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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대한민국은 불안 사회, 정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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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대한민국은 불안 사회, 정치 탓이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상임고문

지난 2일 국회 정론관에 "비례대표제 확대가 새 정치다!"라는 기치로 청년들(김예리·문유진·오세연·전형우·손어진)이 모였다. 그리고 청년들은 '새 정치' 중심에 있는 앞 세대 한 명과 마주한다. 유신시절 대학생이던 그는 우리 사회 민주화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다. 눈앞에 선명한 적은 다행스럽게도 그를 지치지 않게 만들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상임고문을 만났다. 기백 넘치는 그를 보며 탄탄한 스펙만큼이나 어려움 없이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열 남매의 막내로 자랐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용접공장과 판자촌도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난 대선에서 주장한 '저녁이 있는 삶'은 쉽게 나온 메시지가 아니었다. 겉모습은 그의 삶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 탄탄한 겉모습 뒤로, 힘겨웠던 시간을 부단히 이겨 낸 흔적이 감춰져 있었다.

국민 소득 2만 불 시대,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3%를 넘었다. 완연한 봄이다. 그러나 신체 건강한 청년들은 일할 곳을 찾지 못해 허덕인다. 노인들은 다음날 끼니 걱정에 폐품을 주우며 무거운 다리를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한다. 일가족 동반 자살은 흔한 뉴스가 됐고, 새로운 생명은 탄생을 주저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껏 지표가 무슨 소용인가. 이 모순의 원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불안정' 사회는 '불안정' 정치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지난 해 독일에서 '안정' 사회를 한껏 느끼고 온 그에게 청년들은 그 사회의 숨겨진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노인들이 대체적으로 풍족하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는 것이다. '우리와 차이가 무엇일까'를 생각했더니, 독일에는 개인의 생활을 안정하게 보장하는 복지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책을 뒷받침하는 안정적인 정치제도가 있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런 제도 도입을 위해 여러 차원에서 논의를 늘려가고,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정치권의 변화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상임고문 ⓒ프레시안(최형락)

- 경기고, 서울대, 옥스퍼드 정치학 박사, 그리고 귀국 후 대학교수, 국회의원, 경기도지사, 보건복지부 장관, 당 대표 등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대표적인 '엄친아' 이력이라서 부잣집 아들로 자랐을 것 같은데, 어린 시절은 어땠나.(손어진)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6.25 한국전쟁 후였기 때문에 모두가 어려웠지만, 우리 집은 열 남매였다. 그중 내가 막내였고, 열 명 중 세 명은 일찍 죽고 일곱 명이 함께 자랐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 아이들은 많지,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고생 덕에 공부할 수 있었다. 조금 자라서는 나의 형, 누나들이 돈을 벌어서 생활했다.

공식 이력에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서 두드려 맞고 고문을 당하고, 사형을 당하기 직전까지 갔다는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 학생운동 시절 무기정학을 당해 강원도 함백탄광에서 광부 일을 했던 일, 빈민운동 시절 도망자 신세로 떠돌다가 원주에서 과수원 일을 하고 서울 합정 철공장에서 용접 일을 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하지만 1970년대 나는 송두리째 그런 삶을 살았다.

10.26 사태가 일어났던 1979년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사망한 그 시간에 나는 김해 보안대에 갇혀 있었다. 그해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부마항쟁)이 있었는데, 정부는 진압을 위해 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현장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갔다가 보안대(지금으로 말하면 기무사)에 끌려가 48시간을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두들겨 맞았다. 서울에서 온 중앙정보부 대공수사단장이 죽지만 않게 때리라고 했다. 정말 누울 수도 없이 맞았다. 한참을 때리고 취조하더니 나가더라. 그 후 공포가 점점 더 심해졌다.

당시 서울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치안국에 끌려가 취조를 받았는데, 이들 수법은 한 번 취조를 하고 나갔다 돌아와 다른 새로운 자료를 가지고 더 악랄하게 취조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한 번 나간 수사관들이 다음날까지 들어오지 않아, 나는 바로 다음날 석방됐다. 알고 보니, 전날 저녁에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을 당한 것이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죽지 않았다면 아마도 난 사형선고를 당했을 것이다. 당시 나는 민주화 운동의 본산이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에서 활동했었기 때문에 나를 잡아 죽이기에 참 좋았을 것이다.

