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빌리즘(immobilism). 프랑스 단어인 'immobilisme'에서 나온 이 영단어는 '현상 유지', 혹은 '불활성(不活性)'을 뜻한다. 쉽게 말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체' 상태를 가리킨다. 세월호 참사 정국을 수습하기 위한 국내정치적 노력도, 주변국들의 움직임이 가팔라지는 동북아 정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대외적 수단도 내놓지 못하는 박근혜 정부에 대해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바로 이 '이모빌리즘' 상태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 인근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농성을 시작한 지도 보름. '대통령 면담'이라는,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요구에도 청와대는 야속할 정도로 침묵을 지킨다. '세월호특별법은 국회가 할 일'이란 건조한 메시지로 정국 경색의 장기화를 방관하고 있다. 집권 2년차, 정국 장악력을 보여야 할 대통령에게 너무 빨리 찾아온 이모빌리즘이다.
주도권과 기회는 만들기 나름이다. 남 전 장관은 우선 정부·여당이 무성의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비판했다. 세월호특별법은 야당이나 진보 진영만의 의제가 아니며, 정부·여당이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자기 일'로 받아들이고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다. 대북, 대일 관계에서도 한국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조건은 마련돼 있지만, 박근혜 정부의 걸음은 너무 무겁다.
리더십 실종과 대안 부재란 위기에 빠진 새정치민주연합을 향해서는 '백가쟁명'을 제안했다. 몇 달이 걸려도 토론을 통해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그에 따라 지지 기반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그는 세월호 이슈에만 매달린 야당의 무능을 지적하며 "노동 계층이나 서민을 위한 뚜렷한 대안이 없으니 지지 기반 확보에 계속 실패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권 리더십 문제는 당장 성급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남 전 장관은 아울러 "장내외 투쟁 노선을 '분열'이라고 심각하게 볼 필요는 없다"며 "야당이라면 원내외 양쪽 전략을 다 구사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지난 1일 서울 서교동 프레시안 협동조합 사무실에서 박인규 이사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편집자>
"세월호특별법, 여야가 합의하면 되는 것"
프레시안 : 세월호특별법으로 경색 정국이다. 어디에 문제가 있다고 보나.
남재희 : 여야 협상 면에서만 보면, 사실 애초부터 새정치민주연합에 불리한 구조였다. <시사IN>이 미국 하버드 대학 토머스 셸링 교수의 게임이론을 적용해 설명했듯, 재량권의 함정에 빠진 박영선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로선 양보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박영선 대표는 혼자 원내대표 겸 비대위원장이니 많은 권력이 집중돼 있었고 그만큼 재량권도 많았다. 반면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재량권은 한정돼 있었다. 대통령부터 층층 시하 아닌가. 그러니 재량권이 많은 이가 양보를 하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박영선 대표가 협상에 앞서 유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게 아니라 협상 후 유족들한테 간 점도 꼬인 국면을 만들었다.
세월호특별법은 어쨌건 여야가 합의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게 가로막힌 이유는 정부·여당의 무성의한 태도 탓이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새누리당은 사태를 방관하고 새정치연합이 모든 책임을 떠안았다. 유족 (설득)은 야당 몫이 됐고 여당과 청와대는 유족과 관계없는 이들처럼 행동했다.
세월호 유족과의 소통과 설득 문제를 어째서 야당이 혼자 떠안을 문제인가. 정부·여당에 분명히 도의적 문제가 있다. 이러니 교황 방문이 국민에게 그렇게 큰 감동을 준 것 아니겠나. '저런 지도자도 있구나'하는 영향은 곧 박 대통령을 '왜소한 지도자'로 만들었다. 동시에 10년에 한 번 있을 법한 커다란 충격파로 가톨릭 집단이 박근혜 비판 세력으로 기능하게 됐다.
수사권·기소권에 대한 법률 논쟁 또한 마찬가지다. 논란이 되는 특별검사 제도나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 부여 문제는 법률적으로 틀리다 맞다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명박 내곡동 특검 때 이미 야당에 특검 추천권을 준 전례가 있고, 1949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수사권과 기소권은 물론 재판권까지 가졌었다. 결국 특별법은 여야가 합의하면 되는 것인데 법률 논쟁을 키우는 건 무성의한 태도다.
"세월호 단식은 마땅히 치러야 할 '의식'…'대통령 7시간'에는 너무 집착 말아야"
프레시안 : 일각에선 야당의 장외 투쟁을 '무책임'한 태도라고 비판한다. 문재인 의원의 10일간의 단식을 향해서도 그런 비판이 쏟아졌다. 동시에 세월호 유가족인 김영오 씨의 단식을 둘러싸고도 말들이 많았다.
