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제33강으로, 11월1(토)∼2(일)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태어난 섬, 전남 신안군 하의도로 갑니다. 하의도 들녘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대중이는 하의도에 해준 것이 암 것도 없다”고 섭섭함을 토로했습니다. 하의도의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을 표합니다. 그러나 하의도 주민들의 섭섭함은 역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얼마나 공명정대한 대통령이었는가를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합니다. 고향이라고 혜택을 주지도 않고 고향이 아니라고 차별하지도 않은 공평무사한 지도자.
하의도는 또 이 나라 농민운동사의 기념비적인 땅이기도 합니다. 권력자에게 빼앗긴 농토를 찾기 위해 주민들이 일심 단결하여 330년이나 싸웠고 마침내 땅을 되찾은 불굴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섬입니다. 그 하의도 농민들의 불굴의 정신이 김대중이란 인물을 키운 자양분이었을 것입니다. 늘 약자의 편이 돼주는 정의로운 지도자, 그런 지도자가 그리운 시절 우리는 하의도로 갑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의 섬 하의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공주의 섬”
인목대비 사후에 궁중에서 비단에 쓰인 백서(帛書) 세 폭이 발견됐는데 임금(인조)을 폐하고 다시 세우자는 내용이었다. 정명공주는 이 백서의 배후로 의심받고 곤경에 처해졌으나 인조반정의 공신인 장유, 최명길 등의 구명으로 위기를 넘겼다. 인조 사후 효종, 현종, 숙종 3대 동안은 왕실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대접을 받고 살았다. 정명공주는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과 결혼했는데 숙종 때의 이조참판 홍석보(洪錫輔)는 그녀의 증손이며, 수찬 이인검(李仁儉)은 외증손이다.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 홍인한, 원빈 홍씨 등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었다. <경국대전>은 공주의 집이 50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정명공주의 집은 200간이 넘었고 경상도에만 8,076결의 넓은 땅을 하사받는 등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한다. 그런 정명공주에게 하의 3도 농민들의 농토까지 하사됐다.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 말까지 한국의 섬들에는 사람들이 살았지만 고려 말 왜구들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국가에서는 공도(空島)정책을 실시했고 섬은 무인지경이 됐다. 국법으로 금하니 섬에서 사는 것 자체가 죄가 되었다. 섬과 바다를 포기했던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을 전후해 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다시 주민 거주를 허락했다. 그래서 대부분 섬들의 사람살이 역사는 삼사백년에 불과하다. 공도정책 이전 수천 년 이어온 섬살이의 역사는 흔적도 없어지고 말았다. 황폐화된 섬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 황무지를 개척하고 갯벌을 간척해 농사지을 땅을 만들었다. 국법에도 미개간지는 개간한 사람의 소유권을 인정해줬다.
하의 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역시 임진왜란 직후 내륙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갯벌을 간척해 농토를 만들었다. 그러나 국왕은 주민들이 개간한 땅을 강탈해버렸다. 1623년, 인조는 하의 3도의 개간된 땅 24결을 정명공주에게 하사했다. 그래도 인조는 정명공주의 4대 손까지만 세미(稅米)를 받도록 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정명공주의 4대 손이 사망한 이후에도 홍씨 가문은 하의도 주민들에게 농토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홍씨 가문은 하의 3도 주민들이 나중에 새로 개간한 땅마저 빼앗아 갔다. 공주의 5대손 홍상한은 섬 주민들이 새로 개간한 땅 140결에 대해서까지 권리를 주장해 결세를 거두어 갔다.
결국 주민들은 국가와 홍씨 집안 양쪽에 이중으로 세금을 바쳐야 했다. 일토양세(一土兩稅)였다. 수탈이 극에 달하니 저항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새로 개간한 땅마저 빼앗긴 주민들은 다시 땅을 되찾기 위해 대를 이어 가며 싸웠다. 하지만 권세를 지닌 홍씨 가문에 번번이 패했다. 구한말 하의 3도의 땅은 홍씨 가문에서 내장원으로, 내장원에서 다시 홍씨 집안으로, 또 일본인 우근권좌위문(右近勸左衛門)에게, 다시 덕전미칠(德田彌七)에게로 넘어갔다. 하의 3도 주민들은 도세 납부 거부와 각종 소송, 농민조합운동 등을 통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투쟁했다. 그러나 해방 후 국회의 유상반환 결정을 얻어내 1956년에야 비로소 농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물경 3백30여년에 걸친 투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신안군 하의도는 유인도 9개, 무인도 47개로 구성된 하의면의 본 섬이다. 면적 14.46㎢, 해안선 길이 32㎞의 섬이다. 백과사전이나 하의도 안내 책자 등에는 하의도가 연화부수형의 지형인데 연꽃으로 만든 옷 모양이라 하의도라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하의도(荷衣島)의 옛 이름은 고이도 혹은 고의도였다. 일본 헤이안시대의 승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고이도(高移島)로, <삼국사기> 효공왕(?∼912) 3년조에는 고이도(皐夷島)도로 나온다. <고려사> 권1 건화4년(914)조에는 고의도(皐衣島)로 표기되어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 세종 30년 8월27일 기사에는 하의도(河衣島)로 나온다. 그러므로 소개된 지명 유래는 별 근거가 없다. 고이도에서 고의도, 고의도에서 또 하의도로 표기가 변해온 것이다.
