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민 변홍철 씨(45)는 최근 청도군민이 됐다. 각북면 삼평리의 농촌마을 주민으로 전입신고까지 마쳤다. 그렇다고 귀농을 한 건 아니다. 2년여 맡은 '청도 345kV 송전탑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의 사회적 책임을 비로소 성문화한 셈이다. 외부인이 아닌 당당한 삼평리 주민으로 마을 안에 배수의 진을 쳤다. 아예 끝장을 보려고 작정했다.
"밀양처럼 당하지 말아야죠. 무지막지한 행정대집행부터 대비할 겁니다. 사전에 통보는 해준다지만 믿을 수 없어요. 밀양이 마무리되면 다음은 삼평리 차례일 게 뻔해요. 대안 없는 어떤 공사도 재개는 안 됩니다. 이제 저도 지원하는 외부인이 아니라 삼평리 주민으로서 함께 끝까지 싸울 거예요. 앞으로 밀양 주민들과 연대도 필요할 겁니다. 고려하고 있어요. 너, 나 없이 우리 모두 함께 살아야죠."
그는 현장의 투사보다는 서정적 시인에 가까운 인상이다. 하지만 언뜻 내비치는 투쟁의 결기가 예사롭지 않다. 결코 평탄하거나 범상치는 않았을 삶의 궤적을 눈치챌 수 있다.
마을운동가 변홍철
삼평 주민들은 송전탑을 받아들일 수 없다. 23호기 공사장 진입로에 5m 높이 망루를 세우고 마을을 지키고 있다. 송전탑 반대 고공농성까지 불사하고 있다. '인권운동연대', '대구여성노동자회' 등 18개 시민단체가 모인 '대구민중과함께'도 삼평리 주민들과 송전탑 반대 고공농성을 함께 하고 있다. 변 씨가 그 중심에 있다.
"22호기 부지가 있는 노인봉은 상서로운 터예요. 옛날부터 기우제를 올리거나 자식을 점지해달라고 기도하는 자리였다네요. 마을 할머니들에게는 그 자체가 신앙이자 자존심이었던거죠. 그런데 노인봉에서 수차례 발파작업이 있었던 직후 큰 우박이 쏟아졌어요. 과수, 양파 등 마을 1년 농사를 망칠 정도로 피해가 엄청났고요. 또 24호기 철탑은 당산나무에서 올려다보이는 바로 뒷산에, 마치 마을을 제압하는듯한 기세로 세워졌어요. 요즘도 당산나무 앞에서 할머니들은 간절히 기도해요. 송전탑 공사로 입게 될 재산상 손해, 물리적 피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에요. 감히, ‘사람이 손대서는 안 되는 것’을 범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근원적 두려움이죠."
변 씨는 마을 할머니들의 이런 두려움을 자기 일처럼 공감한다. 비과학적인 미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인봉과 당산나무는 마을주민들의 삶과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평생 땅을 일구며 자연과 이웃에 서로 기대 목숨을 부지해온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에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그리고 사람과 마을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서로 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연약한 할머니들은 정부나 공권력과의 싸움이 두렵지 않다.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순정한 믿음이다. 그런 지혜로운 통찰력, 심오한 공경심이 전투력의 밑바탕이다. 삼평리 할머니들의 저항은 상부나 외부의 오만과 불경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고 있다.
변 씨가 삼평리 주민이 되기로 한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천왕당 큰할아버지, 당산 작은할아버지, 여기에 철탑이 안 들어오게 꼭 막아주이소. 이 동네를 지키주이소” 하고 날마다 빌고 비는 할머니들을 그가 지켜주고 싶기 때문이다.
마을정치인 변홍철
'늦깎이 정치지망생이 된 아나키스트'. 지인들은 변 씨를 이렇게 부른다. 대구경북민중 언론 <뉴스민>에 따르면 그는 녹색당을 창당하고 공동정책위원장을 지냈기 때문이다. 그가 몸과 마음을 내주고 있는 녹색당은 개별적으로도 특별한 경험이고 존재다. 아나키스트에서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그는 이렇게 설명하곤 한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말을 그대로 빌린 정치관이다.
"우애의 정치죠. 현실 정치에서 표는 되지 않지만 눈앞의 이익을 넘어서서 목소리가 없고, 얼굴이 없는 존재를 대변하는 것이 녹색당이 해야 할 우애의 정치예요."
무엇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그에게도, 녹색당에도 결정적인 정치적 결심과 결행의 계기로 다가왔다. 그래서 녹색당이 창당됐고, 그는 <어린왕자, 후쿠시마>라는 시집을 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변신했다. 사회적으로 진화했다.
"녹색당 창당의 가장 큰 계기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였어요. 핵은 우리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고, 이 문제를 정치가 다뤄야 한다는 각성을 새로 하게 된 거죠."
애초 그는 '아나키스트적'인 정치성향의 소유자였다. 최소한 후쿠시마 사고 이전까지는 그랬다. 지난날 민주노동당의 당적을 가진 적도 있지만 정치를 하려는 마음을 따로 먹은 적은 없다. 하지만 19살 때부터 대학 후배로서 그를 지켜본 부인 오은지 한티재대표는 남편이 변한 게 아니라고 증언한다.
