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일협정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장면 정부 때 진행되던 한일 회담은 5.16쿠데타로 중단됐다. 박정희 세력은 5.16쿠데타 엿새 후인 1961년 5월 22일 회담을 조속히 재개하자고 일본에 제안한다. 그리고 그해 가을 한일 회담이 다시 열린다.
서중석 : 박정희 군사 정부에서 한일 회담이 재개되는 것, 그러니까 제6차 회담이 개시되는 때는 1961년 10월이다. 그해 10월 박정희 의장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극비리에 도쿄로 보낸다. 아무도 몰랐다. 이케다 하야토 수상한테 한국의 특사를 보내, 박정희 의장이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 정식으로 일본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래서 11월 3일 이케다 하야토 수상이 한일 회담 일본 측 수석대표인 스기 미치스케를 박 의장에게 보낸다. 스기 미치스케는 수상의 친서를 가지고 왔는데, 친서 내용은 박 의장의 방일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래서 11월 11일 박 의장이 일본에 내리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때 박 의장이 보인 태도에 대해 생각해볼 것들이 있다.
이상우가 쓴 여러 책을 보면, 박 의장이 미국 방문길에 일본에 들렀는데 그때 외무성에 특별히 요청해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교장과 동기생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고 나와 있다. 또 1961년 11월 13일 자 <경향신문>을 보면, 12일 저녁 영빈관에서 박 의장이 초대한 만찬회가 2시간가량 열렸는데 이 자리에 일본 측에서는 이케다 하야토 수상과 여러 장관들뿐만 아니라 박 의장이 만주군관학교에 다닐 때 교장이던 인물도 참석한 것으로 돼 있다. 이에 대해 이 신문은 만주군관학교 교장이던 노인이 도쿄도 아닌 "시골에서 참석하여 이채를 띠었다"고 보도했다. 박 의장이 일본에 30시간 머무는 동안 만주군관학교 교장을 만난 건 이렇게 분명하게 확인된다. 다른 자료를 보면, 박 의장이 이 사람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고 돼 있다.
나는 박 의장이 만주군관학교 교장 같은 사람을 일본 정부에 요청해 만나고 깍듯이 인사를 한 것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군국주의 파시즘이 골수까지 박힌 사람 아니었겠나. 관동군 사령관보다도 이념적으로는 더 골수이기 때문에 만주의 사관학교 교장을 시킨 것 아니겠는가. 아무리 1945년 이전 군인 시절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만나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된 후 처음으로 일본에 가서 만주군관학교 시절 사람을 만났다? 이게 한일 회담을 재개하던 시기의 정상적인 만남이냐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어떤 책에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다음에 중국 팔로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던 열하(러허) 지방에서 중위로 근무하면서 이제 자신이 활약할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굉장히 당황하게 됐다고 돼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정체성 문제에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다는 말이다.
박정희한테는 일본 패전 이전의 군인 시절에 대한 상당한 향수랄까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첫 일본 방문에서)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 등을 만나는 일이 일어난 게 아니냐고 주장하는 것도 있다. 그렇지만 일제의 패전 후 '군국주의 파시즘은 어떻게든 씻어내야 한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정말 그건 나쁜 사고다',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나. 도쿄 재판을 비롯한 일본 전범 처리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역사에서도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은 단죄 대상이 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짓밟고 대륙 침략한 일본 극우를 즐겁게 한 박정희
프레시안 : 박정희 의장이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일본의 실력자들을 만났을 때 보인 모습도 논란거리다. 지나친 저자세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와 달리 박 의장이 이때 보인 모습이 지지부진하던 한일 회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시각도 있다.
서중석 : 일본 도착 다음 날인 1961년 11월 12일, 박 의장은 기시 노부스케, 이시이 미쓰지로,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같은 사람들과 만났다고 한다. (사토 에이사쿠는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으로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일본 수상이다. 1961년 이때는 통산성 장관을 맡고 있었다. <편집자>)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이 유창한 일본어로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생각으로 해볼 생각이다"라고 이야기해서 그 자리에 있던 그 사람들이 놀라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또 박 의장은 자신이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걸 내세우면서 "강한 군대를 만드는 데에는 일본식 교육이 가장 좋다"며 자꾸 일본 정신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쁘면서도 민망한 생각도 좀 들었다고 이 사람들이 쓴 것으로 돼 있다.
