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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는 어쩌다 괘씸죄로 청와대에 찍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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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는 어쩌다 괘씸죄로 청와대에 찍혔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8> 한일협정, 여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일협정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한일 회담을 굴욕적인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이를 힘으로 눌렀다. 그리고 그 뒤엔 미국이 있었다.

서중석 : 1964년 6월 3일 오후 4시를 지나서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 대사, 해밀턴 하우스 유엔군 사령관이 헬리콥터를 타고 청와대로 이동했다. 미국이 확고히 박정희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으로 이걸 많이 해석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4시 40분부터 약 2시간 동안 청와대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계엄령 선포에 따른 병력 이동 문제를 협의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9시 50분에 하오 8시로 소급해서 서울시 전역에 비상 계엄을 선포했다. (1995년 7월 13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이날 청와대에서 유엔군 사령관은 "지금의 상황은 1960년 4.19 당시와는 다르다"고 박 대통령을 위로하고 계엄군 동원에 흔쾌히 동의했다고 한다. 이에 앞서, 주한 미국 대사는 자국 국무부에 보내는 그해 4월 9일 자 보고 전문에서 "박 대통령이 (한일 회담) 협상 조기 타결을 고수하고 있는 만큼 미국은 모든 힘을 다해 그를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편집자')

6.3사태는 박정희 정권 18년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우선 비상 계엄을 과연 선포할 필요가 있었는가, 이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6월 3일 시위 규모가 컸다고는 하지만 전체 인원으로 보면 3월 25∼26일에 더 많은 시위대가 나온 것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 있다. 또 그날 시위의 끄트머리에 가선 청와대 앞까지 시위대가 돌진했다고는 하지만, 시위대가 해산한 것 아닌가. 어떤 연구자는 경찰 저지선이 너무 쉽게 뚫린 것 아니냐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군경 차량 탈취 등 과격한 행동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많이 있었던 건 아니다. 얼마 없었다. 그걸 가지고 비상 계엄이라는 극약 처방까지 할 수 있는 건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사실 비상 계엄을 선포할 여건을 갖췄느냐, 이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뭐냐 하면, 박 대통령은 그전부터 계엄을 선포해서 사태를 바꾸려 했다. 한일 회담 반대 운동에 대한 처리를 계엄으로, 군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하려 했다. 또 미국이 박 대통령의 조치를 지지하는 면을 보여줬다.

일부에서 '6.3사태로 박 대통령이 위기에 몰렸다'고 써놓은 것도 볼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지지를 받으면서 6.3사태로 박 대통령의 권력은 더 강화됐다. 역사를 보면 반대 세력이 아주 강성해 보일 때 오히려 권력이 강화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1964∼1965년에 강한 반대에 직면하면서 오히려 권력을 강화했다. 조금 성급하게 얘기하면 1964∼1965년의 권력 강화를 발판으로 3선 개헌을 하고 유신 체제로 들어간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6.3 계엄령은 3선 개헌과 유신으로 가는 하나의 디딤돌이 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프레시안 : 6.3운동이 짓밟힌 것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은 많이 약화된다.

서중석 : 박 정권에 대한 가장 강한 반대 세력은 학생들이었다. 박 정권은 1964년 3.24 시위 같은 것에 처음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지만 그 후 대응 전술, 탄압 기술을 계속 발전시킨다. 처음에 선보인 괴소포 전술 같은 건 미숙한 짓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박 정권의 시위 대응 전술은 크게 발전하지만, 학생들은 대규모 탄압 속에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학생 시위는 학생 대중한테 상당한 호응을 받아야 한다는 문제도 있는데, 그런 문제까지 포함해서 그 이후에는 박 정권에 대한 비판 세력의 역할을 1964∼1965년만큼 세게 하지를 못한다. 1971년 이전까지 학생 운동은 소강상태라고 할까, 약세를 보인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론계가 야당과 함께 독재 정권에 대한 강한 반대 활동을 해왔다. 그런데 6.3 이후 언론윤리위원회법에 대해서는 언론계가 강력하게 대항했지만 그 후 현저히 약화된다. 어떤 언론사는 일본 차관 도입과 관련해 약화된다고 하고, 어떤 언론사는 권력에 의해 농단되고, 어떤 언론사 사주는 고위직에 등용되고, 어떤 언론사는 크게 탄압을 받는다. 그와 동시에 언론에 대한 테러와 탄압이 계속 있게 된다. 사실 기자들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된다고 하는 그 자체가 굉장한 공포감을 주는 것인데, 그런 일도 자주 벌어진다.