- 정치학자에서 정치인으로 넘어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오세연)

정치학 박사로 교수도 했다. 하지만 내 삶은 학자보다는 운동가로서의 삶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한일회담 반대 운동, 학원 자율화 운동 및 민주화 운동을 학내에서 주도했다. 고등학교 동기 동창이었던 조영래 변호사, 고(故) 김근태 의장과 셋이 각각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에서 학생운동의 리더 역할을 했다. 당시 사람들이 우리더러 ‘삼총사’라고 했다. 몇 번의 무기정학과 옥살이 끝에 군대 제대 후 간신히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구로공단에 들어가 소설가 황석영과 자취방에 살면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박형규 목사와 함께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운동을 했다. 그러나 빈민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2년 정도 도망자 신세로 떠돌아 다녔다. 강원도 원주 과수원 농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서울 합정동 용접공장에서도 일했다. 그러다 붙잡혀 또 1년 정도 감옥 생활을 했다. 그 뒤 NCC 인권운동 간사로 일하면서 1979년 10월 부산에 내려갔다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다음 해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이했다. 이런 기간들이 나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큰 부분들이다.

내가 정치학을 공부하고 학생운동을 했지만 정치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다만 '혁명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젊을 때 사진이 하나도 없는데, 졸업 후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가면서 사진을 다 태웠다. '혁명가는 사진을 남기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왜 어릴 때 사진까지 태웠을까' 참 어리석다.

ⓒ프레시안(최형락)
대학 졸업 후, 딱 한 번 취업시험을 본 적이 있다. 한국전력에 들어가 노조위원장이 된 다음, 어느 날 서울시의 불을 확 꺼버리면 혁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다행히 이 나라를 위해 당시 한전에서 나를 떨어트렸다(웃음).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엄청난 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그전까지는 청와대를 쳐다본다고 해서 롯데 호텔 북쪽 창문은 열지도 못했다. 북악산 스카이웨이는 어림도 없고, 인왕산도 오르지 못했다. 그랬던 시절이었는데, 비리의 온상지였던 '청와대 안가를 철폐한다' '하나회를 없앤다'며 인왕산과 청와대 앞길을 개방했다. 그때 경기도 광명시 보궐 선거가 있었는데, 광명이 고향이기도 하고 당시 불고 있는 개혁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출마했다. 이것이 정치 진출의 계기가 됐다.

- 작년 한 해, 독일에 있다가 돌아왔다. 최근엔 여야를 가리지 않고 독일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실제로 경험해보니 특히 정치 영역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문유진)

독일의 첫 느낌은 굉장히 안정적이라는 것이었다. 국민의 전반적이 삶이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안정적으로 정착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식당이나 상점에서 보이는 노인들이었다. 물론 행색이 초라한 노인들도 간혹 볼 수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풍족하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우리와 달리 노인들의 생활이 왜 이렇게 안정되어 있는 것일까. 독일 노인의 95%가 연금 혜택을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실제로 독일 노인이 전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한다. 내가 버는 돈에서 일정 비율을 노인 연금으로 내면, 내가 노인이 됐을 때 나의 생활을 보장해 주는 돈이 되는 거다. 거기에 정부에서 노인에게 제공하는 혜택 또한 많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주택 보조금도 제공된다. 그리고 학비는 전체가 무료다. 1년에 500유로(약 70만 원)정도만 내는 한 주를 제외하면, 대학까지 무료로 공부할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영역에서 개인의 생활을 안정하게 보장하는 복지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더 들여다보니, 이것의 바탕에는 독일 정치제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통 '복지'라고 하면 진보정당의 정책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데, 독일 복지는 '철의 재상'이라 불리는 비스마르크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것은 언론도 다수결도 아니다. 피와 철에 의한 개발을 통해서만 문제가 해결된다"라면서 개발독재를 행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정부에 반하는 가톨릭과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탄압하려고 보니까 사회주의의 기본 단위인 노동자를 회유하는 것이 필요했고, 노동자를 사회주의 정당으로부터 갈라놓기 위해서 복지제도를 정책적으로 채택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노동자들에게 질병보험, 산재보험, 노령보험을 주기 시작 했다. 실제로 당시 사회주의 정당에서는 이러한 정부의 복지정책을 "우리와 노동자들을 갈라놓는 정책이다"라면서 반대했다고 한다.

