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대한민국'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며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304명의 희생자를 낳은 대형 참사 앞에서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오히려 참사 발생 이후 정부의 대응에 숱한 허점들이 드러났다. 희생자 가족 사찰부터 추모 집회에 대한 경찰의 강경 대응, 대국민 사과를 한 당일 곧바로 아랍에미리트에서 원전 행사에 참석한 '둔감함'까지. 박근혜 대통령이 여섯 번의 사과 끝에 눈물까지 보였지만, 그 눈물의 '진정성'이 의심받는 이유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통치 방식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 전 장관은 "세월호 참사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정권의 졸렬함이 그대로 드러났고, 정부 출범 1년3개월 만에 정권 심판론이 제기되는 촉매제로 작동했다"면서 "박 대통령 스스로가 통치 철학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문했다.
남 전 장관은 세월호 참사 후속 대책으로 진행된 정부의 인사 개편에 대해서도 "총리 교체가 핵심이 아니다"라며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교체없는 인적 쇄신은 무의미하다"고 못 박았다. 인터뷰는 27일 서울 서교동 프레시안협동조합 사무실에서 박인규 이사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다음은 남 전 장관과의 일문일답이다.
"대국민 사과한 날 원자로 수출 행사 참석…정권, 이렇게 둔감한가"
프레시안 :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 각 영역에서 정부와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표출되고 있다.
남재희 : 세월호 사건이 하나의 촉매로 작용해 정권 심판론을 앞당겼다. 세월호 사건이 없었다면 정권 심판론까지는 안 나왔을 텐데, 이 사건이 터지니까 정부의 허점이 드러났다. 무수한 구조적 허점이 노출됐고, 그걸 '핸들링'하는 데 있어서도 정권의 졸렬함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안전'을 강조하며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그 약속이 허물어졌다. 또 박 대통령이 '암 덩어리', '원수'로 부르며 규제를 완화한 점, 희생자 가족을 사찰하고 대통령의 조문까지 연출했다는 의혹 등 세월호 사건 이후 정권의 인식 수준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정상적이라면 정권 심판론은 집권 1년 3~4개월 만에 그렇게 빨리 오지 않는데, 분위기가 앞당겨진 것이다.
프레시안 : 안보나 안전 문제는 보수가 더 강조하는 영역이기도 하고, 특히 박 대통령이 대선 때부터 이를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는데 세월호 사건으로 한꺼번에 깨져버렸다.
남재희 : 안전 문제에 진보 보수가 어디 있나. 그런데 의외로 정권이 둔감한 것은 사실이다. 세월호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도 너무도 둔감하다.
일본이 후쿠시마 사태를 겪었다. 노후 원전에서 비롯된 원전 사고였는데, 우리 역시 설계수명이 이미 지난 월성·고리 원전을 가동 중이다. 사실 원전 문제야말로 엄청난 재앙을 부를 수 있는 시한폭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정부의 생각이 참 안일하다. 세월호 사고 이후에도 원전 대책은 안 나오고, 하필 세월호 대국민 사과를 한 날 아랍에미리트에 가서 원자로 수출을 축하했다. 세월호 참사를 보고서도 그렇게 둔감할 수 있나.
"국가 개조는 독재적 발상…朴, 통치 방식 잘못 전혀 못 깨달아"
프레시안 : 세월호 후속 대책으로 정부 조직 개편안도 일부 발표됐다.
남재희 : 해경 해체 등의 방안이 오랜 숙의 기간없이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이뤄졌다. 너무 무책임하다. 내각하고도 상의하고 광범위하게 여론도 수집해야 하는데, 그야말로 밀실에서 일부 참모진과 뚝딱뚝딱 급조해 버렸다. 그러다 보니 나온 결론이 엉성한 것이다. 말이 해경 해체지, 사실 소속만 달라지는 것이다. 국가안전처를 만든다고 했는데, 국가안전처가 무슨 도깨비 방망이인가?
