성전자는 2조 원에 달하는 자사주 매입계획을 발표했다. 투자자들이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다.하지만 오너 일가의 목표는 분명하다. 오너 일가의 지분이 합해도 5%에 못미치는 삼성전자 같은 핵심 사업에 대한 지분을 늘리고, 수 조 원에 달하는 상속세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삼성SDS와 제일모직의 상장은 상속세를 낼 자금 확보의 일환이다. 전문가들은 이 업체의 지분을 오너 일가 매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식으로 상속세 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삼성종합화학과 삼성테크윈은 희생양이 된 것으로 보인다. 비핵심사업을 정리함으로써 순환출자구조에서 중요한 삼성물산과 가장 중요한 삼성전자 등의 핵심사업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삼성은 계열사 지분 매각이 핵심사업 투자를 위한 자금 확보가 목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삼성은 60조 원이 넘는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조 원을 들여 자사주를 매입한다고 발표했다. 자사주 매입은 오너 일가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CLSA의 애널리스트 숀 코크런은 '지배구조 개편의 한 시나리오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자사주 매입으로 확보하는 지분은 오너 일가가 지배하는 새로운 지주회사로 넘겨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오너 일가가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투자자들은 삼성그룹의 다른 계열사들보다는 삼성전자에 투자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삼성그룹에서 삼성전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호되어야할 체스판의 '왕'과 같은 존재이다. 투자자들은 이를 믿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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