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둥절하다. 최근 남북한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하는 말이다. 10월 4일 북한의 황병서 총정치국장 등 실세들의 ‘방남’ 결과 남북 양측은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2차 고위급 접촉을 갖기로 했다. 전례가 없는 고위급 인사들의 방남과 박근혜 정부의 환대가 맞물리면서 모처럼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 것이라는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사흘 만에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 남북한 해군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 북한 경비정 1척이 7일 오전 연평도 인근 NLL을 넘어 900m 가량 남하하자, 남한 군이 경고사격을 가했고, 그 직후에 양측 함정 간에 교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북한의 NLL 월선이 치밀한 계획 아래 이뤄진 것인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북한 군부 일각의 일탈 행위인지는 알 수 없다. 필자의 생각으론 북한이 최근 들어 군사 문제 등 '근본 문제' 해결을 부쩍 강조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남북한 고위급 접촉을 앞두고 NLL 문제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NLL을 사이에 두고 양측의 대응 수준이 눈에 띠게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남측 군 당국이 NLL을 월선한 북한의 경비정뿐만 아니라 어선에도 경고사격을 가하는 일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는 과거에 우발적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시위기동과 차단기동을 경고사격에 앞서 했던 것과도 큰 차이가 있다. 북한 역시 대응사격에 나서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그만큼 무력 충돌 및 확전의 위험이 커진 셈이다.
'핵 억제력'과 '맞춤형 억제'의 충돌
이 뿐만이 아니다. NLL에서의 국지적, 전술적 충돌 우려도 걱정이지만, 한미동맹의 '맞춤형 억제'와 북한의 '핵 억제력' 사이의 대결 국면도 대화 분위기에 아랑곳없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핵 억제력을 다종화·다양화하겠다고 공언했던 북한은 노동, 스커드, 신형 단거리 미사일, 300mm 신형 방사포 등 다양한 투발 수단을 잇달아 시험발사해왔다. 핵 시설이 몰려 있는 영변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미국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가 영변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 5MWe(메가와트) 원자로가 가동 중단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연료봉을 교체해 플루토늄 추출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미동맹의 최근 소식도 이목을 끈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한미 군 당국은 유사시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 등 '전략 자산'까지 동원해 북한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 중이라고 한다. 특히 이를 10월 하순에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공식화할 계획이라고도 한다. 이는 작년 SCM에서 문서상으로 합의한 '맞춤형 억제' 전략이 작전계획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움직임이 품고 있는 문제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맞춤형 억제는 미국의 확장 억제, 즉 핵우산과 MD, 그리고 재래식 군사력과 한국의 '킬 체인' 및 한국형미사일방어체제(KAMD)의 증강을 의미하는 동시에 상호운용성을 강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걸 작전 계획화한다는 것은 관련 부대를 편성하고 한미합동군사훈련에도 적용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이렇게 되면 한미합동군사훈련 때마다 치르고 있는 홍역이 앞으론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방침이 확정되면, 미국의 핵심 무기인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THAAD)의 한국 내 배치 가능성도 커지게 된다. 사드 배치가 가시화되면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도 커질 수 있다.
역주행을 막고 큰 길을 내기 위해서는
이처럼 대화 따로, 군사 대결 따로 가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극복하지 않으면, 남북관계는 언제든 역주행에 직면할 위험이 크다. 서해에서 긴장이 고조되면 5.24 조치 해제도 그만큼 어려워진다. 북한의 플루토늄 추출이 확인되면, 금강산 관광 사업 재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박근혜 정부 내 대북강경파들은 금강산 관광 사업 재개는 유엔의 대북 제재에 저촉된다고 주장해왔는데, 북한의 플루토늄 추출은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핵 억제력‘과 한미동맹의 '맞춤형 억제' 사이의 군비경쟁이 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어 큰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우려가 타당하다면, 남북한은 자제의 미덕과 담대한 협상 태도를 동시에 보여줘야 한다. 북한은 NLL 월선이나 플루토늄 추출 움직임과 같이 남북관계 및 대외관계 개선 의지를 의심케 하는 행동을 중단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도 대북 협상에서 군사안보 등 근본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는 것과 6자회담 재개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
남북관계 및 한반도 정세에서 군사안보 문제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문제를 외면하고 대화에 나서는 것은 모래위에 성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때마침 남북대화 채널은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북한의 국방위원회로 격상·정비되고 있다. 일단 형식 자체는 포괄적인 논의가 가능한 구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내용도 형식에 걸맞게 채워나가야 한다.
이렇게 해야 어렵게 만들어진 오솔길(작은 길)이 대통로(큰 길)가 될 수 있다. 고위급 접촉과 함께 남북한 특사도 오가고 이를 바탕으로 분단 70년이 되는 내년에는 남북정상회담까지 갈 수 있는 그런 로드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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