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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 제대로 한 적 있나? 투항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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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투쟁 제대로 한 적 있나? 투항 아닌가?

[김민웅의 인문정신] 정치의 진정한 복원이란

투쟁하지 않겠다는 야당

그 말대로의 정세인식이라면 우려가 실로 깊어진다. 새정치연합의 비대위원장 박영선의 첫 기자회견 발언은 “투쟁정당 이미지에서 벗어나 정의로움을 더욱 굳건히 세우는 일,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근간을 둔 생활정치의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낡은 과거와 관행“에 대한 척결의지를 밝히면서, 정의와 경제민주화, 복지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말이다. 여기에 ”생활정치“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정치가 국민의 삶과 밀착하겠다는 의도를 보인 것이라고 해석해도 별 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위기에 빠진 야당이 잘 해보겠다는 것이니 뭔 다른 토를 달겠는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낡은 과거와 관행으로 지목된 내용이 “투쟁 정당 이미지”다. 이 말은 이미지라고 했으니 사실은 별반 투쟁적이지도 않은데 괜스레 투쟁적으로 비치고 있는 게 (솔직히 말해) 손해라는 뜻이기도 하고, 투쟁 일변도 정치라는 것을 벗어나겠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투쟁은 앞으로 별로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요점이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이건 이미지의 문제일까, 아니면 실제적인 문제일까? 다시 말해 진실은 그게 아닌데 단지 이미지 차원의 오해가 있다는 말인가, 또는 실제로 투쟁을 하다 보니 정치적으로 국민적 지지가 떨어졌다는 진단인가?

우선 이미지부터 말해보자. 서 있는 입장에 따라 이미지의 형성은 다양할 것이다. 누구는 투쟁적이라고 할 것이며, 누구는 투쟁적이기는 커녕 순치된 약체정당이라고 여길 수 있다. 여기서 그 다음 던져야 할 질문은, 그러면 투쟁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에 있다. 박영선 비대위원장의 논법은 “투쟁”이라는 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아니라면 그걸 낡은 과거와 관행의 모습으로 지목할리 만무할 테니 말이다. 결국 야당의 정치적 정체성에서 투쟁은 이로써 배제되는 것이다. 박영선의 인식으로 보자면, 투쟁은 낡고 나쁜 것이니까.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이 5일 오전 국회 당대표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유기홍 수석대변인, 김영록 원내수석부대표, 박 위원장, 유은혜 원내대변인. ⓒ연합뉴스

뭔 투쟁을 하셨길래?

현실은 어땠는가? 그동안의 새정치연합의 정치는 결코 투쟁적이지 않았다. “투쟁정당 이미지”라기보다는, 하다말고 하다마는 식의 되풀이로 야당이라는 정치적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온 힘을 기울여 싸워야 할 때 그렇지 않았고,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 침묵했다. 이건 무책임과 정치의식의 부재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집권세력에 대한 대안정당이라는 신뢰를 만들지 못한 것이다. “와 싸움 한번 제대로 하는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 적이 그간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거 한번 확실하게 밀어줄만 하네”, 하는 흥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자기 편도 그런 감동을 주지 못하니까 적극 지지자들조차 돌아선 것 아닌가?

