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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섬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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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섬으로 간다

6월의 섬학교, 슬로시티 증도와 꽃섬 화도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과 유족들에게 깊이 사죄하고 참회합니다. 어이없고 기막힌 이 나라를 만든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혁파할 것을 함께 다짐합니다.
섬은 유배지가 아닙니다. 섬 또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육지의 일부입니다. 내륙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입니다. 가슴 아픈 시간들이 가고 있습니다. 섬은 늘 사람들을 품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섬으로 갑니다. 상처 난 마음 섬으로부터 위로받기 위해.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제28강으로 6월 6(금)∼7(토)일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 증도와 꽃섬 화도를 찾아 갑니다. 전남 신안군의 증도(曾島)는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화도(花島)는 증도와 갯벌 위에 난 도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0만 그루 소나무가 장관을 이루고 있는 증도 해변 ‘천년의 숲길’을 걸으며 우리 시대와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증도에 있는 국내 최대의 천일염전인 태평염전도 탐방합니다. 갯벌 위에 난 노두길도 걷습니다. 느린 시간 속을 하염없이 걷고 또 걷습니다.

▲저 증도 해변처럼 우리의 삶 또한 아득하고 아련하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6월 답사지인 증도와 화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보물섬이면서 갯벌 생태계의 보고

시간의 의미를 성찰하려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
그들로 인해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고장
마당과 극장과 가게와 찻집과 식당
영혼이 깃든 장소들이 가득하며
온화한 풍경과 숙련된 장인들이 사는 고장
계절의 변화가 주는 아름다움을 느끼며
맛과 영양(營養) 의식의 자발성이 존중되며
느림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생물의 자연성에 리듬을 맞춰 살아가는 고장

슬로시티의 발상지인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작은 도시 그레베 인 끼안띠를 노래한 시다. 신안의 증도에 어울리는 시이기도 하다. 증도 또한 그레베 인 끼안디처럼 슬로시티다. 한해 8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증도는 2007년 12월,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은 고유의 전통과 자연생태를 보전하면서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과 진화를 추구하는 마을 만들기 운동이다. 2012년 6월 기준 세계 약 25개국 150개 도시가 국제슬로시티연맹에 가입해 있다.

2010년 3월 연륙교로 내륙과 연결된 섬 아닌 섬 증도. 증도가 슬로시티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갯벌 생태와 염전 문화의 우수성 때문이다. 증도는 잘 보존된 갯벌 전시장 같다. 증도에는 펄갯벌과 모래갯벌, 혼합갯벌 등 다양한 종류의 갯벌들이 원형대로 남아있다. 단일 염전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태평염전도 있는데, 이 염전은 여의도 면적의 두 배인 462만㎡나 된다. 태평염전 외에도 증도 인근에는 크고 작은 염전들이 산재해 있다.

갯벌에는 갯지렁이와 짱뚱어는 물론 풀게, 농게 등 다양한 종류의 게들과 백합 등의 조개류를 비롯한 100여 종 이상의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또 퉁퉁마디, 순비기나무 등 다양한 염생 식물도 자라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2008년 6월에는 한국 최초의 갯벌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9년 5월에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또 2011년 9월에는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었다. 700여 년 전인 중국 송, 원대 해저 유물 발굴로 보물섬으로 불리고 있는 증도가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한 것이다.