(언론윤리위원회법은 6.3운동 후 민주공화당이 제출한 법안이다. 핵심은 언론윤리위원회를 만들어 모든 언론사를 가입하게 하고, 여기서 언론사들을 감독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개입할 길을 열어둔 이 위원회에서 제명당한 언론사는 문을 닫을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 기자를 대표하는 단체인 한국기자협회는 이 법에 대항하는 운동 과정에서 탄생했다. '편집자')

▲ 굴욕적 한일 회담을 비판하는 여론을 누르고자 박정희 정권은 1964년뿐만 아니라 1965년에도 군대를 동원했다. 사진은 1965년 8월 26일, 무장 군인들이 남학생을 끌고 가자 여학생이 이를 붙드는 모습. ⓒ연합뉴스


군대 동원한 박정희, 힘 실어준 미국…장기 독재 디딤돌이 된 6.3 계엄령

프레시안 : 정치권에 대한 박 대통령의 영향력도 더 커진다.

서중석 : 야당은 6.3사태 이후 아주 심한 분열 양상을 계속 보였다. 사실 한일 회담 반대 투쟁에서도 일치된 투쟁 대오를 만들지 못했다. 아울러 박정희 대통령은 권력 내부에서도 김종필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친정 체제를 좀 더 강화해나간다. (민주공화당 의장에서) 사임한 김종필이 1965년 연말이 되면 다시 민주공화당 의장이 되기는 하지만, 이때는 이미 나중에 4인방이라고 불리는 김성곤, 길재호, 백남억, 김진만 이런 사람들이 당권의 상당 부분을 장악한다. (김-오히라 메모로 숱한 비판을 받은 김종필은 6.3사태 직후 민주공화당 의장에서 물러나 해외로 떠난다. 1963년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떠난 후 1년여 만에 이뤄진 두 번째 외유다. 1965년 12월 27일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의장으로 복귀한다. '편집자')

이 시기에 경제가 호전되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초기에 군사 정부의 미숙성으로 말미암아 경제 실책이 잇따르고 시행착오가 거듭되면서 경제난이 계속됐지만, 1964∼1965년에 들어서면서 수출입국의 큰 틀이 잡히고 차관 같은 것들이 들어오면서 경제가 좋아진다. 그러면서 여당에서 쓸 수 있는 정치 자금이 아주 풍부하게 된다. 여기저기서 생긴다.

박 대통령의 권력 강화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건 한일 국교 정상화뿐만 아니라 베트남 문제도 관련돼 있다.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 참전 때문이다. 그래서 1960년대 후반에 박 대통령과 미국은 최고의 밀월 기간을 갖게 된다. 한국사 전체에서 이때가 집권 세력과 미국이 가장 밀월 관계를 맺는 시기가 아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하여튼 박 대통령은 비상 계엄을 선포하면서 학생과 언론을 약화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인다. 1964년 5월 21일 무장 군인이 법원에 난입한 얘기를 지난번에 했는데, 6월 6일 새벽에는 제1공수특전단 장교들이 동아일보사에 난입했다. (권총을 차고 동아일보사에 난입한 이들은 숙직 기자를 깨운 후 "편집 책임자를 만나야겠다", "이왕 온 김에 본때를 보이자"는 등의 태도를 취하며 위협했다. 난동을 부린 이유는 무장 군인의 법원 난입에 대한 <동아일보> 기사가 맘에 안 든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 언론에 대한 횡포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앵무새 사건도 비판 언론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동아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이던 '앵무새'는 한일 회담 반대 투쟁을 자세히 보도했다가 철퇴를 맞았다. 박정희 정권은 6월 15일, '앵무새' 프로그램 관계자 6명(<동아방송> 5명, <동아일보> 1명)을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찬양·고무하고, 내란을 선전·선동했으며, 허위 사실을 유포해 정부를 비방했다는 등의 무시무시한 죄목이었다. '편집자')

사실 한국신문발행인협회(오늘날 한국신문협회) 등은 이미 6월 10일에 박 정권의 시국 수습책에 협조했다. 7월 22일에는 언론규제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자율적으로 언론을 규제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런 가운데 7월 30일 민주공화당이 단독으로 언론윤리위원회법과 학원보호법을 국회에 제출한다. 8월 2일 학원보호법은 보류됐지만 언론윤리위원회법은 국회를 통과했다.

프레시안 : 그렇잖아도 힘을 모으지 못하던 야권은 언론윤리위원회법 문제로 사분오열한다.

서중석 : 이 법이 통과됐을 때 제1야당인 민정당 내부에서 엄청난 파란이 일어났다. '어떻게 민정당이 이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 있느냐. 유진산이 권력과 유착한 사쿠라이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고 윤보선 측에서 아주 강하게 유진산을 공격하면서 사쿠라 논쟁이 벌어졌다. 윤보선 측과 유진산 측은 사활을 건 쟁투, 당권 싸움을 벌였다.