김한길-안철수 지도부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거의 모두 여기에 모아진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국정원 대선 개입공작에 대한 대응도 그랬고, 최근의 세월호 진상규명작업도 다르지 않았다. 결기있게 권력의 부정과 기만에 대해 치고나가는 전투력은 부재한 상태에서 별로 절박한 기운도 없이 기세를 세우는 듯 하다가 주저앉고 그러기를 몇 번인가? 시청광장 앞의 천막당사도 용두사미(龍頭蛇尾)였다. 그러니 여당에게 깔보이는 것이다. 정치협상과 합의는 강력한 정치적 전투력이 전제되어 있지 못하면, 성사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집권세력이 야당에게 장외로 나가지 마라 운운하는 것이다. 이는 전투력 약화를 노린 논법이다. 장외란 현장과 만나는 일인데, 집권세력으로서는 상대가 거기서 힘이 생기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이들은 야당이 직접 민주주의의 역량과 만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박영선 비대위원장은 “이순신 장군 심정”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연일 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영화 “명량”의 메시지를 잘못 읽어도 한참 잘못 읽었다. 그 어떤 것도 유리한 게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이순신 장군이 오로지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아 사람들이 그리로 물밀듯 밀려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귀한 투쟁력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투쟁 포기선언을 하는 정당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정의가 정치적 투쟁의 힘이 없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상대인 새누리당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세월호 사건 그거 교통사고잖아, 세월호 정국 답답하다, 그 때문에 국회가 마비다, 세월호 유가족 저런 노숙자 같은...., 돈이 어디 있냐, 이 보상 배상 다 해주려면 국민들이 동의해줄까?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나잖아, 사법체계 망가져” 이러면서 거짓말도 하고 세월호 유가족을 모욕하고 상처주고 짓밟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야당 130여 명이 펄펄 뛰고 난리를 쳐야 옳은 게 아닌가? 그래서 새누리당이 “아이쿠, 정말 잘못 했습니다”, 하면서 어떻게든 국민들 눈치 보면서 상황 수습하느라고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 딴 소리 못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순신 장군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이게 투쟁력이다. 그런데 그걸 놓겠다는 것은 누구 좋으라고? 지금 세월호 유가족들은 20일이 넘는 단식에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데 당을 추스린다면서 세월호 특별법 손 놓고 있지 않은가? 시민들은 길거리에서 함께 단식하고 농성하고 있는데, 야당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그나마 지금까지 투쟁이라고 하면서 단식, 농성, 청와대 항의 방문 다 잘못한 걸로 치면 이제 뭘 하겠다는 건데?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은 군 병사살인사건이 나자 치를 떤다고 했는데, 세월호 참사에는 그런 치를 안 떠나? 3백 명 이상의 아이들이 구조행위에 나서지 않은 정부에 의해 죽고 말았는데 야당도 치를 떨면서 정치적 폭동이라도 일으켜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서 정치적 폭동이라 함은, 야당 130여 명이 모두 광화문에 집결하든지 청와대 앞에 모이든지 해서 절대 가만히 있지 못하겠다, 끝까지 책임 묻겠다, 진상규명 권한 없는 진상조사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이렇게 하면서 강력하게 규탄하고 엄청난 투지를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기소권, 수사권 주면 사법체계 망가진다, 삼권분립 어쩌네 하면, 너희들은 국가개조 하겠다며? 이건 삼권분립 논리가 아니라 삼권공조체제로 총체적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응징으로 해결해야 해, 하고 온 세상이 시끄럽게 난리를 피워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아, 저들은 이토록 비극적인 일을 겪은 국민들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구나, 오늘의 이순신이구나, 이러면서 생각을 달리 먹을 게 아닌가?

어두운 시대는 어떻게 오는가?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Men in the Dark Times)>에서 “암담한 시대”란 “공적 영역의 소멸과 함께 사람들이 사적인 삶에만 관심을 갖게 될 때” 온다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공적 문제를 논할 수 있는 정치가 사라진다”고 갈파한다. 더군다나 이런 시기에 권력은 “진실을 하찮은 문제처럼 만들어 버리고”, 사람들은 자기 문제 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면서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정말 중요한 문제에 대한 판단력이 마비되고 그 결과는 비극이 된다고 경고한다. 이건 지금 우리의 상황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분석이다. 진실은 자꾸 하찮은 것처럼 밀려나고 있다.

