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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러시아-독일 고속철, 그 야심의 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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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러시아-독일 고속철, 그 야심의 끝은?

[동아시아를 묻다] 재균형의 축 ② 유라시아

유라시아의 세기 : 북방과 서부

"세계 질서의 일극 지배는 실패로 끝났다."

지난 5월 22일, 푸틴의 선언이다. 장소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러시아판 '다보스 포럼'이라고 하는 국제 경제 포럼이 열렸다. 참여자들의 면모는 확연히 달랐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과의 갈등이 한창 고조되었던 탓에 미국과 유럽인들은 극히 드물었다. 거개가 아시아 출신들이었다.

푸틴은 바로 전날 상하이에 있었다. 5월 21일, 러시아와 중국은 역대 최대 규모의 가스 공급 계약에 합의했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장소를 옮겨, 중국-러시아 경제 동맹의 청사진을 밝힌 것이다. 발제는 중국의 부주석 리위안차오(李源潮)가 맡았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발과 중국의 동북 3성 개발의 통합을 공식화했다.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된 크림 반도 개발 계획도 인상적이었다. 중국 자본이 인프라 건설을 주도하여 러시아 본토와의 통합을 지원한단다. 개혁 개방 정책의 첫 실험지였던 선전 특구를 모델로 삼는다는 말도 있다. 정작 아시아로 축을 옮긴 것(Pivot to Asia)은 러시아인 것 같다. 그만큼 중국 자본의 순환을 통한 북방과 중원의 시장 통합이 두드러진다. 푸틴은 산술적으로 2024년까지 집권한다. 가스 공급은 2018년부터 20년간, 2038년까지 진행된다. 2040년, 어떤 세계가 펼쳐질 것인가.

그 단서를 하얼빈에서 언뜻 엿볼 수 있었다. 지난 6월 중국-러시아가 공동 주관하는 최초의 박람회가 열렸다. 에너지, 교통, 농업 분야에서 합작을 도모하는 자리였다. 양국 도합 1597개의 기업이 참가해 성황을 이루었다. 시베리아-동북 3성-동몽골을 잇는 북방 프로젝트에 각국의 지방 정부들도 적극적이다.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는 지린 성과 헤이롱장 성의 근방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적극 활용하여 농업, 건설, 에너지, 여행 등 다방면에서 중국 시장과의 연계를 통한 발전 전략을 마련했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를 북아시아 물류 기지로 삼는 복안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장기적으로 한반도와 일본까지 염두에 둔 북아시아 회랑 만들기 기획이다. 블라디보스토크-그라데코프-쑤이펀허-하얼빈 노선이 축을 이룬다.

못지않게 자루비노 항에서 출발해 훈춘에 이르는 노선도 주목받고 있다. 러시아 최대 물류기업인 슈마(Summa)그룹과 지린 성은 자루비노 항을 경제 특구로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2018년 완공 예정으로, 1년에 1억 톤의 물동량 소화가 가능한 수준이다. 특히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에서 생산한 식량을 중국과 아시아 국가에 공급하는 '동방 식량 회랑' 구상에 적극적이다.

레저 산업도 야심차게 추진되고 있다. 1억 2000만 명을 넘어선 베이징과 동북 3성의 여행객을 겨냥한 것이다. 특히 카지노 건설에 공을 들이는 눈치이다. 이들에게는 블라디보스토크가 마카오보다 가깝고 편하다. 마카오는 4시간이 걸리지만, 블라디보스토크는 베이징에서 2시간 30분, 하얼빈에서는 1시간 20분이다. 극동과 시베리아의 생태 여행과 결합한 패키지 상품이 개발된다면 향후 전망이 밝다고 한다.

돌아보면 흉노, 돌궐, 몽골, 여진, 러시아 등 북방은 줄곧 중원의 안보를 위협하는 난세의 화근이었다. 장성을 만 리나 쌓아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20세기에도 러일 전쟁, 중일 전쟁, 중소 전쟁 등 만주-동북은 갈등의 요람이었다. 이 북방이 목하 시장 통합, 생활 세계 통합으로 신천지가 되고 있다.

