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6일 저녁, 위키리크스(wikileaks)를 통해 TPP(Trans-Pacific Partnership,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지적재산권(지재권) 분야 협상문안이 유출되었다. 작년 11월에 이어 두 번째다. TPP 협상을 주도하는 미국이 일부 양보를 하기는 했지만, 지재권 보호를 빌미로 건강권을 침해하고 인터넷에서의 정보 공유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며 정보문화 향유권을 저해하는 독소조항들이 협상문안에 그대로 포함되어 있다. TPP 지재권 분야는 분량도 많고 조문이 복잡하며 워낙 전문적인 내용이라 이를 다 소개하기는 어렵고, 의약품과 인터넷 저작권을 중심으로 짚어보려고 한다.
심각한 입법권 침해와 미국의 편파성, 이중성
우선 협상문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은 어떻게 이런 내용들을 통상 관료들이 논의할 수 있을까였다. 한마디로 심각한 입법권 침해다. 지재권 보호와 관계된다고 하여 민‧형사 소송의 세부 내용을 정하고, 심지어 법원이 손해배상 판결을 할 때 손해액을 어떻게 산정해야하는지도 정한다. 저작권 보호기간을 몇 년으로 할지, 어떤 발명에 특허를 부여할지도 통상관료들이 규정하는대로 따라야 한다. 이처럼 개별 국가의 입법자들이 국내법으로 정할 내용들을 통상관료들의 주고받기식 협상으로 만드는 건 지재권과 무역을 연계시킨 1980년대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다(우리는 한미 FTA를 통해 그 극단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의약품을 지재권으로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는 제약산업 정책이나 보건정책의 일환이고, 저작권 보호 역시 문화정책의 하위 개념이다. 대외 교역에나 전문성이 있는 통상관료들이 지재권의 실체 규범들을 이런 식으로 만들면, 하위 정책이 거꾸로 상위 정책을 결정하는 주객전도 현상이 일어난다. 문제는 통상협상이란 국제무대에 반영되는 이해가 국민 다수의 이해가 아니라 다국적 기업의 이해이기 때문에 국내 정책이 심각하게 왜곡된다는 점이다. 특히 협상문의 내용 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협상팀(USTR)은 편파성과 이중성이란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다.
미국의 편파성이란 미국 협상단이 미국 사회의 일방의 이해(할리우드와 제약사의 이해)만 편향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을 말한다. 그리고 이중성이란 통상협상장에서 드러나는 미국의 입장은 미국 국내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말한다.
미국 국내에서는 지재권의 보호와 사회적 이용 간의 균형을 도모하는 여러 장치들이 있지만 통상협상에서 미국은 이러한 균형은 무시하고 지재권의 일방적인 보호만 강조한다. 21세기 들어서만 수십 명의 전직 USTR 관료들이 제약사, 영화사, 음반사에 들어갔다가 다시 USTR로 돌아오는 회전문 인사가 만연해 있다(회전문 인사의 예는 워싱턴포스트 블로그 Timothy B. Lee “Here’s why Obama trade negotiators push the interests of Hollywood and drug companies”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처럼 미국 사회 내의 특정 집단의 이해가 국가간 협상이란 공적 프리즘을 통해 협정문에 반영된다. 그래서 미국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이 제도 선진화라고 여기는 것은 이제 순진한 게 아니라 무식한 거다.
이번에 공개된 협상문안에도 미국의 편파성과 이중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지재권 분야의 협정 원칙을 경제사회 발전과 기술 혁신, 기술 이전을 촉진하고, 권리 보호와 이용자 및 공동체의 이용 간의 균형을 달성하며, 공공영역을 확보하는 것으로 하자는 제안(QQ.A.2)에 미국은 전면 반대하고 있다. 지재권 강화를 통해 시장에서 독점 이윤을 추구하려는 사적 이해만 대변하겠다고 마음먹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반대다.