썰물의 시간. 증도 ‘짱뚱어다리’를 건넌다. 470m 길이의 짱뚱어다리는 증동리 솔무등 공원 앞에서 장고리 사이 바다를 가로질러 놓인 다리다. 다리는 두 발로 걸어서만 건널 수 있는 인도교다. 나그네는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다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다리 아래는 물이 들면 바다가 되고 물이 빠지면 바닥이 드러나는 갯벌이다. 썰물 때 다리를 건너면 갯벌에서 활동하는 짱뚱어들을 관찰할 수 있다 해서 짱뚱어다리란 이름을 얻었다. 갯벌 위를 기어다니는 생물 중에서는 짱뚱어보다 게들이 더 많지만 짱뚱어가 주인공으로 등극한 것은 갯벌을 기어다니는 물고기라는 그 특이한 생태가 증도 갯벌을 대표할 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닷물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증도 갯벌은 활력이 넘친다. 그 광활한 갯벌의 절반 이상을 게와 짱뚱어들이 뒤덮고 있는 듯이 보인다. 짱뚱어는 망둑어과의 바닷물고기이다. 피부 호흡을 하며 잘 발달된 가슴지느러미를 이용해 개펄에서 생활한다. 물이 빠지면 연안과 기수구역(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지역)의 갯벌에서 바닥을 기어다니며 주로 규조류를 먹고 살아간다. 수컷이 개펄에 Y자 형태의 구멍을 판 후 암컷을 유인해 산란하는데 암컷이 구멍에 산란하고 떠나면 수컷이 새끼가 부화해 헤엄칠 때까지 보살피는 부성애가 매우 강한 물고기다. 어민들 사이에 짱뚱어는 유난히 머리가 좋은 물고기로 알려져 있다. 빠르고 영리해서 낚시로는 좀처럼 잡기 어렵다. 그래서 홀치기로 잡는다. 홀치기란 낚시 바늘 다섯 개를 꽃처럼 묶어서 만든 낚시 바늘 뭉치인데 이것을 던져서 갯벌에 기어 다니는 짱뚱어를 낚아채는 것이다.

▲해변 솔숲을 지나면 우리는 또 어떤 세상을 만나게 될까? Ⓒ섬학교

해변의 솔바람 길을 걷다

짱뚱어다리를 건너면 ‘천년의 숲길’이 시작된다. 천년의 숲은 소나무 숲인데 그렇다고 천년된 숲은 아니다. 숲은 높은 곳에서 보면 한반도 형태라 해서 유명하기도 하다. 이 솔숲은 한국전쟁 이후 해풍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조성된 방풍림이자 방사림이다. 4km 길이, 명사십리 우전해변을 따라 조성된 솔숲 덕에 해풍과 모래바람으로부터 섬의 농토는 보호받고 있다. 참으로 고마운 숲이다. 숲의 소나무들은 수령 50∼60년에 불과하지만 솔숲의 규모는 방대하다. 무려 10만 그루의 소나무가 십리 해변을 따라 도열해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니 숲은 그대로 휴양림이기도 하다.

모래 사구에 조성된 까닭에 솔숲 길 또한 모래땅이다. 흙처럼 가늘고 고운 모래 땅위에 솔잎들이 수북이 쌓였으니 숲길은 그야말로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푹신하다. 발은 더 할 수없이 가볍고 편안하다. 거기에 더해 소나무들 사이로 선선한 솔바람까지 불어주니 그야말로 숲길은 걷기 천국이다. 걸을수록 발의 피로가 풀어지는 신비의 숲. 깊은 호흡을 하면 마음의 피로로 씻겨나간다. 증도가 슬로시티지만 아쉽게도 사람들은 증도 내에서 두발 보다 자동차에 더 많이 의존한다. 많은 이들이 짱뚱어다리 정도만 걸어보고 그냥 되돌아가거나 자동차를 이용한다. 이것은 분명 슬로시티의 정신에 맞지 않는 여행방식이다. 상시적인 외부 자동차 유입 제한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그 덕에 해송숲을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숲은 소란스러움이 없다. 이 숲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공존상을 받기도 했다.

숲길 가에는 산벚꽃, 싸리꽃, 제비꽃 등의 야생화들이 숲의 그늘을 밝히는 꽃등으로 켜져 있다. 제비꽃은 유독 색이 진하다. 야생화들은 꽃이 작을수록 그 색이 선명하고 강렬하고 유혹적인데 이는 벌, 나비의 시선을 끌어 번식하려는 몸부림이다. 솔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양파, 대파 밭은 푸른 향기를 더해준다. 숲을 가다 보면 간간히 크고 작은 방죽들이 보인다. 모래치 혹은 물치라 부르는 작은 못이다. 방죽 가까이 가자 인기척에 놀란 개구리 떼가 일제히 물속으로 뛰어든다.

