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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자기 꼭두각시를 죽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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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자기 꼭두각시를 죽였나?

[동아시아를 묻다] 지엠을 위한 변명

후에 : 위대한 유산

후에(Hue)에 다녀왔다. 응우옌 왕조의 옛 수도이다. 아주 오래된 일도 아니다. 1802년 개국이니, 불과 200년 전이다. 야심만만한 왕조였다. 수백 년에 걸친 남진(南進)을 마침내 완수했다. 오늘날 베트남의 꼴을 비로소 갖추게 된 것이다.

건국 이념은 드높았다. 신유학 국가의 정수를 표방했다. 흐엉강(香江)을 끼고 들어선 웅장한 자금성은 '대남제국(大南帝國)'의 위용을 자랑했다. 또 하나의, 그리고 최신의 중화제국이었다.

그러나 때가 맞지 않았다. 천하가 소란했다. 프랑스군이 다낭 포격으로 숨통을 쥐어온 것은 1858년이다. 건국 반세기를 지나서였다. 전성기를 채 구가하기도 전에 일격을 당한 것이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 문치주의는 무력했다. 문약의 비애였다. 저항이 그치지는 않았다. 거점은 후에였다. 새 왕조의 중심이자 유림의 집결지였기 때문이다. 근왕(勤王) 운동이 타올랐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연방의 수도를 하노이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근왕 운동의 상징적 인물 가운데 응오딘카(Ngo Dinh Kha)가 있다. 한문과 라틴어에 능통한 대학자이자 관료였다. 그는 1896년 후에에서 국학(Truong Quoc Hoc)을 열고 초대 교장도 역임했다. 프랑스-안남 학교의 모델이 된 이 국학의 교훈이 인상적이다. 'Liberte, Egalite, Fraternite'(자유, 평등, 우애 : 프랑스 혁명의 3대 이념)에 '仁'과 '禮'를 보탰다. 프랑스어, 베트남어, 한문을 모두 가르쳤고, 교과목 또한 동서 고전을 망라했다. 학생 가운데는 황태자 타인 타이(Thanh Thai)도 있었다. 카(Kha)는 훌륭한 군주를 키워냄으로써 응우옌 왕조의 차후를 도모했다.

일이 어긋난 것은 1907년이다. 식민 정부가 타인 타이의 황제 계승을 가로막고 프랑스 망명을 권유했다. 근왕 운동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카는 관료로서 또 교장으로서 소임을 다했다고 여겼다. 모든 자리에서 사임하며 프랑스 정부와의 협력을 일체 거부할 것을 선언했다. 그의 결단에 국학에 재학 중이던 어린 학생들도 환호했다. 그 달뜬 학생들 가운데는 응우옌 아이 꾸옥도 있었다. 훗날 '호치민'으로 불리게 되는 총명한 소년이었다.

호치민 이상으로 카의 영향을 받은 이가 있다.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다. 1954년부터 1963년까지 남베트남을 통치했던 바로 그 지엠이다. 카는 지엠의 아버지였다. 후에의 명문 사대부 집안의 적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른 나이에 고전 한문은 물론이요 라틴어와 프랑스어도 익힐 수 있었다. 동서고금을 회통하는 교육을 받고 자라난 것이다. 아버지 못지않은 스승도 후에에서 만났다. 다름 아닌 판 보이 쩌우, <월남망국사>의 주인공이다. 20세기 초 베트남 독립을 위해 일본과 중국을 방랑했던 쩌우는 1925년 중국에서 체포되어 후에로 이송되었다. 가택 연금 상태로 말년의 15년을 고도(古都)에서 살았다.

지엠이 쩌우와 사제이자 동지로서 돈독한 우애를 나눈 기간은 1933년부터 1940년까지였다. 지엠은 30대였고, 쩌우는 60대였다. 시점도 각별하다. 마침 쩌우는 유교의 현대화 작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대공황 이후의 세계 정세를 목도하며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아닌 제3의 길로서 유교의 재해석과 주석 달기에 말년의 혼을 불살랐다. 청년 지엠은 때로는 쩌우의 본가에서, 때로는 흐엉강의 나룻배에서 '전국 시대'에 방불했던 20세기에 유교의 역할과 전망을 토론했다. 쩌우는 지엠이 흐뭇했다. 그를 '군자'라고 칭송하는 시도 한 수 남겼다.

