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난 윤 일병이 참 불쌍하게 사망했구나 하는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았다."
충격적이지 않았다니. 육군 제28사단 윤 일병의 죽음에 사람들이 공분하는 이 마당에 자칫하면 냉혈한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말이다.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한 사람은 그러나 냉혈한과는 거리가 멀다. 그 반대다. 남들 가슴에 대못 박아 놓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진 이들과 불의한 권력에 맞서고,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을 20년 넘게 해온 사람이다.
고상만. 인권 운동과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연합 인권위원회, 천주교 인권위원회, 인권연대 등에서 활동하며 현장을 누볐다. 김훈 중위, 장준하 등 세간의 관심을 모은 의문사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는 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 친일 반민족 행위자 재산 조사 위원회 등에서 조사관으로 활약했다. 김광진 의원실 보좌관으로 일하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고상만 하면 조사관이라는 말부터 떠올리는 이유다.
고 씨가 책을 냈다. 아프고 억울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시, 사람이다>(책담, 2014년 7월 펴냄)가 바로 그것이다. 인권 운동가이자 과거사 진상 규명 조사관으로서 그들과 함께한 경험을 오롯이 담았다.
5일 오후 국회 김광진 의원실에서 고 씨를 만났다. 예상대로, 바빴다. 윤 일병 사건 때문이었다. 군에서 발생한 수많은 죽음을 다룬 고 씨에게 여러 언론사가 자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터뷰 중에도 이런저런 언론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아야 했다. 이에 더해 고 씨는 군에서 가족을 잃은 이들의 기자회견 준비에 한창이었다. (관련 기사 : "잔인한 얘기지만…차라리 윤 일병이 부럽다")
"병영 문화 개선? 입증 책임 바꾸고 군인 목숨 값 높여야"
그래도 예정된 일은 해야 하는 법. 고 씨와 마주 앉았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윤 일병 사건이었다. <다시, 사람이다>에서 다룬 주제 중 하나가 군에서 발생한 사망 사고 문제라는 점에서 책과 현안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윤 일병 사건은 내가 그간 다룬 사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주 놀라운 사건이라고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군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보기엔 그렇지 않다. 유족 중 한 어머니가 얼마 전 내게 전화를 했다. '참 끔찍하고 무서운 이야기인데, 윤 일병 부모에게는 죄송하지만 차라리 윤 일병이 부럽다'고 하더라. 왜 죽었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가 드러났고 그래서 사람들이 공분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맞아 죽지 않고, 가혹 행위를 견디다 못해 목매달아 죽었거나 방아쇠를 당겨 죽었다면 윤 일병 역시 자살로 처리됐을 것이라는 말이다. 군에 간 가족이 죽었을 때 그게 자살이 아님을 입증할 책임을 유족에게 지우는 것이 현재 시스템이다. 윤 일병 사건만 해도, 4월에 발생했는데 넉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논쟁이 되고 시끄러워지지 않았나. 유족이 군 인권 단체에 도움을 요청하고 군 인권 단체에서 진실을 폭로하지 않았으면 윤 일병 사건도 다른 많은 사건들처럼 묻혔을 것이다."
윤 일병 사건에 수많은 이들이 공분하면서 국방부는 궁지에 몰렸다. (관련 기사 : "원정 출산 안 한 것 후회", 28사단 사건에 들끓는 민심) 그러면서 국방부는 특별 인권 교육 실시를 비롯한 병영 문화 개선 노력을 약속했다. 이것으로 끔찍한 사고가 근절될까?
