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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품격 : 사회적 망각과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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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품격 : 사회적 망각과의 투쟁

[김민웅의 인문정신] 이인임 그리고 키케로의 품격

“힘없는 자의 용기만큼 공허한 것도 없지요. 세상을 바꾸려거든 힘부터 기르세요. 고작 당신정도가 떼를 쓴다고 바뀔 세상이었으면, 난세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고려 말 이인임이 정도전에게 하는 말이다. 그는 또 이렇게 입을 연다. “전장에서는 적을 만나면 칼을 뽑아야하지만, 조정에서 적을 만나면 웃으세요. 정치하는 사람의 칼은 칼집이 아니라 웃음 속에 숨기는 것입니다.”

인기를 끈 드라마 <정도전>에서 유명해진 이인임의 대사다. 이것이 사실(史實)인지는 모르나, 그는 고품격 사대부의 격조를 갖추고 음모와 책략의 지휘자로 군림한다. 그렇지만 그의 정치는 오로지 자신의 특권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인임의 품격은 흉심(凶心)을 감추기 위한 위장일 뿐이었다. 정도전의 토지개혁 구상은 이인임에게 가장 경계할 수밖에 없는 정치였다. 그런데 이인임이 지키려 했던 고려는 귀족들의 토지독점이 낳은 모순으로 끝내 붕괴하고 만다. 그렇게 되기 전 그는 제 꾀에 저가 넘어가는 자충수로 몰락한다.

적 앞에서 짓는 이인임의 격조 있는 미소 뒤에는 고려 백성들의 고통을 아랑곳 하지 않는 권세가의 탐욕이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던 것이다. 정적에게조차 매력을 풍겼다는 그의 모습은, 그 밑에 짓밟힌 이들에게는 악령의 실체였다.

▲ 드라마 <정도전> 속의 이인임 ⓒ KBS 화면 캡쳐.


로마의 키케로는 뛰어난 웅변가에 공화정을 철저하게 방어한 사상가였다. 집정관 선거에서 경쟁자였던 카탈리니가 선거에서 떨어진 이후 원로원에 대한 쿠데타 음모로 탄핵대상이 되었을 때, 키케로는 현란한 연설로 사태를 주도한다. 이 사건으로 그는 영광의 도시 로마의 수호자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데 성공, 이후 국부(Pater Patriae)로 불리게 된다. 키케로는 카틸리니를 공격하고 난 뒤 이렇게 말한다. “우리 조국의 이익은 내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냈다. 나의 용기, 지혜, 그리고 통찰력이 우리 국가를 위기의 무덤에서부터 구해냈다.” 탁월한 인물이라는 그의, 자만에 가득 찬 자기미화다.

카틸리니의 음모는 이후 조작이라는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그가 썼다고 하는 편지가 원로원에서 낭독된 후 카틸리니는 “국가의 공적(公敵)”으로 선언되고 탄핵대상으로 전락했다. 이 편지를 공개한 자는 보수 세력의 맹장 퀸투스 카툴루스였다. 이때 키케로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의 뒤에는 카틸리니가 있다. 로마의 그 어떤 범죄자들을 붙잡고 물어보라. 카틸리니와 친하지 않은 자가 있는가를. 살인이 있는 곳에 살인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가 바로 카틸리니다.” 키케로가 카틸리니와 관련된 자들이라고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마녀사냥을 벌인 것은 물론이다.

카틸리니는 무엇을 주장한 정치가였던가? 그는 민중들이 지고 있는 채무를 청산해주고 토지재분배를 정책으로 내세웠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그 흐름 속에 있는 마리우스의 노선에 이은 개혁정치의 지도자였다. 카틸리니의 인기는 원로원이라는 기득권 세력에게 위협이었던 것이다. 훗날 카이사르가 암살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카이사르가 제왕이 되려한다는 이유로 공화정 수호를 명분으로 내세운 암살모의는, 사실상 민중의 인기를 모은 카이사르에 대한 귀족들의 역습이었다. 카이사르 역시 채무의 청산과 토지재분배, 그리고 귀족들의 특권 일부의 해체를 시도하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민중파 지도자 마리우스는 카이사르의 숙부였다.

키케로가 그토록 지켜 내려 한 공화정과, 그 정치기구인 원로원은 특권의 집합체였고 그의 품격과 지식, 연설의 능력은 모두 이 특권을 방어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도대체 그렇다면 그토록 명성이 높은 키케로의 품격과 지식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민생 정치”의 허구

정치가 사람들에게 하도 환멸을 가져오니까 품격 있는 정치를 바라는 목소리가 높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도 그런 현실의 반영이다. 그런데 그것은 격조 있는 언어와 자세를 구사하는 정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관점과 내용이 격을 갖추지 못하면, 그건 빛 좋은 개살구가 된다. 또는 본질을 비켜가거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의미 있는 싸움을 회피하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정치의 품격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에 답하기 전에 현재 한국 정치는 어떤 모습인지부터 보자. 한 마디로 민주주의의 실종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국민대중이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는지를 토로하고 그에 대해 듣고 논의할 수 있는 정치의 장이 펼쳐져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경제적 현실에 대한 개선요구만이 아니다. 정치의 올바름, 정의로운 법 집행, 정책의 공정성, 민주주의의 위기 등에 대한 논의를 모두 포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안들은 “민생”이라는 말 앞에서 무력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민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권리의 확보가 그 우선적 전제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의 존엄한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정치권력이 문제제기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는 상황에서의 민생이란, 그 권력이 시혜적으로 베푸는 정책에 만족하는 것 외에는 다른 말은 하지 말라는 식이 되어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훼손되면 국민 대중은 거대 자본이 가져가고 남은 것 가운데서 개평이나 나눠 갖는 남루한 신세가 되고 말 뿐이다.