의약품 독점 강화
의약품 분야에서 그 동안 우려했던 치료 방법 특허(사람이나 동물을 위한 진단 방법, 치료 방법, 수술 방법 특허)에 대해 미국은 한 발 물러섰지만 아직도 협상 카드로는 쥐고 있다(QQ.E.1의 각주 56). 그리고 “세계의 약국”이라 불리는 인도를 공격하려는 조항은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선뜻 이해가 안 갈 수도 있겠지만, 이미 알려진 의약품이라도 새로운 치료 효과를 발견(발명이 아니라 발견)하면 새로운 특허를 받을 수 있다. 가령 백혈병 치료약을 발명했는데, 나중에 이 약이 폐암에도 효과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면 폐암 치료에 대한 별도의 특허를 받을 수 있다. 인도는 2005년에 특허법을 개정하여 이미 알려진 의약품의 새로운 효능에 대해 특허를 받으려면 기존에 비해 개선된 효능이 있어야만 하도록 제한했다. 그런데 TPP 협상에서 이런 제한을 더 이상 두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게 바로 미국의 안이다. 미국은 폐암 치료와 같은 개선된 효능이 없더라도 새로운 특허가 가능하게 하자는 의도다. 이는 다분히 에버그리닝(evergreening)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겠다는 것이다(에버그리닝이란 하나의 의약품에 무수히 많은 특허를 걸어 특허보호 기간을 계속 늘리는 다국적제약사의 대표적인 특허 독점 전략으로 ‘특허 영속화’라고도 한다. 개선된 효능이 있는 경우에만 특허를 받을 수 있도록 하면 에버그리닝 전략은 펴기 어려워진다).
의약품 지재권 강화의 대표적인 2종 세트가 자료 독점권 제도와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 제도다. 자료 독점권 제도에서 “자료”란 의약품의 안전성과 유효성에 관한 자료(보통 임상시험 자료)를 말하는데, 이걸 독점하도록 하면 이미 허가된 의약품의 임상 시험 자료를 식약처가 후발 제약사의 의약품을 심사할 때 원용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후발 제약사는 임상 시험을 중복으로 해서 별도의 자료를 만들어야만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에볼라 백신의 경우 세계보건기구는 내년 2월까지 임상시험 2상까지 마친다는 계획인데, 이를 통해 안전성이 입증되더라도 다른 제약사는 안전성 자료를 활용할 수 없게 만드는게 바로 자료 독점권 제도이다. 일단 치료 백신부터 보급하고 특허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자고 합의해본들 소용이 없다. 임상시험 자료를 만든 원 제약사가 동의하지 않으면 다른 제약사의 백신 허가에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5년을 기다리거나 백신이 바이오 의약품인 경우 무려 12년을 기다려야 한다(현재 우리나라는 자료 독점권을 6년(신약인 경우) 또는 4년(새로운 효능인 경우) 인정하는데, 미국은 TPP에서 바이오 의약품에 대해 12년의 자료 독점권을 주장하고 있다). 에볼라와 별개로 바이오의약품이나 백신은 암 치료제에 가장 효과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특허와는 무관하게 별도의 자료독점권을 보장함으로써 값싼 암 치료제의 시장출시를 막을 수 있다.
의약품 접근권과 관련하여 가장 악명높은 독소조항으로 꼽히는 허가-특허 연계 제도는 식약처가 의약품의 허가할 때 이 의약품에 특허가 걸려 있으면 허가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다. 원래 의약품은 그 약을 사람이 먹었을 때 안전한지 약으로서 효과가 있는지만 보고 허가 여부를 결정했다. 그런데 여기에 특허를 연계시켜 누군가의 특허가 걸려 있으면 허가를 금지하는 것이다. 가령 에볼라 치료 백신에 누군가 특허를 걸어놓으면 다른 제약사의 백신은 일정 기간 동안 식약처에서 허가를 내줄 수 없다.
미국의 의약품 독점 2종 세트는 다른 TPP 협상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자 미국은 이를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묘책을 생각해냈다. 바로 투 트랙 전략이다. 잘 사는 나라는 이 제도를 수용하고 나머지 국가에게는 유예기간을 부여하는 것이다. 협상문의 부록에 포함된 비공식문서(Non-Paper)에 따르면 협상국을 3개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미국과 일본, 싱가포르는 협정 발효 2년 후에 이행의무가 발생하는 유형 A 국가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TPP에 가입하면 이 유형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
인터넷과 저작권, 위협받는 정보문화 향유권
저작권 보호기간은 최대 100년(저자 사후 100년)으로 늘어날 수 있다(법인 저작물인 경우 95년). 2012년 초 헤밍웨이 작품이 번역되어 국내에 쏟아진 일을 기억하시는가? 우리 저작권법은 1957년 30년, 1994년 50년, 2013년 70년으로 저작권보호기간을 늘려왔다. 1961년에 사망한 헤밍웨이의 저작권이 아슬아슬하게 연장되지 않고 2012년에 만료되었기 때문에 헤밍웨이 작품의 재출간 붐이 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나면 저작물이 공공영역으로 편입되어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보호기간 연장 속도가 너무 빨라 공공영역으로 들어오는 저작물이 점차 축소되고 있다. 결국 저작권 제도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균형이 한쪽으로 급격하게 기우는 결과가 초래된다.