큰 바위 얼굴
“옛날 옛적 어은리 피섬 마을 뒷산에 고승 한 분이 암자를 짓고 큰 수사자를 키우며 수도생활을 했다. 그런데 피섬 마을에는 큰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사람과 가축들을 해쳤다. 피섬 마을 사람들은 고승께 도움을 청했다. 고승은 수사자와 함께 호랑이 사냥에 나서 호랑이를 사로잡았다. 고승은 호랑이를 마을 앞산의 석굴에 가두어버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고승과 사자는 호랑이 사냥 중에 큰 부상을 입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늘의 계시를 받고 죽도에 고승과 사자의 시신을 묻었다. 이후 죽도는 점차 갈기 무성한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으로 변했고, 주민들은 이를 사자바위라 부르게 됐다. 또 호랑이를 가두었던 바위는 범바위라 불렀다.”
그 사자의 얼굴이 어느 때부턴가 점차 사람의 얼굴로 변해갔다.
대통령의 고향 후광리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의 고향 하의도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은 2009년 4월이었다. 그해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고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상실감을 토로했던 김대중 대통령도 8월 18일 뒤를 따랐다. 마지막 고향 방문길에 김대중 대통령은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고, 6년 반의 감옥살이를 했으며, 20여 년간 연금과 감시 속에서 살았고, 3년 반의 망명생활도 했지만 하의 3도 농민의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투쟁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는 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고,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이다. 다시 민주주의에 위기가 왔다. 방관하지 말고 민주주의를 지켜나가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이승을 하직하였고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말은 유언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 하의도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중은 서자였다. 어머니 장수금은 둘째 부인이었다. 아버지 김운식은 첫째 부인과 1남 3녀를, 둘째 부인과는 3남 1녀를 두었다. 김대중은 어머니가 낳은 첫째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차남이었다. 아버지 집은 본 마을에 있었고, 어머니 집은 간척지인 후광리에 있었다. 어머니는 본가에 들어가지 않고 후광리에서 따로 살았다. 후광리는 간척지였다.
어머니는 염전 일꾼들에게 밥을 해주는 함바집을 하고 막걸리도 팔면서 생계를 꾸렸다. 김대중은 유학자 초암 김련이 세운 덕봉강당이란 서당에서 공부했고 4년제 초등학교가 생기자 서당공부 학력을 인정받아 2학년으로 편입학해서 4년 과정을 마쳤다. 이후 목포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섬에서 뭍으로의 유학이란 지금 외국유학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목포로 나가 김대중의 공부를 뒷바라지했다.
하의도 후광리 김대중 대통령 생가는 오늘도 고적하다. 내가 늘 방문자가 적을 때만 찾아오는 걸까. 몇 번을 찾아왔지만 올 때마다 쓸쓸하다. 추모각에 들어서 헌향을 하고 절을 올린다. 절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살아생전 그를 만난 적도 없고 그를 특별히 존경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슬픔은 무얼까. 이 슬픔은 이 쓸쓸함은 그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그에게 빚지지 않은 한국인이 있을까. 이 나라의 대통령까지 지낸 그를 아직도 빨갱이라고 저주하는 이들마저도 그의 삶과 투쟁 덕에 그렇게 대통령까지 욕할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추모관에는 그의 사진들이 걸려있다. 1981년 청주교도소에서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아내와 두 아들을 면회하는 그의 등은 한껏 굽었다. 또다른 사진은 삭발을 당하고 감옥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1973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동경에서 납치돼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생환했다. 동경납치사건 직후 기자회견을 하는 그의 얼굴은 온통 상처투성이다. 눈빛은 아직도 생사를 헤매는 듯 허공을 맴돈다. 그곳이 저승인지 이승인지 가물거렸던 것일까.
“정치는 예술”
추모관에는 ‘김대중 대통령 서거 4주기’를 추모하는 꽃들이 몇 개 놓여있으나 중앙정부에서 보낸 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박준형 전남지사, 박우량 신안군수, 그리고 최성 고양시장이 보낸 꽃들이 보인다. 그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었던 것일까. 서글픈 일이다. 그는 그를 박해하고 탄압했던 이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려 했다. 그의 화해는 실패했고 그의 용서는 헛되었던 것일까.
1987년 5.18묘지를 방문하고 오열하는 그의 사진은 가슴을 시리게 한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사형을 선고받았다 풀려나 미국 망명길에 앞서 썼던 그의 글은 마치 상여소리처럼 처연하다.
“이제 가면 언제 올까
기약 없는 길이지만
반드시 돌아오리
새벽처럼 돌아오리
돌아와 종을 치리
자유종을 치리라”
(1982. 12. 23. 미국 망명길에 앞서)
‘정치가 예술’이라던 김대중. 그는 감옥에서 이렇게 썼다.