이처럼 역설적이게도 독일은 독재를 하더라도 사회적인 안정을 위해서는 복지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1·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복지정책을 중단하지 않고 시행해왔다. 국가경제가 어려울수록 국민들이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수요가 생기고 이것이 산업 발전과 연결된다는 선순환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 독일 정치가 국민 통합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독일의 정치적인 안정이 독일의 번영을 가져왔다.

- 독일에 다녀온 이후 손학규 고문의 강연이나 인터뷰를 보면, '비례대표제' '온건다당제'를 핵심으로 하는 '합의제 민주주의'를 얘기를 많이 하는 듯하다.(전형우)

독일은 내각제 국가로 1949년 서독을 중심으로 연방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65년 동안 18번의 선거 과정에서 8명의 총리만 배출됐다. 이것은 독일 다당제에 의한 연립정부 구성이 정치적 안정을 가져온 중요한 근거가 됐다. 독일 의회에는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정당이 없다. 1957년 기민당이 딱 한 번 전체 497석 중 270석을 얻어 절대 다수정당이 되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자민당과 연합해 단독 과반수 정부가 아니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다른 정당과의 연립을 통해 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은 연립한 정당의 정책까지 받아들여 타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장관 몇 자리만 주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 정당의 정책을 수용하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이 현 메르켈 정부가 발표한 '2023년까지 원자력 발전소를 전부 폐지할 것'이라는 정책이다. 실은 메르켈은 원자력 발전을 찬성하는 기민당 출신이고 메르켈 자신도 원자력 지지자였다. 그러나 2005년 기민당과 사민당과 대연정을 이룬 시기에 사민당의 의견을 받아들여 '원자력 수명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채택했다. 2009년 기민당이 자민당과 연정을 하면서 다시 이 정책을 번복하려 했지만,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벌어진 이후에 국민 안정이 우선이라며 원전 폐지 정책을 다시 채택했다. 그런데 사실은 1998년 사민당과 녹색당이 연정을 하면서 사민당이 녹색당의 원전 폐기 정책을 받아들인 것이 시작이었다. 이렇듯 연정을 함께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집권당이 되지 못한 정당의 정책도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예가 독일의 통일 정책이다. 독일 통일은 1969년 사민당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기초가 돼 사민당-녹색당, 사민당-기민당, 기민당-자민당의 연정 속에서 한스 디트리히 겐셔가 무려 18년 동안 내무 장관 및 외무장관을 지내며 통일정책을 이어갔다. 연립 정부를 통한 연속적인 통일 정책이 독일의 통일을 가져왔고, 이런 안정적인 정치체제 속에서 사회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 비례대표제를 핵심으로 하는 합의제 민주주의는 무엇인지, 이것이 왜 한국 정치에 시급하게 필요한 것인가.(전형우)

우리 사회가 경제적·사회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정치적 대결구도마저 심해져 '증오의 정치'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타협을 모른 채 이념적으로 분열되는 상황에서 국민통합과 사회통합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 역시 절실하다. '통합의 정치'를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독일 연립정부를 통한 합의제 민주주의 방식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독일식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제도'가 바탕이 됐다고 생각한다.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투표할 때 (우리나라와 같이) 하나는 지역구 의원에, 다른 하나는 정당에 투표를 한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비례대표로 할당되는 의원 수가 적을뿐더러 각 정당이 만든 비례 순번에 의해 정당 득표율만큼 의석을 가져가기 때문에 비례대표는 정당의 지도부가 뽑은 사람들로 이뤄진다. 사실상 대표성이 부족하고, 우리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인 지역주의를 타파하지 못한다. 하지만 독일은 전체 600명의 국회의원 중에 300명은 지역구 의원, 300명은 비례대표 의원으로 기본적으로 정당투표에 의해 600명의 의원수가 각 정당 득표율에 따라 배분된다.