북방만큼이나 주목되는 곳은 서부이다. 북방의 파트너가 러시아라면, 서부 대개발의 조력자로는 독일이 두드러진다. 지난 7월, 대규모 경제 사절단을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한 메르켈 총리는 각별하게 쓰촨 성의 성도, 청두(成都)를 방문했다. 독일이 서부 대개발과 실크로드 경제권 건설에 동참할 것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미 청두는 독일계 자본/기업의 중심지로 왕년의 칭다오를 넘어서고 있다. 청두에서 출발하는 고속철이 카자흐스탄, 러시아, 벨라루시를 지나 폴란드의 우지(Lodz)에 도착하는 철도망은 이미 건설이 시작되었다. 더불어 지난 3월 시진핑이 독일 방문 때 직접 밝힌 충칭에서 출발해 신장을 지나 독일의 뒤스부르크(Dusburg)에 종착하는 고속철도 연결 중이다.

라인 강변에 자리한 뒤스부르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내륙 항만으로 독일이 자랑하는 철강 산업의 중심지 루르(Ruhr) 근방에 위치한다. 서부 대개발의 총본산인 충칭과 유럽 경제의 요충지인 뒤스부르크를 잇는 고속철 구상은 유라시아를 한 줄로 꿰는 핵심 연결망이 아닐 수 없다. 10월에는 리커창 총리가 재차 독일을 답방함으로써 시진핑-메르켈-리커창으로 이어진 양국 간 세 차례 셔틀 회담에 마침표를 찍을 예정이다.

자원 대국 러시아, 제조 강국 독일, 그리고 세계의 시장 중국. 베이징에서 베를린을 잇는 지경학적 이해의 융합은 유라시아의 새로운 역동성을 창출할 것이다. 고속철이 통과하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유인할 것이며, 유럽과 아시아의 양대 경제축이 연대함으로써 유로화와 위안화 합작을 통한 달러의 위상 저하 또한 가속시킬 것이다. 중국-러시아 가스 계약이 위안화로 결제함으로써 오일-달러에 버금가는 가스-위안의 등장을 예고했을 뿐더러, 메르켈 또한 프랑크푸르트 금융 시장에서 위안화 거래를 허용함으로써 전 지구적 '재균형'에 보조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태평양의 세기' 선언은 여러모로 뒷북이었지 싶다. 미국-영국-일본이 축을 이루었던 해양패권 시대가 저물고 세계 경제의 축이 유라시아 대륙권으로 점진적으로, 점증적으로 (재)이동하고 있는 탓이다. 실로 태평양의 전성기는 20세기였다. 대서양은 19세기였다. 21세기는 (다시) 유라시아로 축이 이동(Pivot to Eurasia)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 카인과 아벨

유럽과 유라시아의 갈림길에 우크라이나 사태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유로마이단 운동은 착잡한 지점이 없지 않다. 오렌지 혁명과도 일선을 긋는다. 오렌지 혁명은 부정 선거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래서 재선거를 실시하는 것으로 갈음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수호한 정치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반대라고도 할 수 있다. 선거로 선출된 (친 러시아) 정부를 전복하고 (친 유럽)새 정부를 옹립한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 과정 또한 볼썽사나웠다. 반유대주의, 반러시아주의를 공공연하게 표방하는 극우 세력들과도 기꺼이 협력했다. 레닌상이 철거되는 한편으로, 유대인들이 우크라이나를 떠나 이스라엘로 피신하고 있다.

이 또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노정하고 있는 어떤 착종과 유사하다. 동유럽에서 확산되고 있는 우익 운동은 적대 세력에게 '공산주의'의 허울을 씌우고, 스스로를 '민주주의'적 개혁자로 표상한다. 이른바 '반공 민주'이자 '반러 민주'로, 대만의 '반공 민주' 및 '반중 민주'와 포개지는 바 없지 않다.

작금의 지배엘리트들을 '공산주의'라고 수식하는 황당함만큼이나, '민주주의'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모호하고 애매해진 것이다. 그래서 좌파, 페미니스트, 노조활동가들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를 표출하면서도 '민주파'를 자처하는 역설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는 유럽이다!'를 목 놓아 외치면서도, 정작 그 유럽연합(EU) 내부에서조차 왜 적지 않은 좌/우 세력들이 반 EU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몹시 둔감하다. 일본, 한국, 대만, 태국 등 동아시아의 '냉전형 민주'가 동유럽에서도 복제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떨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여 유럽으로 편입되는 노선을 대국주의 러시아가 훼방하고 있다는 일반적 독법에 마냥 동의하기가 힘들다. 러시아-우크라이나-크림반도를 잇는 문화사적, 혹은 문명사적 접근의 결여가 매우 아쉬운 것이다. 지정학이 아니라 지문학적으로 본다면,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에 귀속되어야 마땅한 땅인지 판단이 결코 쉽지 않다. 18세기말부터 크림반도는 러시아 문학에서 신화적이며 특권적인 장소로 남다른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얄타를 무대로 한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같은 단편 소설도 크림반도가 없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빼어난 명작이다.