나는 이 글을 몇 군데서 읽었는데, 약간씩 다른 표현을 쓴 것도 있지만 거의 비슷비슷하다. 참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아주 놀라웠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건 좀 지나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그리고 이게 한일 회담에 정말 유리한 행위인가. 일본, 다시 말하면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일본의 만주 인맥이 박정희 의장의 태도에 감복해가지고 생각을 바꿔서 한일 회담에서 한국 정부에 유리하게 해줄 사람들인가. 그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박 의장이 일본 전국시대(센코쿠시대)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그에 관한 책이나 영화도 많이 봤다는 기록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이었나. 매사에 임하는 데 있어 필요하면 자기 가족까지도 죽여가면서 최대한 자기한테 유리하게 모든 걸 이끌어간 사람들 아니었나. 만주 인맥도 산전수전 다 경험하며 대일본제국을 꾸려왔던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한국을 가까이하려 할 때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볼 때는 박 의장이 생각을 좀 짧게 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저널리스트는 박 의장이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생각으로 해볼 생각이다"라고 한 건 사실은 1930년대 소화유신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박 의장이 5.16쿠데타 결행 전 군부 내 동료들과 밤에 술을 많이 마셨는데 그때 "(1936년) 2.26 사건 때 (일본의) 우국 군인들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궐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엎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했다고 써놨다.
일제 군국주의에 물든 젊은 군인들이 갖고 있던 사고를 박 의장이 충분히 떨쳐버리지 못한 면모를 이런 만남에서 읽을 수 있고, 그것이 한일 회담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더군다나 한국 국민들한테 그런 것이 소문으로 알려지거나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만주국을 좌지우지하던 기시 노부스케 같은 사람들이 만주군의 조선인 하급 군인을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하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프레시안 : 비판을 자초한 박 의장의 문제 발언은 이것만이 아니다.
서중석 : 나는 1965년 한일 회담 조인을 한 당사자인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이 쓴 <대통령을 그리며>에 이런 말이 나오는 걸 보고 또 놀랐다. 1961년 11월 기시 노부스케 등을 만난 자리에서 박 의장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쓰여 있다. "선배님들,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리를 키워주시오." 박 의장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며 책에 인용한 것이다. 이건 박 의장이 훌륭하다고, 이렇게 얘기한 것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인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 자리에 있던 일본 측 인사들 사이에선 "이제야 얘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편집자>)
이런 걸 접하면서 난 어떤 절벽 같은 걸 느꼈다. 박정희 의장이나 김종필, 이동원 이런 사람들이 그 당시에 가졌던 사고하고 일반 한국인들, 지식인들이 가졌던 사고 사이에는 도무지 합치할 수도 없고 소통할 수도 없는 굉장히 큰 벽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식으로 나온 걸 오히려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고가 한쪽에 있었는데, 다른 한쪽에는 '이거야말로 굴욕적 저자세 아니냐. 일본 측에 이용당하는 것 아니냐', 이런 식의 강한 사고가 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1964년과 1965년에 그런 큰 반대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노 반보쿠 발언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
부자지간 발언 파문과 '일본은 형, 한국은 동생'?
프레시안 : 오노 반보쿠의 부자지간 발언도 큰 파문을 몰고 왔다.
서중석 :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데,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가 여기에 왔다. 그때 이 사람이 일본에서 출발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과는 서로 부자지간을 자인할 정도로 친한 사이",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일은 무엇보다도 즐겁다", 이렇게 얘기했다. 이건 한국인들이 두고두고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느냐' 하고 분노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을 분노에 떨게 할 만한 발언이다. 도대체 한국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이 말이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오노 발언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이 언급한 게 없는 걸로 알고 있다. 항의라든가, '있을 수 없는 발언이다. 잘못된 발언이다', 이런 이야기가 안 나오지 않나.
