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냉전 종식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는 가운데, 또 하나의 중대 변수가 등장했다. 미국이 러시아가 중단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금지한 조약을 위반했다며 항의하고 나선 것이다.
1987년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중단거리 핵미사일 폐기 조약(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 INF. treaty)'에서는 사거리 500~5500km의 지상 발사 탄도 및 순항 미사일의 보유·실험·배치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약은 공중 및 해상 발사 미사일은 허용하고 있다. 이 조약은 특정 무기의 완전한 폐기를 명시한 것으로 평화로운 냉전 종식을 가능케 한 이정표로 평가받아왔다.
1991년 '조지 H.W 부시 행정부의 한국 내 전술핵 철수→노태우 정부의 핵무기 부재 선언→남북한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및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으로 이어진 '코리아 데탕트'도 이 조약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는 곧 INF 조약이 위기에 처하면 그 파장이 전지구적으로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바마, 푸틴이 INF 조약 위반
28일 자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의 지상 발사 순항 미사일 시험 발사는 INF 조약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존 케리 국무장관이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에게 항의 전화를 한 데 이어, 28일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블리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신문에 따르면, 오바마 행정부는 2011년에 러시아의 순항 미사일 시험발사를 포착하고는 이러한 행위가 INF 조약을 위반한 것인지에 대한 내부 검토에 들어갔다. 2013년 5월에는 러시아에 우려를 전달했고, 올해 1월에는 나토 동맹국들에도 이러한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의 조약 위반 여부에 대해서 유보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미·러 관계를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국의 분위기가 바뀐 결정적인 이유는 우크라이나 사태 악화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가 크림반도을 병합한 데 이어 우크라이나 반군을 지원하고 이 와중에 민간 항공기 피격 사건까지 벌어짐에 따라, 대(對)러시아 강공 모드로 전환하고 있다. 러시아의 INF 조약 위반은 러시아를 압박할 수 있는 카드이자 러시아 제재 부과에 주저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렛대의 성격을 띠고 있다. 러시아의 중단거리 미사일 시험에 일차적인 위협을 느낄 당사자들은 유럽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오바마 행정부는 최근 외교안보관계 장관 회의를 열고 러시아가 INF 조약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신문에 따르면, 국무부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 발표도 준비 중이다. 미국의 대러 압박이 한층 강화될 것임을 예고해주는 대목이다.
MD 반대로 맞불 놓는 러시아, 결국 신냉전으로?
주목할 점은 러시아가 미국도 INF 조약 위반 혐의가 있다며 맞불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러시아에 조약 위반 문제를 제기하자, 러시아는 미국이 루마니아에 이지스함을 배치하려는 계획을 문제삼았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러시아의 논리는 미국이 이지스함을 이용한 해상 미사일방어체제(MD) 실험에 요격 대상 미사일을 동원했는데, 이 미사일이 INF 조약이 금지한 미사일 아니냐는 의혹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의 주장이 물타기에 불과하다며 일축하고 있지만, 그리 가볍게 넘길 문제는 아니다.
미국이 유럽 MD 계획을 강행하자, 러시아는 MD 시설을 겨냥한 중단거리 미사일을 재배치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놨었다. 필요하다면 INF 조약에서 탈퇴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내놨었다. 이를 놓고 볼 때, 러시아의 순항 미사일 시험 발사는 양수겸장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미국 주도의 유럽 MD 철회를 요구하는 무력시위이자,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중단거리 미사일 배치도 불사하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푸틴 정권은 INF 조약을 못마땅해한다. 미국에 비해 재래식 군사력이 크게 뒤지고 미국이 MD에 박차를 가하는 상황에서 중단거리 미사일은 이를 만회해줄 '이퀄라이저'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푸틴은 조약 준수를 다짐하면서도 "논쟁적인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러시아의 위반 혐의를 대러 카드로 이용하면서도 자국은 INF 조약을 준수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미국도 이 조약에 구애받지 않고 맞불을 놓으면 울고 싶은 푸틴의 뺨을 때려주는 격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INF 조약이 유지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MD와 공격용 미사일 사이의 군비경쟁이 본격화될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러시아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핵미사일 위협을 이유로 유럽 MD 배치를 강행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란은 구실일 뿐, 실질적인 미국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다고 본다. 미국이 MD를 앞세워 전략적 우위를 확고히 하는 한편, 과거 소련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동유럽 및 구소련 소속 국가들로까지 나토 동진을 감행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푸틴이 중단거리 미사일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실 미·소 간의 데탕트는 1972년 탄도미사일방어(ABM) 조약 체결에서 비롯됐다. MD 구축을 자제키로 함으로써 공격용 무기도 제한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신데탕트 및 냉전 종식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이 전략방위구상(SDI)를 사실상 보류하면서 INF 조약도 가능했고, 이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도 가져왔다.
신냉전을 막을 수 있는 길도 여기에 있다. 미국이 MD를 자제해야만, 러시아에 INF 조약을 비롯한 공격용 무기 제한 조약의 준수를 요구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 점이야말로 냉전의 역사가 오늘날의 미국에 전해주는 핵심적인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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