증도는 면적 40.03㎢의 땅에 16개 마을, 2,05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섬이다. 증도를 본섬으로 하는 증도면은 8개의 유인도와 93개의 무인도를 거느리고 있다. 증도의 본 이름은 시루섬 혹은 시리섬이다. 떡시루가 바닥이 숭숭 뚫려 물이 새듯이 증도 땅의 물이 새버려 물이 귀하다 해서 시루섬이라 했다고 한다. 원뜻대로라면 시루 증(甑)자를 써야 옳을 테지만 어쩐 일인지 한자 표기 과정에서 '증도(曾島)'가 돼버렸다. 본래 세 개의 섬이었는데 전증도와 후증도, 대초도 세 섬 사이 갯벌이 간척되면서 하나가 된 것이다. 증도 곳곳에는 저런 모래치가 많다. 그 물이 있어 드넓은 벌판에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그래서 나그네는 물이 부족해서 시루섬이라 했다는 섬 이름의 유래가 납득되지 않는다. 많은 농사와 좀체 마르지 않는 모래치의 물을 봤을 때 물이 부족한 섬이어서 시루섬이 된 것이 아니라 모래땅이라 물이 쑥쑥 잘 빠져서 시루섬이라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모래치가 생긴 것은 사구 때문이다. 바람에 날려 온 모래가 곳곳에 언덕을 만들었다. 더러 두 모래 언덕 사이에 움푹 패인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그 웅덩이로 모래가 머금고 있던 물이 흘러들었고 물이 고여 모래치가 된 것이리라. 모래치는 모래사막의 섬에 생명을 살게 만드는 오아시스다. 이 솔숲 길의 비경은 모래치와 모래치를 감싸고 자라난 나무들이다. 물이 가까이 있으니 유독 푸르름이 더하고 생기 넘친다. 빛나는 숲이다.

천애윤락(天涯淪洛)

이 아름다운 숲에서는 침묵으로 걸어야 하리라. 함께 간 사람들이 있더라도 이야기하지 않고 걷다보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먼 바다를 건너온 솔바람은 이방의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새들과 개구리는 숲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주리라. 또 내 안의 내가 보내는 신호음을 들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므로 숲길을 걷는 시간은 오롯한 자기성찰의 시간이 될 것이다. 솔숲의 끝은 바다다. 4킬로미터 남짓의 솔숲을 빠져 나오면 우전해수욕장 드넓은 모래밭이 펼쳐진다. 명사십리, 물경 10리의 모래밭이다.

구한말 신안군의 전신인 지도군 초대군수였던 오횡묵의 정무일기인 <지도군 총쇄록>(1895∼1897)에는 오횡묵이 우전리 해변을 방문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에는 해당화가 명사십리 해변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이리 저리 둘러보아도 아득하게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이때 실바람이 불어와 향기가 코 끝에 풍겨왔다.”
붉은 해당화가 4km나 되는 해변을 뒤덮고 있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횡묵은 “벽지 바닷가 섬에 있어 널리 드러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한탄했다. 또 “가까이서 접해보고 난 후에 소동파가 말한 천애윤락(天涯淪洛)이 또한 이러한 것인가를 알았다”고 탄식하였다. 오횡묵은 감상에 젖어 잠깐 착각했었나 보다. 천애윤락은 소동파가 아니라 백낙천의 시 <비파행>에 나오는 구절이다. 백낙천은 <비파행>에서 “우리는 다 같이 하늘 아래 떠도는 신세(天涯淪洛)”라고 한탄했었다. 애수 어린 비파행의 정조는 “모두 다 아득히 먼 곳을 떠도는 외로운 사람, 어쩌자고 서로 만나 알게 되었는가”란 탄식이다. 이제 그로부터 백년이 지나 우전리 해변은 명성이 드높다. 그러나 해당화는 사라지고 없다. 다 어디로 갔는가. 모래바람에 휩쓸려 갔는가. 명사십리 해당화여! 우리는 여전히 아득히 먼 곳을 외롭게 떠도는 사람들, 어쩌자고 이제는 서로 만나지도 못하게 되었는가!