두 사람이 후에에서 머물던 1930년대는 베트남 문단과 사상계에 '신청년'이 득세하던 때이다. 서구파가 주도하고, 동구파도 세를 키워갔다. 거점은 하노이와 사이공이었다. 반해 말년의 쩌우는 동방의 맥을 잇고 있었고, 바로 그 곁에 청년 지엠이 있었던 것이다. 유교 갱신을 통한 베트남의 독립과 중흥이라는 쩌우의 소원은 지엠을 통해 계승되는 듯 보였다. 1943년 지엠이 주도하여 조직한 첫 정치 단체의 이름이 '대월복흥회(大越復興會)'였다. "월남 망국"에서 "대월 복흥"으로. 서구의 답습도, 동구의 복제도 아니었다.

그간 지엠의 이미지는 편파적이었다. 무엇보다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폄하가 짙었다. 북베트남은 지엠 정권을 "My-Diem"이라 조롱했었다.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도 부각되었다. 불교도가 다수였던 남베트남의 토착 정서와 어긋났다는 것이다. 구태의연한 인물이었다는 인상도 강하다. 유교적인 권위주의가 농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공자 탄신일을 국가 기념일로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가톨릭 만다린'이라는 비웃음도 샀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반공주의 독재자'라고 갈음하고 말기에는 간단치 않은 인물이었다.

가지 못한 길

남베트남은 전후 미국이 세계를 경영하는 주요 실험장 가운데 하나였다. 제3세계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외교관, 군인, 정보 요원, 사회과학자, 원조 전문가들의 학습장이었다. 이들의 주도 하에 남베트남의 국가 개조 및 정치 행정 개혁의 청사진이 마련된 것이다. 모델은 뉴딜 정책에 있었다.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발전 국가의 확산을 꾀한 것이다.

그러나 번번이 지엠과 충돌하며 갈등을 빚었다. 당시의 관료들과 사회과학자들은 남베트남의 '전근대성'을 지목했다. 토착적이고 전통적인 관념을 장애물로 여겼다.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반대로 해석했다. 미국 엘리트들의 편견과 편향에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두었다. 당사자든 역사가든 반목의 기저로 문화적 차이를 꼽은 것이다.

그런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도 아니었다. 관건은 지엠 또한 야심만만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개혁가였다는 점이다. 그가 꿈꾸는 (남)베트남은 미국의 설계도와 영판 달랐다.

1) 민주주의 : 인격주의

1954년 제네바 회담으로 남북 분단이 확정되자, 지엠은 근로인격혁명당(Can Lao Nhan Vi Cach Mang Dang)을 만든다.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서고 북베트남 공산주의와 경쟁하는 제3세력을 도모했다. 그리고 1955년에는 '베트남 공화국'을 선포했다. 바오다이 황제가 이끄는 입헌군주제를 청산하고 지엠 본인이 대통령이 되는 새 국가의 건설이었다. 자신의 이념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 혁명'이 닻을 올린 것이다.

그는 '민주 국가'를 지향했다. 다만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유럽이나 미국의 정치 이론과는 달랐다. 그 근거를 베트남의 역사 속에서 찾았다. "우리의 제도, 관습, 사상에 흐르고 있는 민주주의적 요소"를 강조했다. 특히 19세기 초기의 응우옌 왕조를 높이 쳤다. 황제와 관료의 상층 계급은 물론이요, 일반 백성들까지도 유교적 규범으로 덕화시키고자 했던 문명 국가였다는 것이다. 적절한 '혁신'을 통하여 민본주의를 현대화할 수 있고, '국가 혁명'의 초석으로 삼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자문관들과 크게 어긋났다. 정당 간, 이익 단체 간, 그리고 사회 조직 간 권력 분점에 기초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수긍하지 않았다. 지엠은 단호하게 말했다. "종이 위에 투표하고, 국회에서 법을 제정하고 공포하는 정치의 문서화, 합리화 과정이 민주주의는 아니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사람을 존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의 상태, 삶의 방식"이라고 했다. 그에게 민주주의란 시민적 덕성을 키움으로써 집합적인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정부의 형태나 제도의 입안보다 중요한 것이 국민 모두가 서로에 대해 지혜와 덕성을 갖추는 것"이라고 했다. 즉 민주주의를 '정치적 권리'의 보장이라기보다는 개인과 공동체의 덕성 함양 프로젝트로 간주한 것이다. 그래서 의회를 갖추고 헌법도 공포했지만, 좀처럼 충분치 않았다. 그는 부단하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남베트남 국민들의 도덕적 각성을 촉구했다. 이른바 '인격 혁명(Nhan Vi Cach Mang)'은 지엠 정권의 공식 이데올로기였다.

