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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게 듣고 싶은 말

[김민웅의 인문정신] 그 자리에 계속 있어야 하는 이유, 자격, 그리고 권리에 대하여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면 1

2014년 4월 중순을 넘어선 어느 날.

진도 앞바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온 국민이 비통한 심정에 빠져 있을 때, 대통령이 현장 방문을 했다. 이제나 저제나 구조소식에 애타하며 체육관에 있던 학부모들이 모여들었다. 대통령은 열심히 현재 진행되는 구조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는 중 어느 한 엄마가 단하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고 있었다. “제발 제 아이를 살려주세요, 대통령님.”

그러자 대통령은 이내 설명을 멈추고는 경호원들의 제지를 뿌리치더니, 그대로 단하로 뛰어 내려가 그 엄마를 껴안고 함께 흐느끼더니 그녀를 부축해서 일어났다. 현장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고, 이 장면을 TV로 지켜본 국민들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장면 2

다섯 살짜리 소녀는 충격에 빠져 있었다. 엄마와 아빠의 구조 소식이 아직 들리지 않았고, 자신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준 일곱 살짜리 오빠의 소식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대통령은 이 아이를 보자마자 그대로 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대통령의 가슴은 타들어가는 듯 했다. 어쩌나, 어쩌나.

그런데,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두 장면의 일부는 현실이었고 나머지는 가상이다. 대통령이 서 있는 단상 아래 무릎을 꿇고 호소하던 엄마는 실재(實在)했으나, 대통령이 단하로 내려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상에서 그대로 보고 있기만 했을 뿐이다. 다섯 살짜리 소녀는 병원에서 안정시켜야할 상태인데 왜 그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우린 알지 못한다. 그리고 대통령은 그 아이의 뺨에 손을 살며시 대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게 전부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절대자 “신(神)”이다

진도 앞바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실과 난파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주었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과연 가려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 모두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물론 인간의 생명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자본과 그 자본의 지배를 확장해온 정치, 권력만 누리고 책임은 타자에게 전가하는 지배세력의 악랄한 습성은 그 일차적 지탄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일정하게 용인해온 이 나라 국민들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내 삶이 어디 나 혼자 잘 하면 되던가? 이번 사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가? 내 목숨이 남에게 달려 있다. 그 “남”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는 이렇게 “나”의 생사를 결정하는 근본이 된다. 그 “남”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구성한다. “나”는, “남”에게는 “남”이다. 그러니 여기서 제외되는 이들은 하나도 없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밖에 있는 타자, “남”의 판단이 잘못되는 상황이다. 이들이 기대를 접거나 판단을 그르치거나 구조행위를 멈추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 타자로 이루어진 집단의 생각, 판단, 행위는 한 인간의 생명과 존재를 좌우하는 위력을 가진다. 따라서 어느 특정 순간에, 그 “남”에게 “나”는 생사여탈의 권한을 갖는 절대자 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이 신이 인간이 겪는 고통에 대해 무감각하고 별반 함께 아파하지 않든지, 아니면 무능력하거나 또는 무책임하다면 어찌 될 것인가? 인간은 결국 억울하게 죽고 만다. 세월호 침몰의 현장에서 구조에 나선 이들은 모두, 배 안에 있는 이들에게 생명의 밧줄 같은 신이다. 그런데 이들 절대자가 만일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마비되어 있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대통령의 모습에서 이 끔찍한 현실을 목격했다. 공감의 능력도 부족하거나 없고, 치밀한 지휘능력은 더더구나 없었다. 대통령은 이 모든 신의 총합인데 말이다.

국가에게 권리를 양도한 까닭은

국가의 대표와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국민들이다. 여기서 국회의원도 나오고, 대통령도 된다. 뽑은 것은 국민들의 책임이고, 그 이후는 뽑힌 이들의 책임이다. 하지만 뽑힌 뒤, 이들을 감시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교체까지 하는 것은 여전히 국민들의 책임이다. 그리고 이것은 권리다. 다 아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책임은 그냥 책임이 아니고, “권리를 지켜내기 위한 책임”이다. 그 책임의 범위와 수준은 그 권리를 지켜내는 방식에 대한 선택과 행동까지 포함한다. 그렇지 않으면 권리를 수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선택과 행동을 막으려는 권력자가 있다면, 이것은 국민의 책임과 권리를 방해하는 존재다. 그 저지의 행위 자체로 이미 그는 그 자리에 있을 명분과 자격을 상실한다.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던>은 국가의 절대권한을 용인하는 사회계약론으로 알려져 있다. 엄격히 따지자면 여러 논쟁이 가능하지만 이는 그리 틀리지 않는 이해다. 그러나 그 절대권한에는 중대한 전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홉스는 내전의 시기에 국가가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내지 못하면 폭력의 자연상태로 전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국가권력에 일정하게 양도하도록 합의, 계약함으로써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강력한 안전장치를 만든 것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 안전장치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면 그것은 언제든 해체되고 다른 것으로 교체될 이유가 발생한다. “자신의 기본권 일부조차 양도할 정도로” 생명을 지켜내는 국가의 임무가 막중하기 때문에 권력과 책임을 준 것인데, 권력은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국가로서의 절대적 존재감을 스스로 잃어버리는 것이다.