"이것 또한 이벤트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윤 일병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고, 6월에는 제22사단 임 병장 관심 사병 사건이 있었다. 그 이전엔 죽은 병사의 조위금을 간부들이 횡령한 사건, 여군 대위 성 추행 사건도 있었다. 또 유명 연예인의 남동생의 가혹 행위 때문에 공군 김 일병이 목숨을 끊어 논란이 됐었다. (이 과정을 보면) 국방부의 관점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12년 반지하 보일러실에서 목을 매달아 사망한 김 이병 사건이 있었다. 군 당국이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자살한 아버지 때문에 환경이 불우했던 김 이병이 그 불우한 환경을 탓하면서 자살했다'고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확인 결과 김 이병 아버지는 자살한 것이 아니었다.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런데도 군은 일반 사망으로 처리했다. 김 이병의 여자 친구가 다음 아고라에 글을 올린 것을 계기로 진실이 밝혀졌다. 부대원들이 김 이병에게 식단표를 외우도록 강요했고 그걸 못 외웠다는 이유로 매일 구타와 가혹 행위를 했던 것이다. 윤 일병 사건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사건이다.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군 당국에서는 인권 교육이니 병영 문화 개선이니 하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지금과 같은 구조에서는) 그것 다 필요 없다. 군인의 목숨 값을 비싸게 쳐야 한다. 의무 복무 중 군인이 죽으면 국가가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20년 이상 키우고 가르치고 먹여서, 누구처럼 회피하지 않고 군에 보냈는데, 그 귀한 아들이 죽은 것 아닌가. 의무 복무 중 사망자는 기본적으로 모두 순직 처리를 해야 한다. 지금처럼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유족이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순직 처리되지 않을 이유가 있다면 그걸 국방부에서 입증해야 한다. 군 인권 문제를 정말 바로잡겠다고 한다면, 입증 책임의 주체를 바꿔야 한다. 이게 윤 일병 사건의 진짜 해답이다."
정부·여당, 윤 일병 아픔에 공감한다면 군 인사법 개정안부터 통과시켜야
지난 3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한민구 국방부 장관을 강하게 질책했다. 윤 일병 사건은 "살인 사건"이라며 책상을 내리쳤다. 5일에는 박근혜 대통령도 나섰다. 박 대통령은 "이래서야 어떤 부모가 안심하고 자녀를 군에 보낼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뿌리 깊은 적폐"라며 "국가 혁신 차원에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고 씨는 그 진정성에 의문을 품고 있다.
"내가 속한 김광진 의원실에서 작년 12월에 군 인사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유족들과 함께 발의했다. 순직 대상자 항목에 '의무 복무 중 사망자', 이 여덟 글자를 넣자는 것이다. 의무 복무 중 사망한 사람은 순직 처리를 해주고 국립묘지에 안장하라는 것이다. 국방부에서 거부하고 있다. 순직 처리를 하면 (1인당) 1억900만 원 정도를 줘야 하는데, 못 주겠다는 것이다.
사실 2001년 이전엔 군인이 죽으면 국가에서 시신만 내줬다. 공용물이라고 군복도 안 내줬다. 1998년 김훈 중위 사건이 난 후, 그때 난 천주교 인권위 소속이었는데 국가의 책임론을 따지면서 싸웠다. 그 후 군인이 죽으면 시신과 함께 (사망 위로금) 500만 원을 내주는 게 생겼는데, 이것도 유족이 자살을 인정하고 일반 사망으로 처리됐을 때에만 준다. 참 잘못된 제도다.
윤 일병 같은 사람이 죽으면 군에서는 비전투 손실이라고 한다. '손실'이라는 표현을 쓰며 군인의 죽음을 다룬다. 이런 근본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군 인권 문제 개선은 불가능하다. 또 60년 넘게 육군에서는 군인의 시신 관리를 물자과에서 했다. 군 병원 냉동고에 있는 자식의 시신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그 부모가 물자과에 물어봐야 한다는 건 야만 아닌가. 작년 국정 감사에서 김광진 의원이 지적해 올해 3월 1일 자로 물자과에서 인사과로 바뀌었다.
입증 책임의 주체를 바꾸고 군인의 목숨 값을 비싸게 쳐서 국가가 책임지게 하지 않으면 문제는 계속 터질 수밖에 없다. 김무성 의원이 책상을 쾅쾅 쳐가면서 국방부 장관을 몰아세운 것이 진심이라면, 이 법안부터 통과시켜야 한다."
고 씨는 지난해 봄부터 김광진 의원실에서 일했다. 김 의원과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님에도 그런 결정을 내린 건 군에서 억울한 죽음이 계속되는 것을 막고 싶어서였다. 의원실에 온 후 고 씨는 군에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연락처를 여기저기서 구해 손을 내밀었다.
