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에 '친(親)이명박'과 '친박근혜'만 보인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입니다. 그들은 17대 대선 후보 경선, 18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 문제 등을 둘러싸고 경쟁하고 갈등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의제와 담론을 주도하며 국민적 관심을 끌었습니다. 당시 '친이'를 여당이라고 했고, '친박'을 야당이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에 '반(反)이명박 전선 구축의 핵심은 박근혜다, 야권연합의 경계를 넘어 박근혜와 함께 반이명박 전선으로 집결하자'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2014년 10월 말로 접어드는 지금, 그때가 떠올려집니다. 개헌과 공무원 연금개혁이라는 빅이슈를 둘러싸고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입장을 달리하며 정국을 주도하고 있기에 그러합니다.
정치에서 주도권을 발휘하려면, 새로운 의제를 제시해야 합니다. 정치·사회적 집단 간에 균열과 갈등을 만들어내는, 즉 쟁투(爭鬪)를 불러오는 의제여야 합니다. 행정수도 이전, 개헌, 공무원 연금개혁과 같은 의제 말입니다. 의제를 설정해 쟁점(爭點)이 만들어졌으면, 혹은 의제를 설정하고 쟁점을 짜내는 과정에서는 담론(談論)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왜 그 의제를 하필 지금 그런 식으로 다루어야 하는지, 그러면 어떤 효과가 나는지를 담고 있는 담론 말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이렇게 풀면 되겠구나'라는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담론 말입니다. 이 담론을 만든 세력이 혹은 더 잘 만든 세력이, 그래서 더 많은 혹은 더 큰 동의를 얻어낸 세력이 자신의 정책 구현이라는 승리의 전리품을 챙기겠지요. 이 승리의 전리품을 챙긴 세력이 (또 혹은 새롭게) 정치를 주도할 힘을 가질 것이고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개헌을 들고 나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했습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불편함을 드러내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개헌보다 민생이 우선이라는 박 대통령의 의사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이라면서 그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기국회가 끝나면, 개헌 논의를 피해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낮춰 대통령을 받드는 형색을 취하되, 개헌 논의에 불을 지펴놓은 것입니다. 아직은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지 못해 그런지, '친박'이 '친이'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수를 놓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김 대표의 내공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약을 조절하는 지혜를 갖췄다 싶습니다.
박 대통령이 가만히 있을 리 없죠. 바로 역공에 나섰습니다. 공무원 연금개혁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자, 개헌 의제가 덮이는 형색입니다. 공무원 연금개혁은 개헌에 비해 이해득실이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이고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의제 파급의 범위와 속도와 세기가 더 넓고 빠르고 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맥락과 명분의 차원에서도 공무원 연금개혁이 더 우선시해야 할 의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박 대통령이 주창한 '국가개조-공직사회 개혁'이라는 의미구조와 연계성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담론과 정책의 수준에서도 이미 내용을 갖췄습니다. 조직적으로는 정부와 여당을 아우르는 추진 세력의 고리가 만들어졌습니다.
김 대표는 공무원 연금개혁의 연내 처리 방침에 대해 '하면 되는 것이지 시한을 못 박을 이유는 없다'는 태도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국민 다수의 의견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무원 집단의 강한 반발과 다른 안을 갖고 반대에 나선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합니다. 썩 나무랄 대응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 자신이 주도할 의제의 입지가 줄어든 탓도 있습니다. 아니, 김 대표 자체가 발언자 중 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당내 정책담당자(이한구 의원)와 이해 당사자(공무원 조합) 등 이런저런 차원에서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보유한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 연내로 시한을 둠으로써 정기국회 기간 중에 다뤄야 할 문제로 규정돼, 여야 간 협의 등도 원내대표단을 중심으로 이뤄질 문제가 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 대표가 -예전 박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에 맞서 성공적으로 싸워냈던 것처럼- 야당의 위치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둬야 할 수는 무엇일까요? 과연 그런 수가 있을까요? 김 대표는 공무원 연금개혁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만 시기를 연내 처리라고 못 박을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공무원들의 사기를 올릴 방책도 고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결코 공무원 연금개혁의 틀에서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주도하는 의제를 그래서 정국을 꾸려갈 수가 없습니다. 개헌은 현재 그 틀밖에 존재하는 의제이지만, 개헌을 다시 들고 나오기는 어려운 상황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생뚱맞게 전혀 새로운 의제를 들이밀 수도 없습니다. 이미 공무원 연금개혁 정국이 조성되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찬반 구도를 넘어서서, 공무원 연금개혁의 방안을 새로이 제시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국가 및 공직사회 개혁의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고 그것과 연동해 공무원 연금개혁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내놓은 '더 내고 더 받는' 안이나 군인 및 사학연금도 손대자는 식은 안 됩니다. 군인 및 사학연금 역시 결국은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만, 이를 공무원 연금개혁과 함께 추진하자는 것은 저항집단을 늘려, 정책 실현 가능성을 낮추는, 즉 공무원 연금개혁을 하지 않겠다는 혹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겠다는 것에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지만, 그 말 안에 담긴 의미, 특히 가져올 결과와 관련한 의미가 -의도가 담겨 있든 아니든,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간에- 무엇인지를 간파해야지만 제대로 돌아가는 실천입니다. 그저 재정 문제에만 포커스를 맞춰도 안 됩니다. 설사 재정문제 해결을 목표로 잡는다고 해도, 대권을 꿈꾼다면 다르게 접근해야 합니다. 현 시기 대한민국에서 공무원 집단에 담긴 정치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의미들을 중층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그 의미에 바탕해서 재정의 문제를 끌어내야 합니다. 가령 공무원 연금개혁은 단지 '더 내고 덜 받는 문제'가 아니라, '내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공무원을 혹은 공무원 내 특정층을 특권화한 것에서 생겨난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무원 수와 정년 및 근속기간과 호봉 설정 등을 통해 특정층이 과도하게 수혜를 독점하는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도 문제를 살피고 대안을 만들어 대항해야 주도권을 쥐고 대권을 향해 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갑자기 김 대표 조언자 코스프레냐'라는 물음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김 대표를 좋아하게 되었냐고요? 박 대통령을 누군가가 꺾어줘야 한다 생각해 그런 것이냐고요? 아닙니다. 김 대표가 잘 해야 당-정 간에 긴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긴장이 있어야 보수가 혁신하고, 보수가 혁신해야 대한민국 정치가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통령과 필요한 긴장을 만들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집권여당의 당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긴장을 만들지 못하고 그저 대통령에게 끌려간다면, 그 긴장을 가져온 갈등은 사실상 거짓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야당을 배제하기 위한 '사이비 여-야'의 갈등극 말입니다. 이명박 정부 시기에 '친이-친박'으로 나뉘어 '여-야'라 불리며 그리 치열하게 맞서 싸웠지만, 결국은 아무 결과도 내지 못했던 갈등 말입니다. 그래서 정국을 계속 주도할 것처럼 보였다가, 무능하다 여겨졌던 실제 야당에게 보편적 복지와 무상급식이라는 창에 맞아 2010년 지방선거와 2011년 서울시장 보선에서 승리를 내주는 것으로 이어졌던 갈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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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국제는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이 맡고 있습니다. 생태와 세월호는 각각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원장이 격주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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