근대민주국가의 대통령 책임제는 존 록크의 자유주의 철학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근본에 있어서는 홉스의 국가론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국가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홉스의 논리가 도달하는 결론이다. 하나 유의할 바는, “안보국가(Security State)”는 이와는 달리 안보를 내세워 국민의 생명과 존엄성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킨다는 점에서 홉스의 정치철학과 아무 상관이 없다.

ⓒ 연합뉴스


“생명의 정치”가 새 정치다

이제 우리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능력 있는 국가를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민들 모두의 책임과 권리다. 그걸 막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시위는 국민들의 건강권과 후대의 생명에 대한 중대한 문제제기였다. 그랬기에 아이들을 유모차에 싣고 시위 현장에 나왔던 엄마들이 있었다. 2009년 용산참사는 생존권에 대한 절규를 폭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여기서 아까운 생명들이 불에 타 숨졌다. 2010년 쌍룡차 사태에 대한 폭력진압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5년이 지나, 쌍룡차 해고자 가운데 25번째 자살자가 생겼다. 국민의 생존권,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내지 않는 권력의 횡포가 저지른 타살이다.

만약 우리의 정치와 사회가 생명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민감했다면, 그리고 그 고통을 어떻게든 덜어내고 함께 힘을 합쳐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진력해왔다면 이번 참사와 같은 사태가 이토록 어이없게 일어났을까? 국가가 국민의 생존권,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권리를 폭력으로 짓밟는 나라에서는 생명을 구하는 제도와 장치 자체가 제대로 가동되는 일은 본질적으로 어렵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지 않은가? 그건 타살의 함정만 늘어나는 일이다.

자기 조직의 주도권에 매달리는 국가기관, 거짓말로 사태를 호도하는 정부, 책임전가에 급급한 고위관료들, 자본의 이익에 휘둘린 민영화 정책의 비극적 결과, 취재가 아닌 홍보로 열을 올리는 언론방송들 (이들은 국가권력과 밀착된 국가기구의 일부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황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질타 외에는 조직적 지휘는 도저히 하지 못하고 있는 대통령.

세월호 침몰현장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는 긴급구조대상자들에게 이렇게 초현실적으로 무력한 국가권력과 대통령을 그대로 둔 채 생명의 정치가 가능해질까?

이제 애도의 기간이 끝나고 나면, 국가권력은 희생양을 찾기 위해 분주할 것이다. 르네 지라느가 말했던 것처럼 “권력의 공모가 만들어내는 희생양”으로 책임에서 도주하는 자들이 여기 저기 생겨날 것이다. 분노의 과녁을 조작하고 이 사건을 덮을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 낼 궁리를 하며, 유언비어유포니 뭐니 하면서 국민들의 입을 막을 술책이나 꾸미려 들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지 않은가?

무능력한 신이여 답하라

다시 말하노니, 우리는 누군가에게 “신”이다. 그 신의 자리는 결코 쉽지 않다. 박근혜는 바로 그 가장 어려운 신 가운데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 아무나 감당할 자리가 아니다. 그 짐을 덜어주고 싶다. 이제 거기에서 내려와도 될 것 같다. 우리는 이런 일에 비통한 눈물을 흘리지 않고 무능력한 절대자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대통령 자신에게서 육성으로 듣고 싶다. 박근혜 당신이 대통령 자리에 계속 앉아 있어야 할 이유와 자격, 그리고 권리에 대하여. 우리가 그 말에 감동을 받고 설득될 수 있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유익한 기회가 아니겠는가?

교육 운동가이자 시인인 이수호가 쓴 “신의 손”이라는 시가 있다.

강남 변두리
재개발에도 밀린 허름한 빌딩
손바닥만 사무실 구석 창가
컴퓨터 모니터 자판 하나로도 가득한
작은 내 책상 모서리에
누가 가져 왔더라
빨간 선인장 한 알
먼지 뒤집어쓰고
말라가고 있다
때로는 햇살도 들어
가끔 눈에 띌 때
물 좀 줘야지 하지만 말고
바로 일어서서 물 한 모금만 줬어도
이렇게 죽어가지는 않을 텐데
이젠 말라 비틀어져
아예 물에 담가놔도
다시 살아나지는 못할 것 같다
이 선인장 생사가 내 손에 있는데
게으른 신이 세상을 죽이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더는 게으른 신이 되고 싶지 않다. 세상을 살려내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정한 자리를 되찾고 싶다. 국민의 책임과 권리를 다하고 싶다. 우리 모두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내기 위해서.

아, 가슴에 눈물의 비가 아직도 그치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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