ⓒ프레시안(최형락)

예를 들어 어느 당이 정당득표에 의해 40%를 얻으면, 먼저 전체 의석 중에 240석을 얻는다. 거기에서 전 지역의 지역구 의원 140명이 선출되면, 나머지 100명은 지역별로 나눠 비례대표로 당선시킨다. 만약 전체 의석수가 50석인 지역에서 그 50석을 모두 기민당이 차지했다면, 그 지역에는 더 이상 비례대표 의원으로 기민당 의원이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독일 바이에른 주의 경우, 지역구 의원 100%가 기독교사회연합 출신인데, 사민당 의원은 비례대표에 의해 의원 17명 정도를 배출했다. 정당 득표로 할당된 남은 비례대표 의석을 그 지역에서 가져가기 때문이다. 보통 비례명단에는 지역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올라간다. 대표적으로 콜 수상은 13년 동안 국회의원직을 하면서 지역구에서는 한 번도 당선돼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독일식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우리나라에 적용한다면, 민주당 후보가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에서 국회의원이 될 수 있고, 새누리당 후보도 광주·전남지역에서 의석을 차지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지역마다 화합을 이룰 수 있고 정치적으로도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이 선거제도에서는 제3의 정당이 국회에 들어올 수도 있다. 만약 진보정당이 정당투표로 10%를 얻으면, 현행 300석 중 30석은 어찌 됐든 갖고 오는 것이다. 제1당이 40% 득표율로 120석을 갖고, 제2당이 30%로 90석을 갖는다면, 제1당과 2당이 대연정을 할 수도 있고 제3당이 캐스팅보트가 돼 제1당과 2당이 연립을 구성할 수 있다. 보통 독일의 경우, 의석수가 가장 많은 제1당이 우선적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제2당이나 3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다. 이를 통해 정책이 교환되는 '합의의 정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 지적했듯이 각 정당의 비례명부를 작성하는 방식이 또한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생각해 놓은 방안이 있나.(김예리)

중앙당에서 하향식으로 하는 법은 안 된다. 우리의 경우는 '석패율 제도'처럼 떨어진 후보 중에 가장 득표율이 높은 사람부터 명부에 순위를 넣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사실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중요하다는 주장은 그간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계속 제기됐다. 하지만 현실 가능성 측면에서 늘 한계에 부딪혔다. 현재의 소선거구 일위대표제가 중심이 되는 선거제도 하에서 혜택을 보고 있는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 정치인들이 이런 개혁안에 동의할 리가 없다는 것이 이유다. 문제 극복 방안이 있는가.(문유진)

지금 정치권에 의존해 독일식 비례대표제로의 선거제도를 개혁하자고 주장하면, 기득권 유지 차원에서 잘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제도 개혁 이슈가 공론화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당장 오늘 법을 고쳐서 내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먼저 국민 여론으로 이해되고 동의되도록 ‘국민운동’ 차원의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 지난 3월 19일 새정치민주연합 새정치비전위원회에서 첫 번째 개혁안으로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 도입을 제시, 구체적인 실행 방안으로 '시민회의'를 제안했다. 그러나 개혁안 제시된 이후,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는 어떤 반응도 보이고 않고 있다. 오히려 "비례대표 의원의 지역구 출마 금지를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새 정치'의 핵심 내용이 내부에서 제시됐지만, 이를 제대로 소화하기는커녕 반대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김예리)

새정치비전위원회의 안이 나왔다고, 이것을 바로 새정치민주연합이 채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무리다. 새정치비전위원회는 모두 외부 인사로 구성되어 있어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인 안을 내놓는다. 신당을 구성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당면 과제에 있어 비전위원회의 안을 바로 받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 지난 2월 동아시아 미래재단에서도 '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한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당장 언론에서도 관심이 없고 제한적으로만 보도하더라. 우선, 일반 대중의 욕구가 얼마나 강렬한가가 중요하다. 한 사람이 중요하다고 떠든다고, 일부 청년이나 소수 정당들이 하자고 한다고 해서 파급력이 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논의를 여러 차원에서 다양하게 벌이고 언론을 통해 계속 이야기하면서 오늘(2일)처럼 청년들이 나서서 국민적 관심사로 만들어야 한다.

