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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분노…그건 꺼지지 않는다"

[조합원, 다큐에 빠지다] ② <어머니><슬기로운 해법> 태준식 감독

지난달 26일 태준식 감독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조합원이 함께한 자리는 상대방을 다독이는 '힐링 캠프'였다. 이들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빙 둘러앉듯 간이침대와 바닥의자에 걸터앉아 3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다.

1995년 '노동자뉴스제작단' 활동을 시작으로 우리 사회 적폐를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는 태 감독은 '신나는다큐모임'과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기획한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전' 두 번째 주인공이다. 4일에는 8개의 단편과 <인간의 시간>(2000)이, 18일에는 <샘터분식>(2008)과 <슬기로운 해법>(2013)이 각각 상영된다.

▲ 태준식 감독. ⓒ프레시안(이명선)

<슬기로운 해법>에 조인트 까이다!

<슬기로운 해법>은 태 감독이 연출가로 고용돼 처음 한 작업으로, 보수 언론의 보도 행태를 고발한 다큐멘터리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언론담당관이었던 김성재·김상철 씨가 공저한 책 <야만의 언론>(책보세 펴냄)을 바탕으로, 홍세화 <말과활> 발행인·정연주 전 KBS 사장·사진작가 노순택·전홍기혜 <프레시안>편집국장·주진우 <시사인>기자·한윤형 <미디어스>기자·이창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등이 출연했다.

▲ 태준식 감독은 <슬기로운 해법>에서 '나의 입장'이라는 식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입장에서 언론과 재벌에 대한 문제가 한 번이라도 더 드러나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주)시네마달
"<슬기로운 해법>은 조중동 문제를 전면화했다는 데 가치가 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을 미화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지만, 정치인 중 언론과 싸움을 한 유일한 사람이기에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언론과 잘 싸웠느냐, 못 싸웠느냐는 다른 문제다. 오히려 자신의 임기 중 조중동과 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패악(悖惡, 왜곡 보도)이 나왔다고 볼 수도 있다."

논란이 있는 작품인 만큼, 태 감독은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제작사에 고용돼서 작품을 만들긴 했지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회피한 것은 아닐까?" 하는. 그는 "작업 과정에서 정치적 입장을 배반하면서까지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노무현의 죽음' 자체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한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언론을 주제로 오롯이 자신의 생각이 담긴 다큐를 만든다면 "<슬기로운 해법>과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태 감독은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전' 관련 자료에서 자신의 다큐 인생을 '변명과 핑계의 연대기'라고 정리했다. 특히 "<슬기로운 해법>은 '작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허무한 욕망을 포기하게 만든 작업"이었다며 활동가와 감독 사이의 어설픈 줄다리기를 끝냈다고 했다. <슬기로운 해법>은 엉뚱한 방향에서 감독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셈이다. 섬광처럼.

"분노, 그건 꺼지지 않더라"

"대학에서 빨간 선배를 만나" 다큐멘터리를 찍게 됐다는 태 감독은 "좋은 세상이 오면 동물과 자연을 소재로 한 다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좋은 세상이 안 오니까" 당분간은 노동자와 약자를 위한 다큐를 만들 수밖에 없다.

"이 노동자의 이야기, 이 싸움은 누군가는 분명히 해야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있다. 지금도 그 생각은 옅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분노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권력층의 알량한 횡포 등 모든 것에 분노를 느낀다. 그건 꺼지지 않더라."

▲ 태준식 감독의 작품은 현장 지킴이다. 1990년 울산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을 다룬 <노동자뉴스 제5호>가 그랬고, <인간의 시간>이 그랬고, 그 외 많은 작품이 현장을 지켰다. 최근 개인 사정으로 현장을 자주 못 나간다는 태 감독, 찡긋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 답답해요." ⓒ태준식

태 감독은 분노를 고스란히 작품에 담았다. 때로는 <인간의 시간>처럼 처절하게, 때로는 <샘터분식>처럼 부드럽게. <인간의 시간>은 1998년 현대중기 노동자들의 450일 농성 투쟁을 다룬 작품이다. 그는 <인간의 시간>에서 "나이 든 노동자를 통해 '생(生)'이라는 시간의 무한함"을 배웠다고 했다.

<샘터분식>은 2000년대 중반 사실상 비정규직 차별법인 '비정규직 보호법'을 추진하던 노무현 정부에 분노했고, "이른바 (연출된) 영화를 만들어 치유 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든 다큐다. 당시 태 감독은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이겨내지? 어떻게 일상을 유지하지?"라는 생각으로 '순리(順理)'를 가장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순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순리보다 더 큰 흐름이 분명히 있다. 봄이 되면 꽃이 피듯, 사람들이 미친 쇠고기가 싫다고 광장으로 뛰어나온 것도 큰 의미의 순리다. 다만, 다큐를 만들 때 꼭 순리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하면 중간 중간, 순리를 이겨 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억지로 결정하려 하지 않는다. 흐름에 맡긴 채 순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해?"

고(故) 이소선 여사의 마지막 2년을 담은 <어머니>(2011)는 "스스로의 피곤함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시절,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찾아든 피난처였다.

