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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정신'이 망친 나라…의무투표제 도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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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정신'이 망친 나라…의무투표제 도입해야"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권리만 찾으며 책임에 눈감는 사회

어렸을 때 한국인 스스로 비하하는 말이 많이 떠돌았는데, 그중 하나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것이었다. 젊은 독자들을 위해서는 설명이 필요하겠다. 전통시대에는 짚 태운 재를 물에 섞어 걸러낸 '잿물'을 세척제로 썼는데, 식민지시대에 공업제품 수산화나트륨(NaOH)이 들어오자 서양식이라고 '양' 자를 붙여 '양잿물'이라고 했다. 일상용품으로 쓰인 독극물이기 때문에 자살용품으로도 많이 쓰였다.

공짜 싫어하는 민족이 따로 있겠는가. 하지만 사실 우리 사회가 좀 심한 편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미군 지프차 따라 달리며 "헬로 헬로, 껌 하나만 주세요" 노래 부르던 식의 노골적 세태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면서 사라졌지만, 아직도 '공짜정신'이 사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구석이 많다.

세월호 사태의 원인을 여러 각도, 여러 층위에서 여러 가지로 짚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근본적 원인의 하나로 이 '공짜정신'을 짚어본다. 사업자나 승무원이나 해양경찰이나 그 밖의 관계자들, 모두 각자의 역할에 따라 수익을 올리거나 보수를 받는다. 그 수익과 보수는 공짜가 아니다. 역할에 따른 책임을 이행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데 따른 반대급부다.

그런데 그것을 공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책임과 임무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선장. 누가 선장 시켜줄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선장 모자 씌워주고 그 나이, 그 능력에 바랄 수 없는 박봉이나마 베풀어주니까, 선장 흉내 내러 나왔다. 진짜 선장의 책임과 임무를 떠맡을 생각도 없이 흉내만으로 그만한 대우를 받는 것을 '공짜'로 여겼던 것이다. 현장에 출동해 구경만 한 해경부터 '기념사진' 찍기에 바쁜 고관들, 최소한의 미봉책으로 빠져나갈 생각만 하는 대통령까지, 자신의 책임과 임무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의 이득과 권력을 '공짜'로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우리 사회의 특권구조에 대해 여러 방면의 치밀한 연구가 쌓여 왔는데, 나는 '공짜정신'이 특권구조를 지탱해준 중요한 한 축이라고 본다. 자기 일에 책임감을 갖고 성실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책임감 없이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엄격하게 비판하기보다는 "세상 일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하고 눈감아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사회풍토가 식민지시대 이래의 역사적 조건 위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인의 공짜정신을 대표적으로 지적하는 양잿물 얘기가 언제 만들어진 것이겠는가. 양잿물이 보급된 식민지시대의 일이다.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국가질서에는 상하 간의 상호적인 측면이 있었다. 신하가 신하 노릇 할 의무와 왕이 왕 노릇 할 의무가 서로 어울렸다. 어느 쪽에서 제 노릇 못할 때 피바람이 일어나는 일도 간혹 있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그런 험한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도록 은근한 힘이 평상시에 작동하는 것이 유교국가의 원리였다.

그런데 식민지시대가 되자 절대적 무력을 갖고 질서의 상호성을 무시하는 통치권력이 나타났다. 이 권력은 유교국가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민간의 이해관계를 묵살하고 통치에 협조하는 집단에게 자의적으로 이권을 부여했다. 친일파 집단은 성실한 노력 없이 권력에 대한 충성만으로 공짜처럼 온갖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 집단 밖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누리는 혜택은 자신의 정체성을 죽여 버리는 양잿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식민지시대에 무너진 도덕적 질서가 해방 후 회복되기는커녕 더 심하게 파괴되었다. 미군정은 일본을 대신해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친일파를 친미파로 전환시키고 그들에게 혜택만이 아니라 권력까지 쥐어주었다. 식민지근대화론 중에 일본이 조선을 맹목적으로 착취한 것이 아니라 조선사회의 발전을 위한 장기적 안목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미군정과 비교한다면 맞는 말이다. 일본의 조선 통치가 달걀을 착취하기 위해 닭에게 모이를 주는 수준이었다고 한다면, 미국의 조선 정책은 털도 안 뽑고 솥에 넣어버리는 수준이었다.

