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노조 경영을 고수해 온 삼성에 처음으로 노사 임금·단체 협약(이하 임단협)이 생겼다.
전국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전자제품 유지·보수 업무를 하는 하청 노동자들로 구성된 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이하 지회)는, 28일 오후 조합원들이 속한 46개 하청사들과 향후 체결할 임단협의 기본 얼개가 될 '기준 협약'을 사측과 타결했다.
이는 지회가 △ 노동조합 인정 △ 생활임금 보장(임금 체계 개편) △ 위장 폐업 철회 및 고용 보장 등을 내걸고 파업에 돌입한 지 41일 만이다. 고(故) 염호석 양산분회장이 '승리한 후 정동진에 뿌려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지 43일 만이기도 하며, 노조 설립 350일 만이기도 하다.
지회 측 교섭단은 앞서 지난 27일 삼성 측과 핵심 쟁점에서 의견 합의를 이루었으며, 28일 오후 7시께 이에 대한 조합원들의 최종 의사를 묻기 위해 찬반 투표를 진행했다. 투표 결과, 1500여 명 조합원 중 쟁의권을 가진 조합원 982명 가운데 610명이 투표에 참여, 534명(투표 인원 대비 87.5%)이 찬성해 '기준 협약'안이 가결됐다고 금속노조는 밝혔다.
금속노조는 가결 직후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서 각 하청업체의 교섭권을 위탁받은 한국경영자총협회 측과 조인식을 진행했다. 조인식까지 마무리됨에 따라 지회는 오는 30일, 염 분회장의 유서에 따라 강원도 정동진에서 노제를 치르기로 했다.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앞 노숙 농성장은 그때까지 당분간 유지한다.
노조 설립에서 파업, 단협 체결까지
삼성전자서비스에는 지난해 7월 14일 금속노조 산하 지회가 설립됐으며, 지회는 이 직후 하청 업체들에 임금·단체 기준 협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요구했다. 그러나 교섭은 공전을 거듭했으며 지난해 9월부터는 각 센터 사장들이 하나둘 경총에 교섭을 위탁해 왔다.
이즈음에는 지회 천안분회 소속 최종범 씨가 '배고파서 못 살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해 약 두 달간 '열사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가 자결한 날짜는 지난해 10월 30일이다.
올해 3월에는 노조 활동이 특히 활발했던 해운대 센터와 아산, 이천 센터가 돌연 폐업해 해당 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순식간에 일자리를 일었다. 이에 대해 지회는 "노조 활동 위축을 위해 삼성이 기획한 '위장 폐업'이라"고 주장해 왔다.
폐업과 함께, 당초 100% 성과급 임금 체계인 '건당 수수료' 제도를 안정적인 생활 임금이 보장되는 기본급 중심의 임금 체계로 개편하려는 노 측 교섭 요구안에, '폐업 센터에서 고용 보장'이란 새 쟁점이 추가됐다.
노사가 풀어야 할 문제가 쌓여갔지만, 그럼에도 교섭은 특별한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렸고, 금속노조는 결국 지난 4월 경총과 교섭 중단을 결정했다.
이로써 전면 파업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생긴 고 염호석 양산분회장의 자결과 그의 부친 주도로 유언에 어긋나게 강행된 장례, '시신 탈취'로 표현되는 경찰의 장례 개입은 노사 갈등의 불씨를 키웠다.
지회는 지난달 19일 '전면 파업'을 선언하고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무기한 노숙 농성에 돌입, 28일까지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비판하는 선전전을 중심으로 파업 투쟁을 전개해 왔다.
현재까지도 염 분회장의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울러 노조 핵심 간부인 위영일 지회장과 라두식 수석부지회장도 여전히 구속 상태다.