대개의 경우 9.11 테러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같은 큰 사건이 터지면, 철저한 조사 기관을 통해 원인을 파악하고 대응 방안을 철저히 연구한 뒤 그 결과를 내놓는다. 그런데 세월호 같은 그 큰 참사를 겪고서도 심사숙고 없이 보여주기 식 처방 요법만 내놨다. 그게 불신을 조장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통치 방식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프레시안 : 여섯 번에 걸친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를 비롯해 그 이후 발언을 꼼꼼히 따져보면, 대통령이 스스로를 정부를 총괄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치 정부 위의 초월적인 존재처럼 인식하는 듯하다. '국가 개조론' 역시 그런 맥락에서 튀어나왔다는 지적도 나온다.
남재희 : 독재적 발상이다. 정권이 어떻게 국가를 개조하나? 정권은 국가 밑의 존재다. 정책의 방향과 노선은 정권이 바꿀 수 있지만, 국가를 어떻게 정권이 개조할 수 있나? 국민을 오도하는 과대망상이다. 춘원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이 그런 이유로 욕을 먹는 것 아닌가. 레토릭으로 하는 얘기겠지만, 진실한 통치자가 내세울 얘기는 아니다.
"김기춘 경질없는 인적 쇄신은 무의미"
프레시안 : 일부 인사 개편 작업도 이뤄지고 있다. 국무총리와 국정원장,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사실상 경질됐다. 쇄신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보나?
문제의 핵심은 남재준과 김기춘이다. 개편의 서막일지 마지막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남재준 국정원장은 경질됐다. 정보기관의 수장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무단 공개해 한국 정치를 1년 내내 주물렀다. 새누리당 윤상현도 잘못했다고 시인했는데, 그걸로 1~2년을 난리를 쳐놓고 이제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끝인가? 국정원장이 해서는 안 될 엄청난 정치 행위를 한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심각하게 책임을 물었어야 할 일이다.
이후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이 있었다. 만약 국정원의 증거 조작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번 선거에서 박원순 시장이 엄청난 간첩 공세에 시달렸을 것이다. 누가 봐도 박원순을 노린 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남재준 원장은 '아웃'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김기춘 경질없는 인적 쇄신은 무의미하다. 채동욱 '찍어내기'부터 시작해 최근 드러난 KBS에 대한 언론 통제까지, 궁극적인 책임은 이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져야 한다. KBS 사태는 명확하지 않나. 말이 '보도 협조 요청'이지 사실상 언론 통제를 한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김 실장의 전력이 다 말해주고 있지 않나.
프레시안 : 남재준 국정원장 경질을 제외하고는 이번 인사 개편의 의미가 없다고 보나?
남재희 : 그렇다. 안대희 후보자는 사실 괜찮은 이미지였는데 까놓고 보니 '하루 1000만 원'이었다. 서민 입장에서 보면 눈이 뒤집히고, 억장이 무너지는 얘기다. 물론 법률적으로 문제는 안 되지만, 정치적으로는 엄청난 부정이다. 여권에 그만큼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다. 끝까지 안대희를 총리로 밀고가긴 어려울 것이다. (인터뷰 다음날인 28일 안대희 후보자는 전관예우 논란 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후보직을 사퇴했다.-편집자)
"野, 정권 심판 반사이익 기대선 안 돼"
프레시안 : 이런 흐름이 이번 지방선거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나?
남재희 : 지방선거는 엄밀히 말하면 '지역 선거'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지방'은 보통 대도시의 대응 개념이고, '지역'이 이른바 '중앙'의 대응 개념 아닌가.
일단 세월호 전보다 선거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여당 일각에서도 이제 김기춘 실장 교체 목소리가 나오지 않나. 서울, 인천, 충남은 이미 야권 승리를 예상했던 지역이고, 부산에서 야권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광주는 전략 공천이 되어버려서 후유증이 상당할 것 같다.
얼마 전 문재인 의원이 중앙당 차원에선 통합진보당과 선거연대를 하지 않아도, 지역적 차원에선 연대가 가능할 수 있다는 취지로 얘기했었는데, 그 얘기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 김두관도 무소속으로 그렇게 당선되지 않았나. 또 진보정당 안에도 여러 계통이 있고, 경남의 경우 소위 말하는 이른바 "종북세력"보다는 노조, 농민운동 세력이 있는 곳이다. 과거 권영길이나 강기갑은 단독으로 지역구에서 당선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경남의 경우 진보정당과 손을 잡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다.
