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에 대한 현재의 지지율과 별개로 앞으로 역사적 평가가 어떻게 내려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권력기관을 스스로 놓아줬다'는 점에 대한 평가는 지금 현 단계에서도 양호하다. '수구언론'이나 '한나라당'도 별 토를 달지 않는 것 같다.
'이제는 대통령의 정치중립, 선거중립 족쇄를 풀어야 한다'며 노 대통령이 개인자격으로 헌법소원까지 제기한 것에 대해서도 '적절하냐 부적절하냐' 정도의 논란에 그치고 있는 점 역시 권력기관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우려가 어느 정도 불식됐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국정원에서 터져 나오는 잡음들은 "정권의 속성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금언을 떠올리게 한다.
제도개혁이 아닌 정권의 선의(善意)만을 신뢰할 수 있냐는 것이다.
"악용은 않는다"와 '견물생심'사이는 어딜까?
자신들에 대한 갖가지 의혹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마자 이명박 후보 측은 "정권의 음모다"라는 '전통적 대응방안'을 꺼내들었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코웃음을 쳤고 대운하보고서와 이 후보 측의 주민등록 초본 유출 경과가 밝혀지면서부터 "때가 어느 때냐, 우리는 다르다"는 청와대의 자신감 넘치는 반론도 설득력 있어 보였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이 이 후보 친인척의 부동산 거래 내역을 확인했다'는 '팩트'가 드러난 이후 상황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또한 국정원과 청와대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악용하지 않았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의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다. 게다가 이들은 그 흔한 재발방지 약속도 하지 않고 있다.
하여튼 '악용'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들여다 보는 것' 자체가 문제란 말이다. '견물생심'은 괜한 말이 아니다.
'부패와 비리 관련 첩보 수집도 국가 안보에 직결되는 사안으로 국정원 고유의 업무에 속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런 식이면 대한민국 안에서 국정원이 건드리지 못할 부분은 없다.
게다가 '국가안보'와 '정권안보'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것이 중앙정보부에서 안기부 그리고 국정원으로 이어진 역사다.
막상 써보니 맘이 바뀌었나?
국정원 논란의 씨앗은 노 대통령 스스로 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초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국정원을 해외정보처로 축소 전환하겠다"는 대선공약을 내세웠다. 국민통합 21의 당시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 협상안에도 이 항목은 한 자리를 차지했다.
게다가 집권 직후인 2003년 5월 당시 여당인 민주당이 공약 실현에 미온적이자 "국정원 개혁방안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노 대통령은 "쓰는 사람이 잘 쓰면 된다"며 국정원 조직에 손도 안 댔다. 혹시 '써보니 쏠쏠하더라'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특히 집권 후반기에 들어오면서부터 바뀌기 시작한 국정원에 대한 노 대통령의 언급이 이를 뒷받침한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고영구 전 원장에 이어 2005년 7월 검찰 출신인 김승규 전 원장을 임명하면서 노 대통령은 "지방토착 비리 정보도 좀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집권 전반부가 끝나 힘도 붙던 시점이다.
그리고 지난 해 3월에는 "(국정원) 제도개혁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국회 정보위에서 여야 의원들이 국정원 제도개혁 방안을 논의하고 있던 시점이다.
노 대통령은 이어 지난 해 8월에는 국정원의 업무 관련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국정원의) 제도적 권한을 확보하도록 할 필요가 있는데 국회에서 그와 같은 입법이 이루어질 때까지 대통령이 뒷받침 하겠다"고까지 말했다. 제도개혁은커녕 권한을 확대하겠다는 말이다.
당시 보고자로 나서 노 대통령의 격려를 받았던 사람은 공교롭게도 이상업 국정원 전 2차장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이번 국정원 논란이 어떤 수준까지 확산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현 정권 들어서 크게 줄어든 권력기관에 대한 우려가 아직까지 크게 반전된 것 같진 않다.
어쨌든 국정원 측이 자신의 치부를 스스로 드러냈다. 그리고 검찰도 건재하다. 청와대와 검찰의 수차례 신경전이나 한나라당 대선 캠프가 서로 송사를 제기하는 것을 보면 검찰에 대한 신뢰는 오히려 그 쪽이 더 큰 것 같다.
권력기관의 독립성과 중립성 고양이라는 현 정부의 치적이 아직은 뿌리부터 흔들리곤 있지 않단 말이다. 공기업 고위간부가 대운하 관련 보고서를 유출한 사실이 증명하듯 오히려 야당에 줄대기 우려가 만만치 않은 편 아닌가?
노 대통령은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면 된다. 국정원 제도개혁이 바로 답이란 말이다.
한나라당이 '잘 쓸 사람'에 포함되나?
임기 말이 무색하게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노 대통령은 바로 전날 국회의원 면책특권 제한, 대통령 사면권 제한, 정치관계법 개정 등 새로운 의제를 제기했다. 물론 '이렇게 하겠다'기보다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 수준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국정원 제도개혁은 당장이라도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
"당장 내년 국정원 국내파트 예산을 삭감하겠다"는 게 한나라당 이병석 원내수석부대표의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국내파트의 권한을 축소하거나 구조조정 하겠다'가 아니라 '손 보겠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앞서 언급했듯이 노 대통령은 국정원 구조개혁 요구에 대해 "쓰는 사람이 잘 쓰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노 대통령 자신의 평소 발언이나 한나라당의 최근 태도로 볼 때, 노 대통령 기준에서 한나라당 대선 주자들이 '국정원을 잘 쓸 사람'의 범주에 포함되기 어려울 것 같다.
결국 임기 내 국정원 제도개혁은 최근과 같은 논란을 불식시키는 것과 동시에 노 대통령 본인의 의중에도 부합할 것이란 말이다. 임기 말 명분과 실리를 다 잡을 수 있는 방안이 바로 국정원 제도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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