유진산은 1950년대 후반 민주당 구파의 실력자였다. 이름만 놓고 보면 조병옥, 김도연, 윤보선 등이 지도자라고 하지만 실권은 유진산이 많이 갖고 있었다고들 이야기한다. 그건 민주당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도연이 신민당 당수였지만 실권은 유진산한테 있다고 그랬다. 유진산은 재미난 사람인데, 그때도 장면 정부와 타협하려 했다. 장면 정부에서 유진산한테 특별한 자리를 주려고 했다. 그런데 유진산은 1963년 선거 전 야당 대통령 후보를 정하는 과정에서 국민의당 파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윤보선을 적극 지지했다. 어쨌건 유진산에 대해서는 '이상한 사람이다', '정권 쪽과 뭐가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계속 있었다.

그런데 언론윤리위원회법이 통과되면서 엄청난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유진산 세력과 윤보선 세력은 어슷비슷했는데 결국은 8월 하순에 유진산을 제명했다. 그렇지만 당내 당이 생기는 꼴로 가고 말았다. 이 싸움은 그해 내내 계속되면서 민정당이 실질적인 당 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 언론윤리위원회법에 반대하는 언론사를 겨냥한 정부의 보복 조치에 대해 보도한 <동아일보> 1964년 9월 1일 자 1면. ⓒ<동아일보> 화면 갈무리


비판 언론 콕 찍어서 보복한 박정희 정권

프레시안 : 언론윤리위원회법은 많은 언론인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법을 비판한 몇몇 언론사를 정부가 탄압하면서 반발은 더 커졌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다.

서중석 : 언론윤리위원회법이 통과되자 언론인들은 굉장히 강하게 투쟁에 나섰다. 그러니까 정부 쪽에서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구독을 (관공서와) 모든 공무원 가정에서 중지하게 하고, 이들 신문사에 대한 은행 대출을 중단시키고, 언론에 제공하던 여러 가지 편의라든가 보조하던 것들을 다 중단한다는 보복 조치를 내놨다. 그래서 또 이것을 규탄하는 투쟁이 언론계에 아주 크게 번졌다. 그야말로 여기서도 사투라고 할까,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경향>, <조선>, <동아>에 더해 대구의 <매일신문>도 언론윤리위원회법에 반대했다가 정부의 표적이 됐다. 1963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민정 불참 약속을 뒤집고 군정을 연장할 뜻을 밝힌 3.16 성명이 나오자, 이를 비판하는 의미에서 한동안 사설을 싣지 않은 곳도 바로 이 네 언론사다. 한편 야권에서는 이러한 정부 조치에 맞서 언론윤리위원회법 찬성 언론 불매 동맹을 결의하는 한편, <한국일보> 사주이던 장기영 부총리를 공격하기도 했다. '편집자')

이렇게 사태가 커지고 언론계에서 거세게 반발하니까, 9월 9일 박 대통령은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을 전면 보류한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사실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전면 보류와 상관없이,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이 투쟁이 언론계가 1960년대에 마지막으로 강렬하게 한 투쟁이었다. 1969년 3선 개헌 때쯤 되면 언론계는 힘이 매우 약화됐다고들 이야기한다.

프레시안 : 정권 차원에서 학생 운동의 숨통을 죄려는 움직임도 거듭 나타난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에 대해서도 아주 강한 조치를 내린다. 6월 17일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의 중심인물인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을 정부 전복 기도 혐의로 내란죄를 적용해 군사 재판에 회부한다. 7월에는 김정강, 김정남과 관련해 불꽃회의 적색 활동이 크게 발표된다. 사실 김정강과 김정남은 당시 (한일 회담 반대 학생 운동의) 주동자가 아니었지만 문리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정부가 이들을 이처럼 연계하려고 한 것이다. (정부는 김정강과 김정남이 주도해 결성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인 불꽃회가 학생 시위 배후에 있다고 발표했다. '편집자')

그와 함께 학칙 개정, 학원보호법 제정 시도를 통해 학생들을 옥죄려고 했다. 6월 19일 정부는 학칙 개정을 지시했다. 학원 내에서 정치 활동을 할 목적으로 조직이나 선동을 한 자, 학장의 허가를 받지 않고 집단 행위로 수업을 방해한 자에 대해서는 교수 회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총장이 퇴학시킬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건 바로 정부가 '문제 학생'을 직접 처벌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후 이런 새로운 학칙에 의해 처벌이 많이 이뤄진다. 그러나 학원보호법에 대해서는 반대 여론이 워낙 컸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이 이건 통과시키는 걸 포기했다. (학원보호법에 따르면 학생 시위는 물론 정치 문제에 대해 학내에서 토론하는 것도 위법이었다. 한마디로 대학에서 사상의 자유를 없애겠다는 발상이었다. '편집자')

공안 검사들마저 양심상 기소 못하겠다던 1차 인혁당 사건

프레시안 : 굴욕적 한일 회담 반대 운동 당시 학생 운동을 대표하던 인물 중 하나인 김중태는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캠프에 합류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박근혜 후보는 근검절약, 청렴결백의 대명사인 박정희 DNA를 유전 받은 사람"이라는 등의 찬조 연설을 하며 박근혜 후보 지지를 호소하던 김중태의 모습에 적잖은 사람이 쓴웃음을 지었다.