"우리 둘 다 녹색당 가치에 동의하고 정당에서 정치활동 하는 것에도 거부감은 크지 않았어요. 남편은 그냥 자기가 ‘옳다’, ‘바르다’ 생각하는 건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죠. 정당에서도 정치인의 역할을 요구받고, 그게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판단하면 피할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어요."
정치지망생 말고 변 씨의 사회적 역할을 설명하거나 수식하는 직책은 또 있다. 성격은 다종다양하고 이름은 재미있다. <어린 왕자, 후쿠시마 이후> 시집을 펴낸 시인, 석유시대 이후의 새로운 삶과 교육, 정치를 연구하는 '하이하버연구소' 소장, 기도와 공부와 행동을 위한 대구지역 청년들의 생태모임 '땅과 자유' 운영위원, <녹색평론> 전 편집장 및 주간, 청소년 인문학 모임 '강냉이(강인하고 냉철한 이성)' 강사, 그리고 도서출판 '한티재' 기획위원. 오지랖이 넓다.
마을출판인 변홍철
오늘날 변 씨의 정체성이나 인생은 <녹색평론>과 분리될 수 없다. 편집장과 주간을 지냈다. 현재 한티재 사무실이 1991년 11월 <녹색평론>이 창간된 곳일 정도다. 일찍이 군복무시절 정기구독자로 <녹생평론>과 인연을 맺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대안교육 전문 출판사에서 일하던 중 불교잡지에 귀농 관련 글을 기고한 게 발단이 됐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글을 보고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그 길로 대구로 내려와 <녹색평론>이 서울로 이사 갈 때까지 꼬박 11년을 함께 일했다.
그는 <녹색평론> 시절을 '다분히 관념적이었다'고 자평한다. 생태주의적 세계관, 철학적, 윤리적, 인문학적 관점의 녹색담론으로 세상과 사람들에게 접근했을 뿐이다. 관념에서 현실로, 현장으로 한발 더 다가선 건 2003년 무렵이다. 지역 청년들과 생태모임 ‘땅과 자유’를 만들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현실 영역, 정치 영역으로 넘어왔다고 술회한다. <녹색평론>의 인문학적 언어를 운동의 언어, 정치의 언어로 번역해서 현실정치로 만들어보자는 뜻이 컸다. 2003년 이라크 파병 반대, 2005년 쌀 개방 반대-우리쌀 지키기 운동, 2006년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등 '실천하는 운동의 현장'에 늘 함께 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더 치열하게 실천할수록 운동의 한계를 느꼈다. 신념을 지키는 소수엘리트 위주의 선도적 운동방식은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이 같은 고민은 결국 그를 현실정치로 이끌었다.
"녹색당 창당 과정에 참여한 건 어쩌면 자연스러웠어요. 아무리 우리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340조 원에 달하는 국가 재정이 잘못 사용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우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풀뿌리도, 땅도, 공동체도 다 무너지고 마는 것 아닌가요. 이런 구조를 바로 잡지 않고서 우리 신념만 가지고 있는 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정당이 필요하구나. 국가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이른바 보수 양당은 말할 것 없고 진보정당도 이념과 진영논리에 치우쳐 있어요. 공동체의 가치가 실현된 국가란 어떤 모습인지 잘 이야기하지 않아요. 잘 모를 수도 있을 거예요. 녹색당의 정치는 세계적 차원에서 진정한 리얼리즘에 입각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녹색공화국 정도가 되겠죠."
마을시인 변홍철
그는 시인이다. 대학 시절부터 틈틈이 써온 시들을 모아 시집도 엮었다. “그의 시는 복잡하게 언어를 얽어 짜거나 의미를 비틀지 않는다. 쉽게 읽힌다고 할 수 있을 정도지만, 그 감각이 맑고 천진해서 쉬워 보이지 않는 매력이 있다”고 발문은 칭찬하고 있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시 <어린 왕자, 후쿠시마 이후>는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참변에서 희생된 어린 생명에 대한 연민을 담았다. 그런데, 그 시에는 세월호가 잠긴 진도 팽목항 앞바다도 보이는 듯하다. 이렇게.
야윌 대로 야윈 일곱 개 손가락
이 손으로 피아노도 칠 수 있어요
아이는 쑥스러운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다른 쪽은 단풍잎 같은 지느러미
나는 아이가 건너왔을 캄캄한 바다를 상상해 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아이의 가슴에는
고향의 저녁놀이 가만히 출렁거렸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멍자국인 줄 알고 놀랐다
뒤척이는 아이를 다독거리다
아이의 상체가 유리상자로 되어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눈치챘다, 다시 보니 거기 담긴 것은
검붉은 낙엽들 같기도 했다
얼마나 용을 썼으면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젖지도 않았을까
그래, 그래, 애썼다
이제 한숨 자 두렴
우리는 흙으로
아이의 투명한 몸을 조용히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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