인격(Nhan Vi)이라는 개념에는 판 보이 쩌우의 그림자가 언뜻 엿보인다. 쩌우는 자인(自仁, Tu Nhan)을 강조했었다. 뜻을 풀면 자기 향상에 값한다. 그러나 자기 향상 또한 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수신은 제가와 치국과 평천하를 통해 이루어진다. 가족과 마을, 사회, 국가 구성원과의 협동과 협력 속에서 나의 인격도 향상되는 것이다. 즉 '인격 혁명'은 이미 사회적, 정치적 과정이었다. 이를 통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공산주의적 집단주의를 넘어서고자 했다. 지엠이 추구했던 '민주주의'란 미국식 자유주의 국가로의 개조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2) 발전 국가 : 향촌 사회

미국과 지엠이 갈등했던 또 다른 장소로 농촌을 꼽을 수 있다. 지엠에게 농촌은 인격 혁명의 근거지였다. 그래서 토지 개혁과 원조를 통한 생산력 증대를 최고의 목표로 삼지 않았다. 경제 성장은 장기적인 효과이지, 단기적인 목표가 될 수 없었다. 즉, 물질적 복지 추구가 농촌, 농업, 농민 정책의 요체가 아니었다.

역시나 정신적 복리, 덕성의 함양을 중시했다. 메콩 델타 지역으로의 농민 이주와 '향촌 사회' 건설은 공산주의식 집단 농장도 아니요, 미국식의 개인주의적 대규모 농장 확산도 아니었다. 빈농을 소농과 중농으로 양성함으로써, 자립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변모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여기서 강조된 개념은 Tu Tuc이었다. 한자를 그대로 풀면 자족(自足)이지만, 뜻에 가깝게 옮기면 자력갱생(自力更生) 쪽이다. 정착민 간의 공동체적 유대감과 결속력을 지칭했다. 새로운 마을 공동체의 집합적인 도덕 향상 증진에 공헌하는 마음가짐을 Tu Tuc이라고 한 것이다. 이 또한 미국의 서부 개척에서 구현된 프런티어 정신과는 전혀 다르다. 자유의 극대화, 소유의 최대화를 추구했던 프런티어 정신에 견주자면 차라리 '발런티어(volunteer) 정신'에 가깝다. 사(私)보다는 공(公)을 섬겼다.

지엠은 자유주의에 대한 회의론자로서 농민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배타적으로 중시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꾀했다. 또한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자로서, 정부 원조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기도 바랐다. 해결 방안은 정착민 스스로가 서로를 도우며 격려하는 것이었다. 상부상조의 마을 만들기였다. 그래서 미국이 제공하는 기계 농업에 뜨악한 풍경마저 연출되었다. 집합적으로 노동하는 수작업을 더 선호했던 것이다. 그 노동 과정을 통하여 이웃들과의 연대감 속에서 인격 단련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근로(Can Lao)와 인격(Nhan vi)은 불가분이었다.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보다는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을 고수했다.

따라서 이 '자족'은 정착민들이 정부로부터 재정적, 물질적 보조 없이도 생활할 수 있는 일종의 '소강 사회'를 지향했다. 생산력보다는 생산 관계에, 생산보다는 생활에 방점이 찍혔다. 그래서 '새마을'이라기보다는 '옛 마을'에 근사했다. 자급 정신을 부양하고, 마을 자치도 강조했다. 마을의 자치 규율인 향약(Huong uoc)이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

물론 남부에서는 새로운 경험이자 낯선 실험이었다. "왕의 법이 마을의 어귀에서 멈춘다"는 속담이 널리 퍼져있던 북부와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고쳐 말해 신유학적 향촌 사회를 남쪽까지 확산시키고자 했던 것이라고도 하겠다. 지엠의 농촌 개혁이 응우옌 왕조의 건국 사업을 무의식적으로 대리 수행했던 듯 보이는 까닭이기도 하다. 과연 그는 후에의 후손이었다.