120만 원 기본급 신설, 폐업 센터 고용 보장 등 성과
이날 타결된 '기준 협약'으로 지회 조합원들은 120만 원의 기본급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는 기본급이 아예 없이 수리 한 건당 정해진 수수료를 받는 방식, 즉 100% 성과급 임금 체계였으며, 이에 따라 '장시간 노동'이 필연적으로 발생해 왔다.
기본급이 신설됐지만 성과급 체계가 아주 폐기되지는 않았다. 노사는 실 수리 60건을 초과하는 1건당 평균 2만5000원을 지급하는 데 합의했다.
기본 건수 보장 문제에서는, 노사 '신의 성실의 정신'과 '상호 노력'에 따르는 것으로 합의해, 향후 개별 센터 차원의 노사 분쟁이 발생할 씨앗을 남긴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지회의 한 조합원은 "그렇기 때문에 기본 협약보다 앞으로 진행될 각 센터에서 임단협 최종 교섭이 더욱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노동조합을 노사가 인정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기본 협약에 따라 사측은 향후 타임오프(근로 시간 면제) 9000시간을 6명 이내에서 분할 사용토록 해야 하며, 지회 임원이 무급 휴직을 요청하면 이를 보장해야 한다.
노조 사무실 1개소에 대해 사측은 보증금으로 초기 비용 1억 원을 지원해야 한다고도 합의했다.
염 분회장의 사망과 관련해선, 삼성이 추후 "애도·유감·재발 방지 노력" 등을 언급하는 보도자료를 발표키로 했다. 이 보도자료에는 "교섭 타결에 대한 환영과 노사 관계 안정화를 희망"하는 내용 또한 담길 예정이다.
다만, 염 분회장의 사망을 촉발한 책임자 처벌 문제에 대해선, 해당 회사(양산 센터)의 노사 협의에 따라 적절한 방안을 강구하도록 했다. 이는 시각에 따라 '처벌되어야 할 책임자와 협의를 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폐업 센터에 고용 보장에도 의견 일치를 이루었다. "가급적 2개월 이내에 신설될 회사 또는 인근 회사에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조합원을 우선 고용"하기로 한 게 골자다. 협약 체결 날, 서초동 농성장에서 만난 한 해운대센터 조합원은 "이른 시일 내에 다시 벌이를 시작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금속노조 "부족하지만…이로써 지회, 단협 가진 '실제' 노조"
금속노조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삼성 자본이 인정하지 않는, 복잡한 하도급 체계의 가장 낮은 지위에 있던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노조를 인정받았다"며 "비록 단체협약 내용은 부족하지만, 이는 지회가 단협을 가진 실제적인 노동조합이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노조는 아울러 "삼성 자본에 촉구한다"며 "이번을 계기로 삼성에 자유로운 노조 깃발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노동자들의 생활을 파탄으로 내모는 위장 도급, 불법 파견 경영 방식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제고를 하기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숨길 수 없는 원청 지배력…시신 탈취 진상 규명 계속될까
이처럼 형식적으로는 최종 도출된 노사 기준 협약에 경총 측이 사인했지만, 이번 파업에서 역시 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력이 하청 업체들이 아닌 원청인 삼성에 있다는 것이 재확인된 것으로 보인다.
당장 논란이 됐던 이른바 '블라인드(비공개) 교섭' 방식부터 원청 사용자성을 삼성이 사실상 인정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불가피하다.
지회가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으나, 블라인드 교섭 상대는 삼성 측 인사였던 것으로 수차례 알려졌다.
특히 지난 23일 우원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 등과 면담한 후 "계속 비공개 교섭을 할 거면 전향적인 안을 내놓든지, 아니면 교섭 방식을 바꾸어 공개로 진행할 것을 삼성에 요청했다"고 밝힘으로써, 지회의 대화 상대가 원청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향후 염 분회장의 '시신·유골함 탈취' 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이 계속될지에도 관심이 모일 전망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앞서 해당 사건에 삼성이 개입했는지를 따지는 진상 규명을 진행할 것이라 공언한 바 있다.
□ 관련 기사 보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