"<어머니>는 굳이 완결성 있는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래 찍으면서 관계를 형성하는 게 중요했고, 그만큼 카메라는 등장인물과 밀착해 있어야 했다. 당시 조감독이었던 손경화 씨와 많은 얘기를 하며 진행했다."

▲ <어머니>에는 팔뚝질과 투쟁가 대신 가수 이아립 씨의 노래가 흐른다. '바람의 왈츠'는 말한다. '바람의 소리를 들어요. 바람의 다리를 지날 때 피고 지고 울고 웃던 순간을 기억해요.' ⓒ태준식

태 감독의 카메라는 노래 가사처럼 '울고 웃던 순간의' 이소선 여사를 기록했다. <어머니>의 기획 의도는 이소선 여사를 '노동자의 어머니'가 아닌 '모든 이의 어머니'로 그리는 것이었다. 그는 대여섯 달 동안 카메라도 없이 이소선 여사 방을 드나들었다. 담배 심부름도 하고, 약 심부름도 하고. 카메라로 찍기 시작하면서는 이삼일에 한 번 씩 찾아가 옛날이야기를 들춰냈다.

이소선 여사는 <어머니>에서 큰 아들(전태삼 씨, 전태일 열사의 형)과 자기 집이 아닌 한 데에서 오줌을 싸는 개 이야기도 하고, 노동조합 관계자가 보내준 동전으로 소일거리 삼아 고스톱도 친다. 그러나 "더 놀다 가지"와 "자주 찾아뵐게요"라는 관계 속에 느닷없이 죽음이 끼어들었다. 촬영 1년여 만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은 2011년 9월 3일 발생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소천(所天)했다.

"<어머니>와 <당신과 나의 전쟁>(2010)은 주인공들의 '죽음'으로 호명(呼名) 받았다. 나 역시 (죽음에 대한 분노, 패배에 따른 절망 등이) 많이 쌓여 있다. 그래서 주변의 죽음을 겪고도 여전히 활동하는 사람을 찍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에게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해?'라고 묻고 싶다. 그러나 그의 삶도 정답은 아니다."

<당신과 나의 전쟁>은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옥쇄파업을 다룬 다큐다. <어머니>처럼 죽음이 작품 중심에 자리해 있지는 않지만, 파업 철회 후 지금까지 25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태 감독은 노동자 한 명이 죽을 때마다 <당신과 나의 전쟁>이 상영됐다고 말했다.

▲ 2009년 8월 6일, 77일간의 쌍용차 옥쇄 파업이 철회됐다. '함께 살자'는 노동자의 외침은 이뤄지지 않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노조에 지지 않는다'라는 정부와 사측의 원칙만 확인됐다. 해고자들 사이에서는 죽어도 기억될 목숨이 아니라는 패배 의식이 돌림병처럼 번졌다. ⓒ프레시안

노동자가 죽어도 약자가 고꾸라져도 변화는 더디다. 그럼에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라는 우문에 '어머니'는 늘 현답을 내놓는다. 이소선 여사가 <어머니> 32분 45초경, 35m 높이의 85호 크레인에 올라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를 주장하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 본부 지도위원을 걱정하며 한 말을 현재 시점으로 옮겼다.

"(세월호 특별법 관련해) 언제까지 기한이 있다면 기한이 기다리고 있지만, 기한이 없으니까 얼마나 초조하겠나? 그러니까 몸만 다 상하고 마음도 상하고 신경도 쓰고 있고 그러니까 사장은(정부는) 언제 해준다는 것도 없고 … 그러니까 내가 염치가 없어 '힘내라'라는 말이 안 나온다. 뭘 보고 지금 힘을 내라고 하나. 그래도 힘을 내야 되지. 힘을 안내면 죽잖아. 독한 마음 먹고 (국회까지) 올라갔으니, 힘내서 끝까지 이행해야 하는데, 지금으로 봐서는 참 답답하고. 다른 사람이 볼 때도 답답한데, 본인은 몇 배나 더 답답할지. 본인은 정말 어떨 때는 천불 날 때도 많을 거고."

▲ 태준식 감독의 작업실은 서울 종로 낙원상가 부근에 있다. 개발이 살짝 빗겨간 '피맛골', 노인들의 천국 '파고다 공원'이 있는 오래된 건물. 태 감독은 그곳을 '좀비 소굴'이라고 했다. 그래서 더 편안했다. 권위적인 '감독'이 아닌 '활동가'이자 '예술가'를 만나 더 편안했다. 사진 왼쪽 태준식 감독을 시작으로, 박민미·김다현·황용운·신태현·정신영숙 조합원이 이날 인터뷰에 참여했다. ⓒ프레시안(이명선)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한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전'에 소개된 다큐멘터리 감독을 매월 인터뷰합니다. 다큐 감독전은 '신나는다큐모임'과 독립 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기획했으며, 해당 감독의 작품은 오는 12월까지 매월 둘째·넷째 주 월요일 오후 6시와 8시에 상영됩니다. 보다 자세한 정보는 http://indiespace.kr/1884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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