"'의무 복무 중 사망한 군인들의 명예 회복과 진상 규명에 관한 일을 하려 한다. 저와 같이하시지 않겠느냐'는 문자메시지를 먼저 보냈다. 한 10분 있다가 부산에 사는 어떤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그분은 엉엉 울었다. 메시지를 받고 계속 통곡했다고 했다. 아들을 잃은 지 8년 정도 됐는데, 국가로부터 위로하는 말을 듣지 못하다가 이런 메시지를 받아서라고 했다. 국가가 원망스럽고 서러웠는데, 연락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했다. 유족들이 대부분 이런 반응을 보였다."
고 씨는 이렇게 모인 군 사망 사고 유족 150여 명과 함께 작업해 지난해 3개의 법안을 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통과된 게 없다.
"현재 총 191기의 유해가 군 병원 창고에 있다. 이 중에는 1971년에 사망한 하사도 있다. 44년째 그 상태라는 말이다. 또 1990년대에 사망한 사람을 비롯한 23구의 시신이 군 병원 냉동고에 사실상 방치돼 있다. 이젠 그만 묻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인수를 거부한 유족들에게 내가 다 물어봤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하시겠느냐고. 순직 처리를 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해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분들과 함께 3개의 법안을 만들었다. 첫 번째가 앞에서 말한 군 인사법 일부 개정 법률안(안장법)이고 두 번째가 보상법이다. 병무청에서 검사해 뽑아간 군인이 사망했다면 국가가 잘못 뽑았거나, 혹은 제대로 뽑았어도 관리를 잘못한 것이다. 제대로 보상하는 게 부담스러우면 군인이 죽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세 번째는 군 사망 사고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이다. 지금은 군 헌병대에서 자살로 처리한 것에 유족이 이의를 제기하면 또 헌병대가 수사하게 돼 있다. 이건 잘못된 것 아닌가. 이의를 제기할 경우 민관 합동으로 외부에서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 법안의 내용이다.
세 법안이 통과되면 군 인권 문제가 획기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새누리당 쪽에서는 '다 통과시켜줄 수는 없으니 정말 시급한 것 하나만 골라 와라', 이렇게 나왔다. (하는 수 없이) 유족들이 투표로 선택한 것이 첫 번째 법안이다. 그런데 이것조차 통과시켜주지 않고 있다."
이렇게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지만, 고 씨는 희망을 품고 있다.
"법안 통과, 지금은 안 되고 있지만 난 결국 될 거라고 본다. 그게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이 주장을 1998년도에 했을 때는 사람들이 날더러 미친놈이라고 했다. '아니, 군대에 가서 자기가 못난 탓에 죽었는데 그걸 왜 국가가 책임지나', 이랬다. 좋은 주장이긴 한데 그게 말이 되냐는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아,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이렇게 반응한다."
"반성 않는 검찰, 강기훈 죽기만 기다리나"
"사람들이 이 정도 내용은 다 아는 것 아닐까, 내가 굳이 써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한때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전혀 모르더라. 이 책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사람 이야기다. 누군가의 억울하고 안타까운 사연을, 전태일이 왜 분신했는지, 김근태라는 정치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을 전하고 싶었다. 그걸 통해, 사람이 사람을 아끼고 배려하고 공감하고 연대하자고 제안하고 싶었다.
전에 군 사망 사고 유족들과 함께 행사를 하는데 빈자리가 있었다. 내가 어머니들한테 여쭤봤다. 누구 자리일 것 같으냐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난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군대에서 3일에 한 명꼴로 군인이 죽어가니, 3일 후 또 다른 누군가가 앉아야 할 자리라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서로 돕는 것, 그렇게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 우리가 같이 사는 길임을 말하고 싶었다.
또 나한테 한국전쟁이나 4.19 같은 게 (피부에 와 닿기보다는 우선) 역사 속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처럼 지금 스무 살인 사람들한테는 1980년 5월 광주 같은 것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어렵지 않게, 딱딱하지 않게, 중학교 2학년 수준의 학생이 읽을 걸 염두에 두고 썼다. 근현대사 문제에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들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쓰려고 노력했다."