뭔가 문제가 생겨서 그걸 공적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정치가 제대로 가동하고, 그 가동의 과정에서 치열한 투쟁도 벌어져 대치와 갈등을 거치면서 어떤 해결점에 도달할 때 인간의 삶은 진보하게 되어 있다. 아렌트는 핍박받는 이들에게 공적 목소리가 박탈되는 상황은 정치의 붕괴이며, 이로써 이들은 그 사회에서 내부적 이민자처럼 취급받고 주변부적 존재가 되고 만다고 말한다. 2중적 고난을 겪는 것이다. 오늘날 세월호 유가족은 바로 이러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로 말하고 행동하고 정치의 주체로 참여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이러한 정치의 붕괴는 세월호 유가족에들에게만 한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은 이들에게도 확산된다. 이 정도의 강도를 가진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의 현실도 제대로 정치화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형편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정치가 정당의 정치인들에게만 독점되고 보통의 시민들에게는 정치적 발언권과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봉쇄되어 있게 되면, 결국 공적 영역은 집권세력에게 장악되어 정치는 소멸되고 만다. 따라서 박영선은 정치가 일상생활이 되는 공적 영역의 복원을 주장해야 했던 것이다. 이 나라 시민이면 누구나 권력에 대해 비판적으로 발언하고 정책의 결정에 대해 정보가 충분히 공급되며 참여의 통로가 열려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민주정당의 역할이다. 이런 상황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권력의 봉쇄전략에 맞서서 시민들의 공적 영역을 확장하는 야당의 치열한 투쟁이 있을 때 비로소 그나마 가능해지는 것이다. 투쟁력 없는 반대정당은 자신이 의식하건 말건 기존질서의 하부구조로 기능할 뿐이다.

지금 세월호 유가족을 비롯해서 이 나라의 정의가 올바로 서기를 바라는 이들이 얼마나 막막한 좌절감에 빠져 있는가? 아무리 외쳐도 도대체 요지부동인 권력 앞에 누군가 앞장서서 맹렬하게 싸우고 진두지휘까지 할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은, 그런 상황을 얼마나 애타게 기대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가?

고통받고 있는 타자 그리고 정치

일본의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가 근대적 자각을 하긴 했으나 제국주의의 역사에 대한 낮은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선 나카노 히사오(中野敏男)가 <오쓰카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大塚久雄と丸山眞男)>에서, 타자에 대한 책임있는 반응을 하는 문제에 대한 발언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경청할 가치가 매우 높다. 그는 고통받고 있는 타자의 출현이 우리 자신의 자아를 혼란에 빠뜨리고 그걸 통해서 그 자아가 위기를 겪을 때 비로소 중요한 정치사회적 변화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일본군에게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등장과 관련해서 “타자의 시선 앞에서 생기는 주체의 분열이 응답에 대한 절실한 희망을 낳아 타자에 응답하면서, 주체 안에서 생기는 분열과 항쟁은 한 개인을 벗어나 정치화되어 책임을 지는 사회적인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에 대한 윤리”와 유사한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대체 어떤 책임과 역할을 해야 하는가의 질문과 통한다.

정치는 바로 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배제한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권력게임에 불과하다. 자기들만의 리그인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정치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이 권력게임이지, 고통을 겪는 이들과 연대하면서 이들의 문제를 어떻게든 풀려고 하는 정치는 아니다. 바로 이러한 정치가 없어서 화를 내고 있고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작끄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교육이란 지식전달을 넘어서 정신구조를 형성하는 작업”이라는 말을 한 바 있다. 교육만이 아니라 정치 또한 그렇다. 잘못된 정치는 그 사회의 정신구조를 왜곡하고 퇴행시킨다. 그래서 무자각 상태로 이끌어 결국 비극을 반복하도록 만든다. 그렇지 않아도 새정치연합이 혁신이라고 든 깃발은 무자각이 도달한 낡은 방식이다. 최선을 다하는 정치적 헌신이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투쟁의 의지를 스스로 거세하고, 자기도 모르게 보수 세력에게 투항하고 있다. 그 투항의 공간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울부짖음은 더더욱 커질 것이다.

이들을 지켜내지 못하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그건 야만이다. 아이들의 구조요청을 철저하게 외면한 해경, 세월호 관리를 맡았다는 증거가 계속 나오는 국정원, 아무런 구체적인 구조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이 위기의 7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오리무중인 대통령, 이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그 까닭을 묻는 것은 국민들의 절대적 권리다. 모두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 권리 행사를 방해하거나 훼손하려는 자는 그 누구라도 국민의 목숨을 함부로 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자와 세력으로 판명해도 반론이 없을 것이다.

국민의 생명 위에 있는 그 어떤 정치도, 어떤 권력도 이 세상에는 없다. 그런 권력이 있다면 당연히 그건 단호한 투쟁의 대상 외에 다름이 아니다. 그래야 진정한 정치가 복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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