“진정한 정치가 할 일은 억압받는 자와 가난한 자의 권리와 생활을 보장하고 그들을 정치의 주체로 참여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억압하던 자와 빼앗던 자들도 그들의 죄로부터 해방시켜서 대열에 참여케 해야 한다. 그 점에서 정치는 예술이 된다.”(김대중 <옥중서신> 중에서)
그의 예술 활동은 성공적이었을까. 나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의 정치는 결코 성공적이었다고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군부독재 정권 하에서 인권을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데 복무한 이들의 진심어린 반성이나 사과도 받아내지 않고 그들을 용서한 것이 과연 진정한 화해였을까. 그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는 우리에게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시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시간이 지나면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대체 더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역사의 진실이 드러날까. 그래도 또 가야 하는가. 이 끝없는 길을. 그는 또 우리의 등을 떠민다. 그가 역사의 손에 등이 떠밀렸던 것처럼. 이미 역사가 된 그는 또 우리를 다독인다.
“우리는 아무리 강해도 약합니다. 두렵다고 겁이 난다고 주저앉아만 있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두렵지 않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지만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용기입니다.”
“대중이는 암 것도 안해 줬어라우”
“지심 매고 오요. 독새풀은 징해라우. 쪼금 매다 오요. 녹두밭도 매고 오요.”
할머니는 밭을 매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팔십 닛이나 되요. 아들이 하지 마라하면 오냐 안할란다 해놓고 하요. 가만 앉아 있어 머 하것소. 용돈도 벌고 좋제.”
“할머니, 김대중 대통령이 하의도에 무엇 좀 해주고 갔습니까?”
“다른 디는 대통령 나면 동네가 번들번들 한디 대중이는 암것도 안해 줬어라우. 그라니 욕 안 하것소. 대통령 나면 머하냐고 다들 그라요.”
할머니뿐만 아니라 하의도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한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라고 특혜를 주지 않았던 그의 지나친 염결성이 고향 사람들을 섭섭하게 했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하의도에서 태어나 하의도로 시집와 평생을 살았다. 영감님은 앞서 가셨다. 밭 위에다 묘를 썼다. 할머니가 유모차 같은 것에 의지해 가면서까지 굳이 밭을 매러 다니는 것은 혹 영감님 생각이 나서는 아닐까. 할머니는 평생을 농사만 짓고 살았다. 밭 아홉 마지기와 논 몇 마지기를 혼자 손으로 다 일구었으니 고생도 그런 고생이 또 있었을까. 아들 셋 딸 넷을 낳고 키웠지만 넷은 어미 먼저 이승을 떠버렸다.
“내가 죄가 많아서 그란가. 명이 고뿐 밖에 안 되서 그란가.”
셋째 딸은 딸 하나를 낳아 키우다 가버렸다.
“은이야 금이야 하다가 다 못 키 놓고 죽었다우.”
손녀를 키우고 혼자 사는 사위가 안쓰럽다.
“죽었으면 내가 죽었어야 될 거 아니우. 그라면 머가 부럽겠소. 자식들 앞세우지 않는 사람이 젤 부럽소.”
할머니는 끝내 눈물을 흘리신다. 할머니는 다시 유모차에 의지해 마을 안길로 접어든다.
“건강하세요, 할머니.”
할머니도 인사말을 건넨다.
“어차튼지 건강하게 사시오.”
느릿느릿 가다 쉬다 가다 쉬다 할머니의 걸음은 달팽이보다 느리다. 저러다 해 넘어가기 전에 집에 들어가실 수나 있으려나.
섬학교 제33강, 11월 1(토)∼2(일)일, 하의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1월 1일(토)>
07:00 서울 출발(뱃시각에 대야 하니 출발시각 엄수 바랍니다. 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33강 여는 모임
12:00 목포 도착
12:00-12:40 점심식사(목포의 맛, 장어탕과 회덥밥 중 택1)
13:40 목포 출항
16:00 하의도 도착. 큰바위얼굴까지 버스 이동(10분)
16:10-18:30 하의도 걷기(약 8km)
큰바위얼굴(죽도)-모래구미-어은1구경로당-한옥팬션입구-오류골-곰실(웅곡)
19:00-21:00 저녁식사 겸 뒤풀이(하의도 맛집에서 생선회·매운탕과 다양한 해산물요리)
21:00-자유시간 및 취침(<연꽃섬민박>, 다인실)
<11월2일(일)>
07:00 기상
08:00-09:00 아침식사(남도백반>
09:10-10:10 김대중생가 탐방(버스 이동)
00:10-11:00 하의3도농민운동기념관 탐방(버스 이동)
11:40-12:30 점심식사(하의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낙지냉연포탕)
13:00 하의도 출항
15:00 목포 도착
15:30 서울 향발. 제33강 마무리모임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모자,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제33강 답사 참가비는 26만5000원입니다(왕복교통비, 1일 숙박비, 5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 섬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island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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