실상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지리적으로 인접한데다 자연적 경계도 없다. 그만큼 이동과 이주가 쉽고 혼혈과 혼거가 일상적이었다. 게다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종교적으로도 동방정교회의 복음 아래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부터가 키에프에서 유래했다. 아니, 러시아라는 국가 자체가 988년 키에프 공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형제이자 자매에 가깝다. 혹은 키에프가 모스크바의 조부모라고 할 수도 있다. 그만큼 1000년의 인연이 끈끈한 것이다. 그래서 고골이 그린 우크라이나 세계가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가장 중요한 유산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서유럽이나 동아시아, 아랍에 비견될 수 있는 슬라브권의 '문예공화국'을 일구었던 것이다. 20세기형 '민족문학'과는 확연히 달랐다.

병통은 역시 20세기이다. 카인과 아벨의 근친증오와도 흡사한 골육상잔의 비극이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비롯했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혁명에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시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이념이나 혁명보다는 종교와 전통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독실한 정교회 신도들이 다수였기에 '신앙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하여 볼셰비키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는 백군의 편에 서기도 했다. 때문에 '반동적'이며 '봉건적'이라며 매도당했다. 탄압도 심했다. 우크라이나의 굴욕이자, 굴종이었다.

스탈린 집권기는 더욱 가혹했다. 사회주의 건설의 대의명분 아래 장기간 수탈과 착취를 겪었다. 독일에 뒤지지 않는 공업 국가로 만들기 위하여 농민들의 희생은 묵과되었다. 제1차 5개년 계획 말기인 1930년대 초에는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1000만에 육박하는 아사자를 양산시켰다. 전례 없던 대기근이었다.

피해자 의식은 더욱 배가되었다. 그리하여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소련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도 적지 않았다. 소련은 그들을 나치 부역자로 간주하여 엄벌하고, 처단했다. 러시아/소련에 대한 억한 심정이 지난 100년간 꾸준하게 쌓여 왔던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이다!' 몹시 어색하게 들리는 이 발화야말로, 20세기의 후과이자 냉전의 후폭풍이다.

고금(古今)의 재균형(Rebalancing)

반면 러시아 귀속을 결정한 크림반도의 주민 투표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푸틴 정권과 영합한 '친러시아파'의 소행인가. 그래서는 그들의 뜻을 왜곡하고, 왜소화하고 만다. 한층 전일적인 정신성으로의 귀속을 표명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한층 온당할 것이다. 특정 국가에 대한 소속감보다는 문명적인 공속감의 표출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가 전형적인 '국민 국가'에 가깝다면, 러시아는 여전히 '제국'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일갈을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러시아인은 절대적 군주 아래 있음으로서 비로소 무한하게 자유롭다." 이 형용모순은, 그러나 러시아라는 제국의 본질을 꿰뚫는 직관을 담고 있다. 러시아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지리적 조건에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다. 우랄 산맥을 등골로 삼아 동과 서로 드넓은 공간을 아우른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 이상, 일정한 강권은 불가피한 것이다. 규모는 관건적이기 때문이다(Size Matters). 유라시아에 펼쳐진 광대한 영토에서 살아가면서 무한한 자유가 무한한 혼돈(戰國時代)으로 빠지기 않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강대한 권력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강권이 그들의 자유에 대한 욕구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수준 높은 문화를 일구게 한다. 러시아가 보유한 매우 높은 수준의 인문학적 지성의 원천이라 하겠다. 지난 200년 러시아 문학/예술의 위대함 또한 러시아적 환경이 부여하는 창조적 산물이자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제국에서 국가로의 분화(와 분열)을 '진보'나 '근대화'의 지표로 삼았던 사고방식을 근본에서부터 재고할 여지가 크다. 19세기 아시아는 여전히 제국형 질서가 지속되었다. 아시아의 제국들이 붕괴되고 유럽형 개별 국가로 사분오열된 것이 20세기라고 할 수 있다. 저마다 부국강병을 내세우며 만국이 만국에 투쟁하는 난세가 개창되었다. 문명적 공속감, 국제적 형제애, 덕과 예의 상호교환 등 제국형 지역질서가 파탄난 것이다. 목하 유라시아 단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변동이란 각 지역의 제국적 관성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 러시아, 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터키(오토만), 이란(페르시아), 심지어 유럽(로마)까지도 제국의 귀환에 방불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상하이협력기구(SCO)는 괄목할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인도, 이란, 터키까지 확장하면서 왕년의 몽골세계제국의 범위에 가장 근접해가고 있다. 기마대와 역참제를 대신하여 고속철(오프라인)과 금융 전산망(온라인)이 유라시아의 동서남북을 종횡으로 연결하면서 말이다. 몽골세계제국이 단기간에 유라시아적 규모로 확대되었던 것은 각 지역에 평화를 선사함으로써 구성원들에게 일정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제국의 범위에서 유라시아 차원의 교역이 자유롭게 펼쳐지는 것을 인정받고 환영받은 것이다. 그저 몽골의 세력을 확대하는 것에 머물렀다면 제국주의에 그쳤을 것이다. 즉 제국은 제국주의와 다르며, 평화주의에 한층 가깝다.

