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해경에 의한 '집단 학살' 사건이다. 대통령을 끌어내려 법정에 세워야 한다."
노동절인 5월 1일, 한밤중에 제게 날아온 문자 메시지입니다. 한 선배 교수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진도 팽목항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자신의 선배가 보낸 문자라며, 제게 전달한 것이었습니다.
문자를 보고 나니, 세월호 참사는 정부와 사회가 안전을 소홀히 여겨 발생한 것이라는 말이 참으로 한가하다고 느껴집니다. 일부 정치인과 관료와 기업인들의 무능과 탐욕에 따른 비극이라는 말은 너무나도 진부하다고 느껴집니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가 자행한 '집단 학살'입니다. 세계 경제 규모 10위권의 나라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나라에서, 국민 행복과 안전을 중시한다는 나라에서, 미래와 과학과 창조를 강조한다는 나라에서, 한류를 뽐내며 문화 강국임을 자부한다는 나라에서, 대학 진학률이 무려 80%가 넘는다는 나라에서 목도한 '야만'입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 조사와 수사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러한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것이 국가냐, 나라냐, 정부냐'라는 국민의 한 서린 절규는 이미 그것을 간파한 것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집단 학살'이라는 규정이 너무 과한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집단 학살'이란 어떤 집단의 멸종을 목적으로 한 대량 살육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히틀러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같은 것 말입니다. 특정한 집단 전부 혹은 그 일부를 파괴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갖고 저지른 살해여야 하는데, 세월호 참사는 그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집단 학살'이 너무 과한 것 아니냐는 반론에 단지 '메타포'라고 답할 수도 있습니다. 사전적 정의에 비추어 보면, 그저 하나의 메타포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치의 '실천-책임·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집단 학살'이 맞습니다. 정치는 국가 정책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행위입니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의도성을 띤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또 무엇을 우선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을 우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하지 않은 것 역시 의도성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에서 동기보다 결과를 더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정치에서 의도의 있고 없음은 결과에 근거해 판정합니다. 전두환이 광주 시민을 학살할 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는 '학살자'입니다. 그는 부당한 방법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저항했습니다. 전두환은 광주에 군대를 보내 시민들을 학살하였습니다. 학살보다는 진압이 목적이었다고 할지 모릅니다. 총칼을 들이대면 시민들이 순응할 것이라고, 침묵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할지 모릅니다. 전두환은 인간과 시민에 대해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인간과 시민은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부당함에 저항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오판이 가져온 결과가 바로 학살이었습니다. 오판도 의도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미 쿠데타를 일으킨 자의 오판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오판하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지도, 성공시키지도 못할 테니까요. 즉 전두환의 오판은 쿠데타에 필요했던 것이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쿠데타의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학살을 가져온 오판은 이미 쿠데타에 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쿠데타의 의도와 학살의 의도는 각기 다른 것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월호의 과적을 승인해주고 사고 직후 팽목항을 방문한 해양수산부 장관인지 안전행정부 장관인지의 의전을 위해 잠수사 투입을 지연시킨 해경, 세월호가 침몰할 가능성이 있다는 민원을 무시한 정부 기관, 침몰 위험이 있는 배를 안전하다고 심사한 한국선급, 한국선급과 유착 관계를 맺고 선박 안전 심사 독점을 묵인한 해수부 관료와 공무원들, 재난·재해 대처에 전문성도 없고 무능하기까지 한 국무총리 이하 행정가들로 대책본부를 꾸린 대통령과 정부. 하지 말아야 할 것만 어찌 그리 쏙쏙 골라 했나 싶습니다. 마치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해치기 위한 매뉴얼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동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이럴 정도이니 과연 의도성이 없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의도성이 없었으니 학살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구조 작업이 가장 긴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착이 부패인 것은 물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해칠 위험성을 높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지위의 행정가가 아닌 재난·재해 대책 및 구조 전문가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정반대 선택을 했다면 '다른 목적', 즉 헌법에 명기되어 있는 책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닌 출세와 돈과 치적 쌓기와 시간과 상황 때우기를 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결과로 나타날- 학살의 의도성이 성립한 것입니다. 그것도 같은 학교에 다니는 수백 명의 학생이 죽거나 실종되었으니 집단 학살입니다. 위험성을 알고도 과적은 물론, 침몰 당시 승객 구조가 아니라 과적 사실을 숨기는 데 급급했던 청해진해운 역시 마찬가지로 '집단 학살자'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집단 학살'이라고 규정하면, 청와대나 새누리당 등은 종북주의 좌파 세력이 사회 불안을 조장하고, 체제 전복을 위한 혁명을 획책하고 선동하는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짚고 넘어가자면, 저는 사회 불안을 조장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체제 전복을 위한 혁명을 획책하고 선동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고, 그럴 의사도 능력도 없습니다. 