식민지화로 시작된 무력통치가 남한에서 1987년까지 계속되었다. 근 80년 동안 이 사회는 합의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 운영되는 체제만을 겪어온 것이다. 어떤 권리도 지속적인 노력이 아니라 화끈한 투쟁으로만 얻을 수 있는 체제였다. 투쟁에서 사물의 양면성을 생각하는 것은 방해만 된다. '더 나은 사회'를 원하는 사람들도 자유와 권리의 '쟁취'에만 마음이 쏠리고 권력자가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는 책임과 의무에는 반감을 느끼게 되었다. 꾸준한 노력으로 제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 사회가 익숙지 않게 되었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권리는 책임과 유리되어 '공짜'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이 풍조는 1987년 이후에도 계속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권리만 누리며 의무를 무시하는 건 건전치 못한 태도

지난 주 어린이참정권 도입을 제안하는 글 끝에 의무투표제에 대한 생각을 붙였다. 독자들의 일반적 반응은 "참정권은 권리인데 왜 의무로 만들자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권리를 권리로만 누리면서 의무의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건전치 못한 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해 온 원인 중 이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본다.

투표가 의무가 아니라면 모든 유권자는 투표에 참여할지 말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표현의 기회에 차별이 생긴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작다고 보는 유권자는 애써 투표할 동기가 약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치 현실에 불만이 큰 시민일수록 정치적 표현의 필요를 더 많이 느끼는데, 대개의 투표에서 현실적인 선택의 범위는 그들이 원하는 변화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냉소적인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투표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다.

ⓒ연합뉴스

위키피디아 "compulsory voting"에서 의무투표제에 대한 반대 이유를 검토해 봤다. 몇 가지 대표적인 논거가 예시되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의무'의 의미를 너무 좁게 해석해서 불필요한 문제를 상정하는 것들이다.

예컨대 여호와의 증인처럼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종교의 신도에게 투표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투표 의무를 일반적으로 설정하더라도 참정권 행사를 포기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의무 이행을 요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권리와 의무는 함께하는 것이다.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에게만 의무를 요구해야 한다.

의무투표제에 대한 다른 반대 이유도 대개 마찬가지다. 표현의 자유에는 표현하지 않을 자유도 포함된다고 하여 투표 의무의 요구가 이것을 침해한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의무를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승인해준다면(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는 조건 위에) 침해의 소지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의무투표제를 시행하고 있는 국가 중에도 이 점을 배려하는 제도가 보인다. 브라질에서는 사유서를 제출하면 되고, 아르헨티나에서는 투표 48시간 전까지 의사표시를 하면 된다.

한국에 의무투표제를 도입할 경우,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보다도 이 점을 더 잘 배려하는 제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투표 때마다 번번이 사유서를 내거나 의사표시를 할 필요 없이 '투표인 등록' 상태 표시를 주민등록 내용에 포함하는 것이다.

"나는 투표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명확한 의사표시를 한 차례 하면 그 사람에게는 그 후의 어느 선거에나 투표통지서도 보내지 않고 벌금고지서도 보내지 않는 것이다. '비투표인' 신분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비투표인이 다시 투표인이 되는 절차를 밟을 경우 적당한 시간(1주일)이 지난 후 투표권이 회복되도록 해준다. 비투표인이 되는 절차는 아주 쉽게 해주고 투표인 신분 회복 절차는 그보다 조금 까다롭게 하는 것이 제도의 안정성을 위해 좋은 기준일 것이다.

한국은 후진국…의무투표제 도입해야

의무투표제가 민주주의 실행을 위해 좋은 원칙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시행 현황을 살펴볼 때 의외로 느껴지는 것은 유럽에서 거의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시행 중인 나라 11개 가운데 유럽국은 룩셈부르크 하나뿐이다. 근대민주주의를 앞장서서 발전시킨 유럽에서 널리 시행되지 않고 있다면 별로 바람직한 제도가 아니란 말일까?

내 생각에는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의무투표제를 시행하지 않는 까닭이 그 필요를 느끼지 않는 데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참정권을 확대시켜 온 유럽국에서는 참정권의 의미를 시민들이 명확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벌금까지 매기며 의무를 요구하지 않아도 충분히 원활하게 제도가 작동될 것이다.

그에 비해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나라, 국민참정권이 외적 요인에 의해 갑자기 공짜처럼 주어진 나라에서는 참정권의 짝이 되는 투표 의무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OECD 회원 30개국 가운데 10개국이 의무투표제를 채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유럽 밖에서는 중요한 나라에서 많이 채용되는 추세가 있다.

후진국으로 보일까봐 의무투표제를 회피할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한국은 '민주주의 후진국' 맞다. 이 사실을 스스럼없이 자인하고 의무투표제를 도입하는 것이 민주주의제도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참고로 2013년 8월 현재 의무투표제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와 시행은 않고 있지만 제도적으로 명시한 나라의 명단을 위키피디아 "compulsory voting"에서 옮겨놓는다.

시행 중인 나라: 아르헨티나, 브라질, 에콰도르, 페루, 우루과이, 오스트레일리아, 북한, 나우루, 싱가포르, 룩셈부르크, 콩고 (11개국)

제도화해 놓았지만 시행하지는 않고 있는 나라: 볼리비아,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파나마, 파라과이, 멕시코, 벨기에, 그리스, 터키, 레바논, 타이, 터키, 리비아 (13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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