카카오톡이 수사기관의 통신사실확인자료 요청에 과다하게 협조하여 검열과 감시가 문제가 된 것처럼, TPP는 네이버, 다음과 같은 포털이나 웹하드 사이트가 저작권자에게 적극 협조하도록 권장한다. 그리고 저작권자가 요청하면 이용자의 개인 정보를 저작권자가 넘겨받을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되면 법원의 판결이 없는데도 또는 저작권 침해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저작권자의 요청만 있으면 네이버나 다음이 이용자의 게시물을 삭제하고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저작권자에게 제공하게 된다.
TPP는 저작권 침해 행위에 상업적 목적이 없는 경우에도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도록 한다. 물론 협상문안에는 “저작권자에게 상당한 피해(substantial prejudicial impact)가 있는 경우”로 제한했지만, 인터넷에서는 언제나 상당한 피해가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별로 의미없는 제한이다.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거나 페이스북을 통해 음악을 공유하거나 언론기사를 퍼나르는 행위는 저작권법의 관점에서는 침해행위일 뿐이다. 상업적으로 이윤을 얻기 위한 목적도 아닌 행위까지 곧바로 형사처벌 대상으로 만들면, 저작권 제도를 합의금 장사의 수단으로 삼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어려워진다.
TPP와 같은 국제협정, 특히 통상협정을 통해 저작권의 실체규범들을 규율하면 작년부터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저작권 제도 개혁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국제규범은 국내규범에 비해 훨씬 비가역적이다. 한 번 정해진 걸 되돌리기 어렵다는 말이다. 통상협정은 여러 분야에 걸친 일괄타협의 결과물인데 어느 한 분야의 협상 결과만 변경하려면, 아예 협정에서 탈퇴하는수밖에 없다. 이건 저작권 정책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외교의 문제, 국제관계의 문제로 넘어간다.
탐사보도나 내부고발자도 형사처벌할 수 있다?
이번에 유출된 협상문에는 영업비밀이란 제목으로 기존의 어떤 지재권 조약에도 없던 이상한 내용이 들어있다( QQ.H.8). 원래 영업비밀은 사기업이 비밀로 간직하는 기술정보나 영업정보를 말한다. 코카콜라 제조법이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영업비밀은 사기업에게 경제적으로 가치가 있는 정보를 경쟁자가 무단으로 유출하는 행위를 처벌한다. 그런데 TPP 협상문은 협정 당사국의 경제적 이해, 국제 관계 또는 국방이나 안보에 해를 끼치는 영업비밀 침해 행위를 형사처벌하도록 정하고 있다. 기존의 영업비밀과는 전혀 다른 논리다. 사기업의 기술 비밀이나 경영 비밀이 유출되어 국가의 국제관계가 저해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조항은 위키리크스의 이번 협상문안 유출과 같은 사안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닌지 우러하기도 한다. 한 발 더 나가면, 공공기관의 내부 비리를 고발한 경우 또는 언론사의 탐사보도까지 처벌하려는 의도는 아닌지 의심이 든다.
이번 주말부터(25-27일) 호주 시드니에서 TPP 각료회담이 또 열린다. 미국과 일본이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는 자동차, 농업 분야의 타결이 TPP의 미래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변수가 되겠지만, 이번 협상문안만 놓고 보면 올해 안으로 협상이 종결되기는 요원해 보인다. 그만큼 지재권 분야에서 미해결 쟁점이 많다는 말이다. 이를 해결하는 틀이 통상협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원래 제도의 정책 목표에 맞게 통상협상에서 지재권을 제외해야 한다.
* 관련 자료 링크
☞<월스트리트저널> 블로그 기사 Trade Talk Documents Suggest Access to Medicines May Become Harder
☞호주 <시드니모닝헤럴드> 기사 Australians may pay more for medicines under trade d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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