프레시안 : 현재까지의 여론조사만 종합해 보면 막판 여권 지지층의 결집이 예상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야당의 우세가 두드러진다.
남재희 : 야당이 이 국면에서 반사이익을 봤고, 또 그것에만 기대고 있어서 문제다. 야권이 이번 선거에서 크게 이긴다고 해도, 사실 자기 실력으로 선거 분위기를 바꾼 것이 아니니 후유증이 남을 것이다.
이제까지 안철수의 희미한 철학에 대해서 여러 차례 비판했었는데, 안철수는 적당하게 보수층을 끌어안으면 본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적당히 중도 노선으로 틀어서, 야당을 여당화시키는 것이다. 정치 철학의 부재며, 그게 지금 야당의 비극이다. 그럼 억눌린 국민은 누가 대변해주나? 야당이 야당 역할을 못하면, 국민만 불쌍해진다.
프레시안 : 이번 선거에서 여권이 패할 경우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좀 변화할 수 있다고 보나?
남재희 : 지금은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박 대통령이 통치 스타일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정부에 대한 지금의 이런 불신과 분노는 쉽게 완화될 것 같지 않다. KBS 사태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보통 KBS는 후행적인 저항을 하는 곳이지, 선행적 반항을 하는 곳이 아니다. 그만큼 잠복된 불만이 크다는 얘기 아니겠나. 심지어 <조선일보>에선 최근 새누리당 비박계가 점차 목소리를 내고 친박계를 누르고 있다는 사설도 나왔다. 집권 1년 반도 안 됐는데, 이상 현상이다.
프레시안 : 최근 남북관계에서도 여러가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북측에서 원인을 제공한 측면도 있지만 우리 정부의 대응이 좀 과격하지 않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국방부 대변인이 "북한이 빨리 없어져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다.
남재희 : 남북 문제는 기본적으로 군사적인 관계다. 군사적 긴장이 가장 큰 문제인데, 미국과 한국은 합동 군사 훈련 등 북한의 안전에 대한 불안감을 갈수록 증폭시키면서도 북이 핵을 포기하길 바란다. 이건 모순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 대박'을 얘기했지만, 남북이 통일된다면 통일된 한반도가 중국, 일본 등 주변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한반도에서 막강한 미군이 철수해야 하고, 주변국에 군사적 위협도 되지 않아야 하는데, 그건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최근 영국의 보수적인 저널인 <이코노미스트>도 그런 결론을 내렸다. '백일몽 신자들'이라는 칼럼이 실렸는데, 그 결론이 이렇다. "한반도에서 미국 군대가 없어지고, 미국 및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면, 통일 한반도를 내다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러한 상태로 가는 길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 대박론'은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과학적인 사고인가. 북한 핵무기는 제거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북한만을 몰아붙일 수도 없다. 미국과의 유대를 유지하면서 중국과의 친선도 더욱 도모하고 한반도의 군사적 위치가 어느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게 해야 하지 않겠나.
프레시안 : 우리 정부는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조치를 먼저 취할 것을 거듭 요구하고 있다.
남재희 : 북핵 문제는 그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향후 10년 안에도 해결이 어렵다. 가진 게 권총 밖에 없는 사람한테 "권총 버리면 돈 줄게"라고 한 마디 얘기한다고 전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디서 그런 얘기가 통하겠나? 그런 식으로 한반도의 군사 긴장을 높이기보다는, 남북 차원에서 민간 교류나 경제 교류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프레시안 : 남재준-김장수 등 군 출신 인사들이 경질됐으니, 정부의 남북관계에 대한 기본 노선에도 수정이 있을 것이라고 보나?
남재희 : 우리 정부의 입장 변화도 중요하지만 그건 사실 부차적이다. 문제는 미국이 계속 강성이란 점이다. 오바마가 당선되면 대북정책도 연성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봤는데, 부시의 강성 기조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일본의 군사적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혔다. 지금 상황에선 일본과 중국의 대결을 오바마가 '푸시(push)'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선 군사적 긴장 해소의 길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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