남재희 : 그런 건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고 본다. 일단, 단식 상황은 일단락됐다.
이번 김영오 씨와 문재인 의원의 단식은 문화사적인 풀이로는 하나의 의식(Ritual․통과 의례)이었다. 살풀이와 진혼굿 같은 의식이라는 얘기다. 어린 학생들을 비롯해 300여 명이 무고하게 죽은 대형 참사이지 않나. 이런 경우엔 일대 사회적 의식을 치러야 한다. 이번 단식 사태는 그런 하나의 통과 의례였다.
그런 면에서 이상하게 볼 필요가 없다. 있을 수 있는 현상이며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왜 국회에 안 들어가고 밖에서 단식을 하고 있느냐'라고 하는 비난은 소소하고 지엽적인 얘기다. 새정치연합은 곧 본연의 원내 활동으로 돌아갈 것이니 현재의 원외 활동에 큰 의미를 둘 것도 없다.
새정치연합 안에서도 장외와 장내를 두고 논란이 있던데 이 역시 분열이라며 심각하게 볼 필요가 없다. 장외·장내 논쟁은 항상 있는 논쟁이고 역대 모든 야당이 다 그랬다. 그리고 야당이라면 원내외 양쪽으로 전략을 다 구사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나.
다만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야권이 '대통령의 7시간', 여기에 너무 집중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상당한 관심거리이긴 하나, 너무 치중하다 보면 대통령의 치부를 건드리는 것 같은 인상을 줘 점잖지 못 하다. 여기서는 새정치연합이 조금 대범할 필요가 있다.
위기에 빠진 야당, 탈출구는?
프레시안 : 리더십 위기에 또다시 조기 봉착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박영선 대표의 리더십 위기와 문재인의원의 재부상, 김한길-안철수 체제의 소멸 속에서, 야당의 리더십은 어떻게 구성돼야겠나.
남재희 : 박영선 리더십에 부족함이 있는 것은 맞다. 3선 의원인데 원내 사령탑과 당 사령탑을 동시에 맡았으니 너무 무리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전당대회가 예정된 내년 3월까지는 박영선 체제가 계속 가야 하지 않겠나. 대권 리더십 문제를 당장 성급하게 생각 할 필요는 없다. 우선 해야 하는 것은 당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우선 박영선 체제 안에서 당의 안정을 찾되 몇 달에 걸쳐서든 치열한 논쟁을 통해 발전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세월호 말고도 여러 이슈를 개발하고 관심을 확대해야 한단 얘길 꼭 하고 싶다. 갈수록 야당 지지 기반이 축소돼 가고 있지 않나. 호남 지지세도 약화했고 노동 계층이나 서민을 위한 뚜렷한 정책도 못 내놓고 있다. 재벌을 상대하는 게 어렵다면 중소기업 문제에서라도 뭐가 있어야 하는데 그도 아니다. 이러니 지지 기반 확보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엉뚱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야당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손학규 전 의원을 재등장시키는 것이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여러 명으로 구성하는 것이니 그 중의 한 명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겠나. 유력한 대권 주자였던 이가 선거에서 떨어졌다는 이유로 아주 은퇴한 것은 성급했다. 아까운 인물이다.
"박근혜 정부, 정체에 빠져 있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의 최근 국정 운영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남재희 : 일종의 이모빌리즘(immobilism) 상태에 빠져 있다. 프랑스 말인 이모빌리즘(immobilisme)에서 나온 이 단어는 '정체', '현상 유지 정책'을 뜻한다. 그나마 움직이는 이가 있다면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인데, 최경환식 부양책 또한 7.30 재보궐선거가 지나고 보니 별것 없단 게 드러나고 있다.
일부는 부동산 경기 진작을 호평하지만, 이게 굉장히 위험한 말 아닌가. 빚져서 집 사란 얘기다. 처음엔 그럴듯하게 보였던 대기업 사내유보금 과세 정책은 결국 기업 저항 등에 부딪혀 슬금슬금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상황을 잘 봐야 한다. 2007년 이후 실질임금이 줄곧 뒷걸음질치고 있고,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이 발표한 걸 보니 우리나라 노동자권리지수(GRI)가 조사 대상 139개국 가운데 최하위인 5등급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득 분배 구조를 개선하지 않으면 경기 부양책은 부자 소득을 키워줄 뿐이다.