30년 종교 전쟁의 아비규환 끝에 구교와 신교를 통합시키고자 '종합'과 '조화'를 숙고했던 사상가로 라이프니치가 있었다. 다양한 존재를 포용하는 철학, 이질적 존재들을 조화 속에 화해시키는 독창적 사유를 개진해 나갔다. 그의 철학적 언어를 정치적 언어로 고쳐 말하면 이러하다. 라이프니치 또한 유럽에서 '제국'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즉, 라이프니치의 철학적 모나드론은 정치적으로는 제국론이었다. 그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칸트가 구상했던 영구평화의 방편으로서 제(諸)국가연방이라는 것도 실은 제국의 원리에 바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심장한 것은 라이프니치가 모나드론의 발상을 길어 올린 대상이 바로 중국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의 선불교, 그 중에서도 화엄경에서 배운 바 크다. 작은 세계에 삼천세계가 반영되어 있다는 발상, 그것이 '종합'과 '조화'를 꾀하는 모나드론으로 번역된 것이다. 돌아보면 인도의 대승불교였던 화엄경이 대당제국 시대에 널리 전파된 것 또한 우연만은 아니었지 싶다. 뿌리 깊은 제국의 사상이었던 것이다. 각각의 사회는 독립하고 있지만, 동시에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옛 말로는 '대일통'(大一統)일 것이며, 20세기 용법으로는 차서(差序, 페이샤오퉁) 혹은 복합사회(다케우치 요시미), 최신 용어로는 트렌스-시스템 사회(Trans-Systemic Society, 왕후이)라고 하겠다. 국가의 (새) 원리와 일선을 긋는 제국의 (오래된) 원리이다.

유라시아의 세기로의 반전은 국가별로 각개약진하던 20세기로부터 문명권적 공속감을 바탕으로 한 제국형 옛 질서의 가치와 미덕을 재음미해보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국가 간 경쟁을 억제함으로써 자연적/사회적 비용을 낮추고 엔트로피를 줄이는 역할을 했었기 때문이다. 내 나라의 다스림(治國)만큼이나, 천하를 염려했던 마음(平天下)이 균형추로서 작동했었다. 아니 천하의 태평을 통해서만이 내 나라 또한 건재할 수 있었다. 유기론적(organic) 세계이자, 연기(緣起)론적 세계였다.

최근 학술계에서 제국사(Empire History) 연구가 부쩍 활기를 띠고 있는 것 또한 징후적 현상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작금의 재균형(rebalancing)이란 비단 미국과 중국(G2) 간의, 동서(East-West) 간의 세력 전이만을 뜻하는 것이 도무지 아니다. 안목을 한층 가다듬고 높여야 하겠다. 세계관의 반전, 인식과 발상과 사유의 근대적 편향을 거두고 교정하는 고금(古今) 간의 재균형 과업이야말로 반전시대의 요체이자 요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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