전 이미 수십 년 전에 카뮈가 1946년 <콩바>에 실었던 '왜곡된 혁명'이라는 글에서 밝혔던 것처럼 "오늘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는 혁명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카뮈는 "한 정부의 탄압 장치는 탱크와 전투기의 무력을 고루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그런 정부에 맞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고만 해도 탱크와 전투기가 필요할 것이다. 1789년과 1917년은 여전히 중요한 사건들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카뮈는 또 "혁명은 오늘날 전쟁이라는 극단적 위험을 수반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 카뮈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2014년인 지금은 1946년 그때보다도 카뮈의 말이 더욱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 혁명을 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국가가 생때같은 아이들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바닷속에 가라앉아 죽게 만든 것을 본 부모의 심정을 떠올리면 그러합니다. 하지만 카뮈의 또 다른 말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집단 학살'이라는 것도 분명한 생각이지만,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분명한 생각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집단 학살'이라고 해도 광주항쟁과 같은 식의 저항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다시금 일어나서도 안 됩니다. 광주항쟁은 전두환 신군부 같은 노골적인 야만 세력이 저항의 모든 통로를 차단했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짜 할지도, 진짜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또 용어의 선택과 표현도 참 고루하지만 -'국가 개조'와 그것을 위한 '적폐 도려내기'의 칼은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이 쥐고 있습니다. 뭘 한 것도 없이 지방선거에서 '안전 대 불안'으로 프레임을 짜야 한다는 식의 소리나 새어나오게 하는 제1야당은 여전히 믿음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갤럽이 발표한 4월 5주차 여론조사 결과, 세월호 참사 직전 60%를 넘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48%로 떨어졌는데도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율은 24% 정도에 불과합니다. 무당파층만 2주 사이에 10%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안전 대 불안' 구도가 형성되려면 자신이 안전 세력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법정에 서게 해야 한다는 분도 계시고,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한 정당도 있습니다. 하지만 법정에 서게끔 하는 것도, 퇴진시키는 것도 모두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운동이 잘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대안(정당 혹은 정치세력)이 만들어져 있지 않아 '건설적 불신임(퇴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독재 정권 퇴진을 위한 민주화 운동이 가능했던 것도 민주 정부 수립의 주체로서 야당과 야당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족 등 피해자 가족을 비롯한 상처 받은 국민들에 대한 치유, 진상 규명과 관련자 처벌, 개각과 청와대의 참모진 교체, 대형 참사 예방과 대처를 위한 정책과 법제 마련, '해수부 마피아'뿐만 아니라 '원전 마피아' 등의 해체를 포함한 범사회적 차원의 지속적인 정부 쇄신 추진이 가장 시급하게 표방되어야 할 목표이자 과제일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사회적 숙의와 실천의 대오도 만들어내야 합니다. 노란 리본 달기 운동을 비롯한 국민적 공감 속에 '뭐라도 하자'며 이미 만들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은 정치가 사회의 대안적 실천을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지금의 정치권을 갖고는 정치를 통한 대한민국 혁신의 동력이 만들어지지 않으리라 생각되어 그러합니다. 정치와 선거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극에 달해 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치는 (기존 정치인들의) 생각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을 가진 세력으로) 세력을 바꿔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직 세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68혁명'을 전후로 한 가치관의 변동과 그것에 따른 사회 변화, 특히 반전과 반폭력, 인권, 생명과 안전, 환경 등과 같은 탈물질주의적 가치에 대한 선호의 부각 -그것에 바탕을 둔 국가와 정치와 관료(제) 개혁 운동 등의 사회적 실천의 확산-을 두고 잉글하트라는 정당학자는 '조용한 혁명'이라고 칭한 바 있습니다. 카뮈가 말한 바와 같이 전쟁과 같은 폭력을 동반하는 전통적 개념의 혁명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68혁명'을 가능케 했던 사회 기저의 '조용한 혁명'은 대한민국에서도 가능할 것입니다. 아니, 가능케 만들어야 합니다. 너무나 뼈아픈 고통으로 삶을 지속할 의지도 힘도 갖기 어렵지만, '집단 학살'에 다름 아닌 세월호 참사 이후 '조용한 혁명'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의 '68혁명'을 함께 꿈꾸고 도모해갔으면 합니다.
<주간 프레시안 뷰>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만의 차별화된 고급 칼럼지입니다. <프레시안 뷰>는 한 주간의 이슈를 정치/경제/남북관계·한반도/국제/생태 등 다섯 개 분야로 나눠 정리한 '주간 뉴스 일지'와 각 분야 전문 필진들의 칼럼을 담고 있습니다.
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정치 선임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남북관계·한반도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국제는 이승선 프레시안 국제 선임기자, 생태는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맡고 있습니다.
이 중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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