결국은 세제 개혁 얘기가 나와야 한다. 주목되는 건 이 세제 개혁을 거론한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과 '동지 관계'라고 말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란 점이다. (김 대표는 지난달 20일 관훈토론회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조세 부담률을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됐다", "세금 없는 복지는 국민을 속이는 것" 등의 증세론을 펼쳤다. - 편집자)
증세는 불가피하다. 2012년 기준 한국 조세부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6.2%)보다 낮은 20.2%로, 사실 우리가 세금을 많이 내는 편이 아니다. 법인세율 역시 24.2%(2013년 기준)로 OECD 평균(25.5%)보다 낮다. 그런데 야당도 민심을 잃을까 세제 개혁 얘기를 안 한다. 외려 김무성 대표가 증세론을 제기해줘서 고마운 마음이다.
"우리가 북한에 접근할 때 우리 외교 능력이 커진다"
프레시안 : 현 정부의 이모빌리즘을 얘기했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 등 외교·안보 정책도 마찬가지라고 평가하나.
남재희 : 그렇다. 지금 미국 오바마 행정부를 보면 대북 정책에 매우 소극적이면서도 일본의 북일 관계 개선을 적극 막지는 않는다. 위험 선호형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대조적으로 오바마 대통령은 위험 회피형이다.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Don't do stupid stuff)'는, 그 유명한 구호가 그의 소극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한반도 문제에서도 오바마 행정부는 한국이나 일본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 즉 '룸'을 계속 남겨두고 있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북을 '반대'한다고는 했지만, 그럼에도 일본은 북한과의 활발한 외교를 이어가고 있다. 그건 룸이 있단 얘기고, 일본이 가진 룸은 우리에게도 있다.
박근혜 정권은 그런데 그 공간을 전혀 활용하지 않는 것 같다. 최근 일부 여야 의원들이 5.24 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를 말했는데, 통일부 입장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다. 비무장지대(DMZ)에 평화공원을 만드는 정도로 관계 개선이 되나. 5.24 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에서라도 하나씩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북한에 접근할 때 우리 외교 능력이 커지는 것이다.
프레시안 : 북한과의 관계를 우리가 주도할 때, 미·중·일과의 관계에서도 휘둘리지 않을 거란 얘긴가.
남재희 : 그렇다. 얼마 전에 로버트 가드 미군축비확산센터 이사장이 <서울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한국군의 국방 통제 능력이 충분하고 전시작전통제권이 전환(2015년 말로 예정)돼도 미군은 유지되니 재연기가 불필요하다"고 했다. 북한 핵 위협은 미국의 핵우산으로 억지가 가능하니 미국 주도의 미사일방어(MD) 체계에 한국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30여 년 동안 미 국방부 및 군에서 활동한 후 두루 요직을 거친 인물이 한 얘기다. 우리의 관습적인 생각하고 다른 놀라운 얘기이지 않나. 전작권이 환수되면 큰일 날 것처럼 야단치지만 사실 그런 게 아니다.
게다가 미국이 '아시아 회귀전략(Pivot to Asia)'을 외치지만 현재로선 알맹이가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미중간 긴장 격화가 예상했던 만큼은 아닐 거라고 전망한다. 이 또한 우리가 외교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룸이 제법 있다는 걸 뒷받침한다. 외교 역량을 발휘할 조건이 여러모로 좋은 상황인 것이다.
"한일 관계, 일정한 긴장 유지하는 '새 스타일' 필요"
프레시안 : 일본과의 관계는 어떻게 풀어가야 한다고 보나.
남재희 : 일본의 우경화가 무서운 수준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얼마 전 아베의 '외교 가정교사'라고도 불리는 오카자키 히사히코 전 태국대사가 "내년은 전후 70주년인 만큼 아베 총리가 다른 담화를 발표할 수도 있다'며 "아베 총리는 패전전 역사를 영광스러운 역사, 좋았던 시절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런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고 밝혔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다.
이는 2차 대전의 침략 시기로 돌아간다는 상당히 무서운 폭탄선언인데, 이런 상황에서 유흥수 한일친선협회 전 이사장이 신임 주일대사가 돼 조금 우려스럽다. 한일친선협회는 매우 옛날 스타일의 외교술에 익숙한 집단이다.
예컨대 박정희 대통령 시대 때 이병희 무임소장관이 늘 일본에 가서 자민당 거물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다녀 사람들이 '일본 장관'이라고 불렀다. '형님 동생'하는 일종의 유착 외교, 이런 게 매우 구식인데 그런 옛날 외교 방식이 몸에 밴 사람들이 한일친선협회에 많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오카자키 전 대사 같은 사람을 만나서 그런 구식 외교를 할 것인가? 새로운 스타일의 외교가 필요하다. 구태의연한 과거의 유착·정실 외교가 아니라 양국의 양식 있는 시민들 이해에 기반하는 외교를 해야 한다. 과거사 논쟁과 위안부 문제에서도 어느 정도 일정한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건전한 한일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게 깨지고 다시 과거와 같은 정실·유착 외교로 돌아간다면 아무런 성과도 내놓을 수 없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