서중석 : 6.3운동 때 김중태는 영웅이었다. 인기가 정말 대단했다. 재판 받을 때도 그랬다. 그 후에 다른 모습을 보이다가 2012년까지 온 것인데, 어쨌건 그때는 그랬다.

학생 시위 배후와 관련해 제일 큰 사건으로 발표된 것이 인혁당 사건이다. 8월 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북괴 노동당의 지령으로 남한에 인민혁명당을 조직해서 비밀 지하 조직으로 국가 변란을 기도한 음모 사건"이라는 걸 발표했다. 그러면서 41명을 검거하고 일부는 미검거 상태라면서 검거 명단을 발표했다(제1차 인혁당 사건). 그 명단에는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 학생 운동을 했던 사람들, 6.3운동을 벌인 사람들이 여러 명 들어 있었다. 불꽃회 사건으로 발표된 김정강, 김정남도 들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다 묶어서 '학생 운동이 붉은 사주를 받아서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려 한 것이다.

나중엔 어쩔 수 없이 분리를 안 할 수가 없게 된다.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사건은 민비연 사건으로 따로 재판을 받게 된다. 김중태 등의 이 내란 사건에서 검사는 최고 15년까지 중형을 구형하지만 내란죄 부분이 결국 삭제되고 소요 및 집시법 위반 부분만 적용돼 1964년 10월 28일 징역 8월, 집행 유예 2년이라는 가벼운 형을 받고 석방된다.

(소요 및 집시법 위반 혐의로 검찰은 김중태와 현승일에게 각각 징역 5년, 김도현에게 징역 4년을 구형했다. 서울중앙지법은 1964년 10월 28일 세 사람에게 징역 8월, 집행 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 아울러 내란 음모 및 선동 등의 혐의로 검찰은 김중태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지만, 서울형사지법은 1966년 3월 2일 김중태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내란 음모 및 선동 혐의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고등법원은 1967년 2월 16일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에게 징역 8월, 집행 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제1차 인혁당 사건은 10년 후 제2차 인혁당 사건 조작으로 이어진다.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집권기의 어두움을 대표하는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제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해 두 개의 대법원 판결이 존재한다고 주장해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서중석 : 지금까지도 많이 얘기되는 인혁당 사건은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많이 알려진 것이니 핵심만 몇 가지 얘기하자. 중앙정보부에서 서울지검 공안부로 송치했는데, 서울지검 공안부에는 이용훈 부장검사, 최대현, 김병리, 장원찬 검사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계속 수사를 했지만, 구속 만기일인 9월 5일 결국은 기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검사로서 서명을 거부했다. 그러자 검사장은 다른 검사로 하여금 기소케 했다. (공안부 검사들은 기소장에 서명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관련자들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그런 불온 단체를 조직했다는 혐의는 하나도 (근거가) 없다. (…)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었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이들은 9월 9일 전원 사표를 냈다. 이에 대해 서주연 서울지검장은 기소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자신은 판단했으며 "무죄냐 유죄냐 여부는 법원이 가려줄 문제"라고 해명했다. 기소장에 서명한 검사는 이 사건의 피의자들을 신문한 일조차 없었다. 검찰의 기소장 내용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발표와 거의 비슷했다. '편집자')

1965년 1월 20일 1심 재판에서 도예종에게 3년, 양춘우에게 2년의 유기 징역이 선고되고 나머지 11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또 한 번 사회에 충격을 줬다. 그런데 같은 해 5월 29일에 열린 2심에서는 원심을 파기하고 도예종 징역 3년, 양춘우와 박현채 등 6명에게는 징역 1년, 김금수 등 6명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3년, 이런 식으로 선고했다. 피고 열세 명 전원에게 반공법을 적용해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1965년 9월 21일 대법원은 7명에게 실형을, 6명에게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한 2심을 인정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판결이 뒤집혔다.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 지 48년 만인 2013년 11월 28일 서울고등법원은 도예종 등 9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여러 가지 자료로 볼 때 "인혁당이 강령을 가진 구체적 조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기소된 13명 중 4명은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누명을 벗지 못했다. '편집자')

두고두고 문제가 된 것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그 유명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이라는 것이 발표되고 8명이 그다음 해에 법살(法殺)을 당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 직후 사형을 당하는, 법에 의한 학살 사건이 일어나면서 인혁당 사건이 계속해서 사회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예순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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