▲ 남베트남의 첫 번째 대통령 응오딘지엠은 과연 미국의 꼭두각시였을까? 그는 어떤 미래를 꿈꿨나? ⓒwikipedia.org

Doi Moi : 更張

지엠의 '독단'을 바라보는 미국의 엘리트들은 당혹스러웠다. 원조를 통해 자유 국가의 성공 모델을 남베트남에 구현하고자 했던 계획은 점점 더 멀어져갔다. 갈수록 서로가 불편했고, 불만이 누적되었으며, 동맹은 이완되어 갔다. 동구와 서구의 대결이라는 냉전적 구도 아래 동방과 서구의 길항 또한 복류하고 있던 것이다.

급기야 1963년 봄, 지엠은 '수정주의'를 천명한다. 미국과의 거리두기를 선언한 것이다. 남베트남을 유고슬라비아와 동등한 방식으로 대우해 달라고 요청했다. 군사 장비와 물자 원조는 받되, 내정에는 일절 관여하지 말기를 공개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수정주의 선포는 중립주의로의 선회이기도 했다.

북베트남도 기민하게 반응했다. 남북 간 비밀 협상이 개시되었다. 지엠과 호치민 사이에 물밑 교섭이 진행된 것이다. 남베트남이 미국과의 동맹을 끊고 중립주의로 나가면 민족해방전선도 투쟁을 거둔다는 말까지 오고 갔다. 호치민은 공식석상에서 지엠을 '애국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문화 교류는 물론이요, 남부의 쌀과 북부의 석탄을 교환한다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되었다. 남북과 모두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인도의 뉴델리가 남북 간 비밀대화의 창구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당시 상황에 대한 남과 북의 문서고가 열리지 않아 그 전모를 온전히 살피기는 힘들다. 다만 1963년 당시 지엠 또한 남베트남의 중립주의 노선을 모색하며 남북 대화에 적극 임하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정황이 그해 연말 미국의 개입 하에 진행된 군사 쿠데타와 지엠 정권의 붕괴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지엠 정권과 미국은 '반공'으로 동맹 국가였으되, 내부적으로는 경쟁하고 경합하는 관계였다. 굳이 말하자면 지엠은 그 공과와 득실을 모두 아울러 베트남의 전통과 문화에 기반을 둔 '내재적 발전'을 추구한 쪽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베트남의 주요 지도자 및 사상가들과도 맥이 닿는다. 쩌우를 좌로 계승한 이가 호치민이라면, 쩌우를 우로 모셨던 사람을 지엠이라 하겠다. 남북 두 지도자의 거리 또한 그다지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남부에서 지엠이 제거되자 분단 체제는 악순환을 그렸다. 북부에서도 레주언을 필두로 한 강경파가 득세하며 호치민마저 일선에서 물러났다. 남에서는 서구파가, 북에서는 동구파가 권좌를 틀어쥐게 된 것이다. 1964년부터 동구와 서구의 대결 또한 본격화되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베트남 전쟁,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격발된 것이다.

지엠의 제거로 미국은 베트남의 수렁에 더욱 깊이 빠져드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끝내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긴 북베트남 또한 동구화의 관성을 제어하지 못했다. 제3차 인도차이나전쟁과 '붉은 인도차이나' 점령으로 10년 이상 국제적 고립을 면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도이머이(1986년) 또한 '장기 20세기'의 관점에서 자리매김 하는 편이 한층 적절하겠다. 시장 개혁, 경제 개방의 한정된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서구화와 동구화의 시행착오 끝에 동방화의 궤적으로 재진입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쇄신'이라는 흔한 번역어보다는 '경장(更張)'이라는 옛말이 본뜻에 한층 부합할 것도 같다.

서구화도 아니요, 동구화도 아니며, 그렇다고 중국화도 아닌 독자적 개혁 노선을 밟고 있는 작금의 베트남은 명명백백 응우옌 왕조의 후예이자 후신임이 나날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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