이 발언이 크게 문제가 되고 한국 기자가 이에 대해 물어보니까 오노 반보쿠는 '부자지간이 적당하지 않다면 부부 관계라고 고치자',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그해 12월 19일에 열린 기자 회견에서 오노 반보쿠는 "가장 애정이 깊은 관계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며 "내외지간(부부 관계) 같은 사이라고 할 걸 그랬나?"라고 말했다. <편집자>) 이것도 참 망발을 계속하는 건데, 그건 한국 정부에서 이걸 방관한다는 걸 오노 반보쿠가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니겠나.
그러니 양쪽 관계자들, 즉 한쪽은 김종필이나 이동원 같은 사람들, 다른 한쪽은 학생이나 지식인 같은 사람들, 이 양쪽 벽 사이가 이렇게 크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에 대해 비판 세력은 '굴욕적 저자세다. 졸속 처리를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굉장히 강한 반발을 한다.
(오노 반보쿠는 이 발언 전에도 '대만, 한국을 합한 일본합중국' 같은 위험한 주장을 서슴지 않은 인물이다. 부자지간 발언 파문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오노 반보쿠가 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후 일본에 돌아가 자국 수상에게 방한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왔다. 오노 반보쿠가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그 자리에 있던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은 "나도 친한 한국 고관을 '아무개 군' 하고 불렀더니 후에 문제가 됐습니다"라며 장단을 맞췄다.
파문 당시 이상백 서울대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일본에서는 '네가 내 자식이다'라고 해도 그리 화를 안 내는 모양이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에 의하면 이보다 큰 모욕이 있을 수 없다. 일국을 대표하는 중책을 진 사람이 그렇게 경솔한 발언을 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일상적인 대한관(對韓觀)의 반향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부자지간 발언 파문은 1965년 한일협정 조인 후 다시 도마에 올랐다. 1965년 7월 5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해 6월 22일 한일협정 조인 후 사토 에이사쿠 수상이 주최한 연회에서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일본어로 한국과 일본은 형제국이라고 한 것은 물론 "일본은 형뻘이니 동생을 잘 돌봐달라"고 했다는 보도가 나와 논란이 됐다. 이에 더해 일본 관방 장관은 "이 씨가 일한 양국을 형제라고 했지만 사토 수상과 이 씨를 비교하면 부자지간 같은 나이 차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국의 야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죽은 오노 반보쿠 씨의 부자지간 운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제2의 부자지간 발언에 이동원 외무 장관마저 동생이라 칭했으니 5000년 역사가 부끄럽다"는 탄식이 나왔다. <편집자>)
뒤틀린 한일 관계…정부가 반대 운동 촉진했다
프레시안 : 일본과 교섭하는 방식도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서중석 : 교섭 방법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1965년에도 그랬지만 특히 1964년에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을 하는 쪽에서 참 많이 비판한 것이 1962년에 만들어진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것이다. (메모 작성 당시 외상이던 오히라 마사요시는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에 일본 총리가 된다. <편집자>) 그런데 김종필은 이때 중앙정보부장 아니었나. 1961년과 1962년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장을 할 때 기세가 등등했다. 김종필의 권력 남용 문제에 대해 최고회의 내부에서도 굉장히 큰 반발이 있을 정도였다. 김종필-오히라 회담 이후에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 4대 의혹 사건까지 일반 국민에게 알려지게 되는데, 어쨌건 그런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보내 (밀실에서) 타결하게 하는 것을 과연 적절한 방법으로 볼 수 있는 것인가. 