<다시, 사람이다>에 담긴 사람 이야기 중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다룰 게 없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만 살피고자 한다. 나머지는 책을 정독하며 접하길 권한다. 살필 것 중 하나는 유서 대필 사건이다. 지난 2월, 법원은 유서 대필 사건 재심에서 강기훈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건 발생 23년 만에 나온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었다. 뒤늦게라도 법원은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았지만, 검찰은 그렇지 않았다. 검찰은 이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23년이 지난 지금도 검찰은 그렇게 강기훈을 '동료를 죽음으로 몰아간 파렴치범'으로 몰아가고 있다. (관련 기사 : <"반성 없는 검찰, 마피아와 다를 게 없다"> <"'유체 이탈' 대통령, '찌라시' 김무성…비정상 판친다">)
강기훈 사건은 고 씨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유서 대필 조작 강기훈 무죄 석방 공동 대책 위원회' 간사, 고 씨는 그렇게 인권 운동에 첫 발을 내디뎠다.
"어떤 이념도 인간의 존엄성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 내가 갖고 있는 확고한 인식이자 인권 운동의 기반이다. 그와 달리 정권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고 짓밟아도 좋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 그것이 바로 유서 대필 사건의 진실이다. 저들은 당시 유서 대필 사건이 아니라 그 어떤 형태로라도 사건을 조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그 대상자가 강기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책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그때 조작 시도가 최소한 세 건 더 있었다.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 국가는 잘못된 과거, 정권 차원에서 즉 검찰을 비롯한 국가 기관들이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있다. 이건 그런 일을 지금 다시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그때 그런 사건이 있었지' 하는 과거형으로 인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바로잡는 것이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는 길이다. 시간이 지나더라도 진실을 밝히고 가해자들을 물리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처벌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임을 사람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강기훈은 몹쓸 병마와 싸우고 있다.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고 씨도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사건 당시 우리에겐 힘이 없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드러나고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기훈에게 암이라고 하는 무서운 병마가 찾아왔다. 검찰은 사실상 강기훈이 이대로 죽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공소가 기각되길 바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야만이 계속될 수 있겠나. 강기훈에 대한 불의한 국가 권력의 탄압과 횡포는 과거에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고 씨에게 이 사건이 남다른 건 강기훈 때문만은 아니다. 제 손으로 유서 한 장 못 쓰는 사람으로 검찰이 만들어버린 고(故) 김기설에게 고 씨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많이 느낀다.
"강기훈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난 진짜 불쌍한 사람은 김기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김기설의 유서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김기설이 무슨 이야기를 남기고 이 세상을, 그 모진 마음을 먹으면서까지 떠나려 했는지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이 책에 김기설의 유서 전문을 담고 싶었다."
고상만이 되살린 이름, 김용갑·최정환
인권 운동에 첫 발을 내디딘 계기가 유서 대필 사건이라면, 인권 운동가이자 조사관 고상만의 출발점은 김용갑이다. 박 대통령의 자문 그룹으로 꼽히는 7인회의 일원인 김용갑 전 한나라당 의원, 그이는 물론 아니다. 1990년 강원도 속초에 있는 한 대학의 총학생회장으로서 학교다운 학교를 만들고자 노력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은 청년이다.
"김용갑이라고 하는 이름 없는 한 청년의 죽음이 없었으면 난 인권 운동을 안 했을 것이다. 김용갑은 나의 학번 동기생이자 네 살 많은 형이었다. 나랑 같이 학생 운동을 했는데, 김용갑을 끌어들인 건 사실 나였다. 죽기 전까지 7차례나, 학생 운동을 하지 말라고 협박하는 학교 내 폭력배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그러다가 2시간 35분의 실종 끝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엄청나게 울었다. 그 형은 죽고 나는 살았다는 죄책감이 컸다. 그 형의 사인 진상 규명을 위해 싸우던 중 학교에서 제적되고 감옥에도 갔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운동을 계속해야겠구나 하는 걸. 김용갑은 내가 일을 하면서 어떤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 하거나 도덕적이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중요한 기준점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들이 다닌 학교는 지난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뉴스타파>의 조세 피난처 보도에 거론된 곳 중 하나다. 문제 사학의 문제를 바로잡으려던 동기생 김용갑의 죽음을 계기로 삶이 바뀐 고 씨는, 2005년 장외에서 촛불까지 들며 사학법 개정을 저지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대통령이 된 지금까지 인권 운동을 이어오고 있다. 생각해보면, 얄궂은 인연이다.