조급한 마음으로야, 당장 이 선거제도가 선(先)이고 옳은 것이기 때문에 시행됐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안 된다. 정치제도 개혁이라는 것이 그렇다. 독일에 돌아온 후, 기존 민노당 같은 진보 정당이 요구했던 것과 다른 차원에서 비례대표 선거제도의 개혁, 합의제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를 제기했다. 앞으로 국민운동 차원의 캠페인을 다각적으로 벌여 보자.

- 개혁도 세력이 있어야 성공 가능하다. 혹시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 내에서 손학규 상임고문과 선거제도 개혁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있는가.(전형우)

앞으로 해나갈 일이다. 국회에서 개헌모임이 있는데, 현재의 주된 관심사는 분권형 권력구조에 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례대표제에 대한 내용은 공론화 과정을 거쳐 의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이해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착실하게 동조자를 규합하고 넓혀 나가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오세연)

이런 말을 부탁받으면, 참 난감하다. 맹목적으로 '용기를 가져라'라고 하는 소리가 얼마나 공허하게 들릴까. 청년들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뭐라고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 남이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하고 막 던질 수 있겠는데….

내가 청년이었을 때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감옥에 가고 고문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당했던 시간처럼 요즘 청년들에게도 그만큼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때는 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부심의 대상이었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온 우주가 내 가슴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청년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일자리 걱정, 즉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청년이 가질 수 있는 기백(氣魄)을 찾기가 힘들다. 사회 자체가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아 참 안타깝다.

나는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을 좋아한다. '처소를 달리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라는 말로 내 삶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고 살라는 말이다. 아무리 외부 환경이 어렵더라도 내 인생과 행복은 내가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것을 내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다.

콘라트 아데나워도 같은 사람도 나치 치하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고 기민당 총수가 돼 독일 초대 수상이 됐다. 윌리 브란트는 독일 역사뿐 아니라, 세계 역사상으로도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던 (요새 말로) 문제아 학생이었는데, 나치 저항운동을 하는 등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다 후에 사민당 출신 최초 총리가 됐다. 이런 인물들이 오늘날 한국에서 나오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

- 자유란 무엇이라 생각하나? (손어진)

이 인터뷰의 제목이 '자유인'인 것이 참 재미있다(웃음). 철학적으로 자유는 네거티브 프리덤(negative freedom)과 포지티브 프리덤(positive freedom) 두 가지로 나뉜다. 네거티브 프리덤은 외부적인 압박 또는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포지티브 프리덤은 내면적인 자유를 말한다. 내 생각을 자유롭게 하고 내 스스로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상태가 포지티브 프리덤이다. 우리 사회가 제도적인 면에서 민주주의를 이뤄가며 개인이 외부적인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는 많이 얻었는데, 개개인의 삶이 내면으로부터의 속박에서 얼마나 벗어났느냐 하는 것은 의문이다.

정치인의 위치에서 나는 외부적인 제약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내 생각을 어떤 틀에 가두지 않고 인간의 내면과 본질에 비춰서 생각함을 통해 내면의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과 이어질 수 있겠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존엄성에 대한 자기 확신을 갖는 것에부터 내 내면의 자유가 시작된다.

정치의 목적도 좀 더 많은 사람이 혹은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사회로 만드는 것에 두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이것 또한 내면의 자유를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라는 것은 내가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인식과 철학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의 개념은 같이 가는 거다. 내 경제 활동과 내 기업 활동의 자유를 이유로, 다른 사람의 경제 활동과 기업 활동을 속박한다면 그것은 진짜 자유가 아니다. '누구나 같다'는 인간의 존엄성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바탕에 가지고 있으면, 자유 또한 나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것을 실현하는 사회적 가치가 바로 '정의'가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의 자유'이다. 함께 누릴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여기서 제도로서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뒷받침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김예리비례대표제청년포럼 부위원장·문유진 복지국가청년네트워크 사무국장·오세연 청년유니온 사무처장·전형우 청년녹색당 운영위원·손어진 정치경영연구소 선임연구원이 진행했으며, 정리는 조경일 정치경영연구소 연구원과 손어진 선임 연구원이 맡았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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