한일 관계에서는 외교 관례라고 할까 외교 매너가 참 무시됐는데, 김종필-오히라 메모와 관련해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을 특사로 보낸 것이 외교 관례상 적절한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또 많은 경우 교섭 및 협상 장소가 회의실이 아니라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요정집이나 서울에 있는 일류 기생집들이었다고 그런다. 장소를 이런 데로 한 것도 적절한 것인가 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사실 1960∼1970년대 민주공화당의 정치는 요정 정치라고 한다. 지금도 성북동에는 삼청각이라고 옛날에 요정으로 쓰였던 큰 집이 남아 있는데, 그때만 해도 서울 곳곳에 요정이 있었다. 나중에는 일본 관광객까지 이리로 끌어들여서, 제주도까지 퍼질 정도로 요정이 굉장히 많이 생기고 그런다. (일부 일본인들의 '기생 관광'과 맞물리며 '관광 요정'으로 불린 업소들이 1970년대에 많이 늘어났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83년에 서울 14곳, 부산 7곳, 경주 4곳, 제주 2곳, 총 27곳의 관광 요정이 있었다고 한다. <편집자>) 1960∼1970년대에는 한일 관계자들이 이런 요정에서 많이 만났다. 따라서 반대 세력은 이런 교섭 방법의 문제점을 군사 정권의 '굴욕 외교', 저자세와 연결해 생각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이렇게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군사 정부의 이러한 문제점들은 평화선을 비롯한 구체적인 쟁점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서중석 : 군사 정권의 미숙성, 굴욕·저자세, 졸속 처리하려는 태도 같은 것들은 평화선이라든가 청구권 문제에서 바로 나타났다. 평화선 문제를 보면, 1964∼1965년 한일 회담 반대 때 제일 강하게 들고나오는 게 '박정희 정권이 평화선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 하는 비판이었다. 사실 당시 학생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또 야당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평화선은 기본적으로 어종 보호선, 어업 보호선이다', 이런 성격을 잘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평화선 문제를 가지고 '박정희 정권이 주권을 판다. 매국이다', 이렇게 강하게 비판했다. 이게 제일 호소력이 강하니까 그렇게 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업적이 평화선 설치다. 나도 이승만 대통령의 중요 업적으로 평화선을 보고 있다. 이 평화선 문제가 독도 문제와 마찬가지로 얼마나 민족 감정과 연결되기 쉬운가 하는 점을 박정희 정부가 아주 신중하게 고려하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한일 회담에 임할 때나 일본과 관계를 맺을 때 그런 신중함을 꼭 가졌어야 했는데, 박정희 정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컨대 평화선 포기 이야기가 정권 초기부터 나온다고 돼 있다. 5.16쿠데타가 나고 불과 얼마 안 됐을 때인 1961년 7월 초 동남아 지역 친선 사절단장으로 최덕신 중장이 출국했다. 그런데 7월 22일, 이 사람은 대일 관계 개선을 위해 한국 정부가 "평화선 철폐를 고려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 사람은 10월에 외무부 장관이 된다. 한마디로 자신이 외무부 장관 쪽으로 간다는 걸 생각할 수 있던 사람인데, 이런 발언을 한 것도 참 문제다.
나중에 평화선 문제가 크게 불거졌을 때 학생들, 교수들, <사상계> 등에서 '왜 평화선을 포기하느냐'고 하면서 국제관례를 많이 언급한다. 중국, 남미 국가, 아랍 국가 등을 보면 어족 및 어로 보존 구역을 광범위하게 설정하고 있지 않느냐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 공박한다. 이런 것에 대해 정부에서 '그건 잘못된 것'이라든가 '맞는 말이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든가 하는 반박이나 대답을 해주면 그것도 좋았을 터인데, 그걸 거의 못했다. 이렇게 된 건 아예 처음부터 '평화선 문제는 이렇게 하겠다'는 것을 정해뒀기 때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부 쪽에서 국제관례를 제대로 연구한 것 같지도 않은 모습을 보이고, 비판 세력의 주장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도 그런 것 때문 아니겠는가. 1964년에, 그리고 특히 1965년의 경우 제일 반대가 많은 게 이 평화선 문제인데, 정부의 태도가 오히려 더 많은 의혹을 일으켰고 반대를 촉진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예순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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