▲천애윤락, 우리는 모두 하늘 아래 떠도는 외로운 사람들! Ⓒ섬학교

증도, 보물섬 된 사연

1975년 증도 검생이(검산마을)의 한 어부의 그물에 그릇들이 걸려 올라왔다. 어부는 부서진 그릇들은 버리고 그중 쓸만한 그릇은 주어다 개밥 그릇으로 사용했다. 그 개밥 그릇이 범상치 않은 그릇임을 알아본 이는 육지에서 온 엿장수와 도굴꾼이었다. 그 개밥 그릇은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 때 만들어진 도자기였다. 꾼들 사이에 증도는 보물섬이란 소문이 퍼져나갔다.

1976년 1월, 다시 검산마을 어부의 그물에 중국 룽취안요[龍泉窯]의 청자(靑瓷)가 올라왔다. 어부의 발견 신고 후, 정부는 발굴단을 구성하고 1차 발굴을 시작해 1984년까지 11차례 발굴을 진행했다. 발굴 장소는 수심은 20m 이상이고, 탁류인데다 해류가 급하게 흘러 시계(視界)가 없는 해저였다. 인양 작업을 통해 20,661점의 도자기류 유물과 금속제품 729점, 석제품 43점, 동전 28톤 18킬로그램 등 실로 엄청난 양의 해저유물이 발굴되었다. 1323년에 가까운 시기에 침몰했을 그 배는 신안선으로 명명되어졌다. 그 후부터 증도는 보물섬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도자기 중 청자가 9,600여 점, 그중에는 고려청자 3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밖의 청자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룽취안요 계통으로 대부분 원나라 시대의 제품이었고, 송나라 시대 기법의 청자도 있었다. 금속제품은 은으로 만든 정병(淨甁)·매병(梅甁)·접시 등과 청동으로 만든 촛대·향로·거울·바라(악기)·자물쇠·주전자·세발두꺼비·수저·냄비·적자(炙子)·사발·인물상 등 종류가 다양했다. 돌로 만든 벼루·맷돌·동물조각은 물론 유리제품도 있었다.

향목(香木)이나 가구재(家具材)로 쓰는 자단목(紫檀木) 500여 점(약 8톤)과 글씨를 쓴 목간(木簡) 300여 점, 한약재(漢藥材)도 발굴됐다. 한약재에는 초과(草果)·호초(胡椒)·산수유 등이 있었다. 이 유물선은 중국인들의 손에 의해 중국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의 조선창(造船廠)에서 철저한 고증을 거쳐 당시의 기법으로 복원됐고 '700년 전의 약속'호로 명명되었다. 또 유물선에서는 왜 나막신[게타]·일본도(刀)·청동거울·장기·칠기·도기 등 일본 생활용구도 일부 인양되었다. 그래서 이 배는 당시 일본을 왕래한 중국의 무역선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작 증도에는 이들 유물이 전시되고 있지 않다. 유물들 대부분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과 목포 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보물선이 발굴된 해역은 국가사적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한국 최대 염전, 태평염전

태평염전은 증도에 있는 국내 최대의 단일 염전이다. 태평염전의 규모는 여의도 면적의 두 배인 462만㎡다. 소금창고는 등록문화재 제360호로 지정되었다. 태평염전은 본래 한국전쟁 후인 1953년 피난민들을 정착시키고 소금 생산을 늘리기 위하여 조성한 염전이지만 지금은 개인 소유다. 태평염전은 증도와 그 옆 섬 대초도 사이의 갯벌을 막아 형성된 간척지에 들어서 있다. 매년 15,000톤의 천일염이 생산되는데 국내 생산량의 5%나 된다. 염전은 67개로 나뉘어 있고 이에 딸린 67동의 소금창고가 3㎞에 걸쳐 늘어서 있다. 염부(鹽夫)들의 사택, 목욕탕, 관리사무실 등이 남아 있고 초창기에 세운 석조건물은 소금박물관이 되었다.

소금은 천일염과 정제염(精製鹽)으로 분류된다. 천일염은 바닷물을 염전으로 끌어와 바람과 햇빛으로 수분과 함께 유해 성분을 증발시켜 만든 소금이다. 정제염은 바닷물을 전기분해하여 이온 수지막으로 불순물과 중금속 등을 제거하고 얻어낸 염화나트륨(NaCl)의 결정체다. 한국에서는 수심이 깊지 않고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이나 남해안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인도양, 지중해 연안,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도 생산된다. 신안군은 국내 천일염 생산량의 65%를 생산한다. 염전도 한국 염전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이다.