아무리 바빠도 고 씨가 빠지지 않는 자리가 있다. 고 김용갑 추모제다.
"그 형 영전에서 혈서를 쓰면서 약속한 게 있다. 살아 있는 동안 형의 추모제를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올해 24주기였는데 첫 번째 때 난 감옥에 있었다. 그래서 보리밥 관식에 숟가락을 꽂고 혼자 추모제를 했다. 그다음 해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형의 어머니 그리고 동문들과 매년 모인다. 그렇게 새내기 때 그 형과 나눴던 순수한 마음, 억울한 사람들과 함께하려던 그 열정을 잊지 않으려 한다."
김용갑이라는 무명 청년은 그렇게 고 씨와 함께하고 있다. 세상이 그냥 묻어버렸을 이름 중 고 씨가 되살려낸 건 김용갑만이 아니다. 1995년 강남구청 현관 앞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고단했던 삶을 마감해야 했던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도 그러하다. 용역들의 무지막지한 철거 폭력에 시달리던 노점상들과 장애인들은 분노했지만, 최 씨의 장례마저 뜻대로 치를 수 없었다. 지나친 노점 단속에 항의하는 뜻을 담아 노제와 영결식을 하려 했지만, 경찰에 가로막혔다. 경찰에 시신을 뺏기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노제와 영결식을 포기하고 장지로 향해야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장례 대책위원회는 '장지로 바로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도 경찰은 운구차가 다른 곳으로 갈지 모른다고 여겨 경찰 오토바이와 차량으로 운구차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유력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 대단한 예우를 받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 풍경이었다. 장애인 노점상 한 명 때문에 경찰이 그처럼 엄청난 호위를 하고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했던 최정환 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걸 보면서, 한 인간으로서 정말 안타깝고 불쌍했다. 당신의 이름을 꼭 세상에 남기겠다고, 세상에 알리겠다고 그때 약속했다. 그런 약속을 통해 나도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억울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고 싶다"
<다시, 사람이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는 최정환 같은 노점상도 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같은 이도 있다. 고 씨는 책에서 "고백하건대, 나는 그를 사랑했다"고 밝혔다. 궁금했다. 인권 운동가로서 권력과 거리를 두고 보편적인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과 특정 정치인을 사랑하는 것이 현실에서 충돌하지는 않을까.
"정치인 노무현의 이념적인 지향성보다는 그가 내세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구호가 옳다고 생각했다. 맹목적인 지지가 아니라, 반칙이 없고 사회적 약자를 우선하고 인권을 지키는 사회가 옳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정치를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노태우 정권 때 학생 운동을 시작한 후 6명의 대통령을 접했다. 그동안 내가 싸운 건 대부분 공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 문제였다. 그때마다 공권력의 민낯을 접했는데, 대통령이 누구인가에 따라 많이 다른 걸 봤다. 김대중 정부 탄생 후부터 10년간은 방패나 방망이로 진압한 것이 그전에 비해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2005년 대추리 같은 문제는 컸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윤 일병들'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현실이기에 고 씨에겐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 고 씨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억울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싶다. 네트워크를 만드는 운동이다. 예컨대 군 유족과 또 다른 군 유족을 연결해 서로 협의할 수 있게 하고, 그분들에게 전문가 그룹이 필요할 때 변호사든 언론인이든 연결해주는 식이다. 그렇게 조직된 시민들의 모임을 만들면서 우리 사회에서 연대 운동을 항구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군 관련 법안을 통과시킨 후 이걸 꼭 해보고 싶다. 재밌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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