▲통로인 동시에 단절이기도 한 바다, 그 바다를 가로질러 난 짱뚱어다리. Ⓒ섬학교

꽃섬, 화도

신안군 증도면에 딸린 섬 화도는 오랜 세월 증도와 갯벌의 징검다리 노두로 연결되어 있었다. 물이 빠지면 노두를 타고 건너고 물이 들면 배로 건너다녔으니 한 섬이나 진배없었다. 서남해의 섬들은 바다에 징검다리를 놓고 다녔다. 섬과 섬을 잇거나 섬과 육지를 이어주던 갯벌 위의 징검다리를 노두라 했다. 수천, 수만 개의 돌을 깔아 징검다리를 만드는 일도 참으로 고된 노역이었을 터지만 노두는 또 해마다 뒤집어 주는 수고를 감내해야 징검다리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끼가 끼면 미끄러질 수 있으니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또 노두돌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켜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온 섬 주민들이 울력을 해서 지켜온 다리였다.

이제 옛 노두는 사라지고 20여 년 전쯤 갯벌에 시멘트 도로가 생겼다. 사리 물때의 만조 시를 제외하고는 늘 건널 수 있다. 물이 들면 바다 위로 난 도로다. 바다 위 4m 폭의 도로는 1.2km. 옥황상제의 딸 선화공주가 잘못을 저질러 귀양을 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섬에 수많은 꽃들을 심어 화도란 이름을 얻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화도 주변 역시 펄개벌과 모래갯벌, 혼합갯벌까지 두루 갖춘 갯벌 전시장이다. 갯벌 생태계의 교과서로도 손색이 없다.

몇해 전 <고맙습니다>라는 방송 드라마가 촬영되면서 화도가 뭍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염전도 있었지만 지금은 폐전이 되고 그 자리에 왕새우 양식장이 들어서 있다. 염전이 그렇듯이 새우양식장도 주민들과는 무관한 외지인 소유다. 섬 주민들은 갯벌에 나가 낙지를 파거나 작은 게들을 잡아서 내다 판다. 또 약간의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지주식 김 양식으로 수입을 올리는 집도 4가구다. 20가구 남짓 되지만 노인 독거가구가 많아서 인구는 4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섬이다.

▲꽃섬 가는 길! 바다 위에 한 송이 꽃처럼 피어올라 꽃섬이다. Ⓒ섬학교

섬학교 제28강, 2014년 6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6월 6일(금요일)

07:00 서울 출발(출발시각 엄수 바랍니다. 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28강 여는 모임
11:40 증도 도착
12:00-13:00 점심식사(짱뚱어탕)
13:10-17:10 증도 짱뚱어다리와 천년의 숲길 걷기(7.3km, 완전 평지)
중동리 솔무동공원-짱뚱어다리(470m)-장고리-천년의 숲 입구-왼쪽 숲길-생태모래치-우전삼거리-갯벌생태전시관(3.8km)-우전해수욕장(해변산책)-철학의 길-해안 솔숲길-장고리 짱뚱어다리 입구(3km)
17:30 숙소 도착(바닷가 팬션의 다인실)
18:00 저녁식사 겸 뒤풀이(자연산 생선회 정식요리)
20:00 자유시간 및 취침

6월 7일(토)

07:00 기상
08:00-09:00 아침식사(해장백반)
09:20-11:00 둘쨋날 화도 노둣길 걷기(3km)
증도-화도 노둣길(왕복)
11:10-12:10 태평염전 탐방
13:00-14:00 점심식사(갯벌낙지로 만든 낙지초무침)
14:00-14:30 장보기(무안시장)
14:30 서울 향발, 제28강 마무리모임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모자,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어머니전>

섬학교 제28강 답사 참가비는 23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1일 숙박비, 5회 식사비 겸 뒤풀이, 입장료,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저 아득한 생애의 텃밭인 갯벌에서 낚지 파는 아낙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 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 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러싸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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