그 결과 사회적 갈등은 심화되고 이걸 해결하는 능력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역사발전의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치적 소통의 구조는 대단히 폐쇄적이고 배타적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현실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이어지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는 중이다.

이를 본질적으로 파헤쳐보자면, 사실상 파시즘 정치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파시즘의 해부』(The Anatomy of Fascism)을 쓴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은 “대중정치 시대의 발명품”이라면서 국민을 국가의 권위에 충성하도록 하는 가운데 개인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며 운용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 of Totalitarianism)에서 밝힌 바 있듯이, 인간을 국가의 지침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 종속시키는 동시에 사회적 연대로부터 절연된 “개인의 원자화”를 만들어내는 방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원자화된 개인은 현실 비판의식을 가지고 정치적 억압이나 경제적 착취에 맞서기에는 무력하다. 이런 개인이 많아질수록 권력의지는 더욱 용이하게 관철되고, 개인은 동원과 조정의 대상으로 전락해가며 소통의 주체성은 찾기 어렵게 된다. 또한 국가 지침의 실행에 방해가 될 만한 문제제기의 공간은 닫혀 진다. 권력은 정책 추진이 잘 되지 않을 때에는 홍보 부족이라고 생각하고, 엄청난 예산을 투입해서 프로파간다라고 볼 수밖에 없는 선전활동에 집중한다. 비판적 담론과 합리적 논의는 이러는 가운데 사라진다.

선거는 “자본의 사제”를 뽑는 제의인가?

한국 정치의 현실을 탐구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될 또 하나의 대목이 ‘자본이 지휘하는 정치’라는 점이다. 이는 사실상 한국 정치의 척추를 이루는 사안이다. 1999년 IMF 관리체제 이후 한국이 혹독하게 경험한 것은 자본이 국가를 통솔하고 국가의 기능을 동원해서 그 이해관계를 노동 배제적으로 실현한다는 사실이다. 부자 감세, 전임노조 임금지급 제한 등으로 상징되는 노조에 대한 정책적 압박, 용산참사에서 목격했듯이 재개발 지역민들에 대한 불공정 정책, 4대강 사업에 따른 사회복지 예산 부족, 주요 공기업에 대한 민간자본 지배구조 만들기 등 모두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치가 무엇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문 지리학자이자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자인 데이비드 하비는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A Brief History of Neoliberalism)에서 신자유주의 정치의 본질은 “계급 권력의 복원”(the restoration of class power)이라고 단언했다. 이는 자본에 대한 국가적·사회적·문화적 제동장치를 해체하는 것이며, 국가가 자본의 수하기관이 되어 노동을 통제하고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것이다. 하비의 표현대로 공적 자원과 세제를 기반으로 “기업 복지가 인민의 복지를 대체해버린 상황”(Corporate welfare substituted for people welfare)이 되었다.

신자유주의 정치는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지적했듯이 “사회가 시장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빈곤이 창출되는 구조” 속에 더 깊이 빠져드는 길이다. 물론 신자유주의 정치가 걷잡을 수 없이 세력을 키우며 한국 정치의 중심을 완벽하게 장악한 것은 아직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자본의 자유를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겉으로는 서민정책을 내거는 권력집단에게도 정치적 부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자본이 약속해주는 욕망에 압도되고 있으며, 자본주의 안에서의 성공을 선망하는 까닭에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이해는 깊지 못하고, 이를 정치적 주제로 삼아 해결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자유주의 정치가 단지 계급권력의 복원을 통해 이해관계를 관철해나간다는 점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의 공동자산을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 독점하고 약탈해가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에 대한 청산의 정치가 가능하다. 이른바 “민영화”는 기본적으로 “공적 자산에 대한 거대 자본의 사유화(privatization)”이다. 공적 자산이 거대자본에게 넘어가는 것은 민주주의의 심화된 논의 체계 속에서는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과 동맹을 맺은 국가는 대중의 시선이 차단된 공간에서, 거대자본에게 이 자산을 넘긴다. 그것은 국가의 허가 아래 이루어지는 명백한 불법거래다. 이런 상황을 막지 못하면, 마르크스가 우려했듯이 “국가가 자본의 운영위원회가 되는 상황”이 지속될 뿐이다.

국가론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분석과 견해를 탁월하게 제시한 니코스 풀란차스의 견해는 그런 각도에서 중요하다. 그는 대중의 출현으로 인해 국가가 자본의 기본적인 헤게모니를 인정하는 장기적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해도, 국가는 자본에 일방적으로 장악당한 기구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장”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즉 국가가 자본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을 파고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대중의 지지와 신뢰라는 항목과 자본의 이해라는 항목이 서로 충돌할 때, 권력은 저울질을 한다는 것이다. 선거체제가 작동하는 한 이는 당연하다. 대중의 지지와 신뢰가 동요하면 자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자본에 일정한 손해를 끼치더라도 자본의 단기적 이해를 압박하는 변화를 보일 수도 있다고 본다.

이는 국가와 자본의 일체화 현상에 대한 “대중의 저항운동”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일깨운다. 그런 운동이 확산되어갈 때, 국가는 자본의 지휘권에 일정한 제동을 걸고, 그런 공간에서 자본의 헤게모니를 넘어 정치·경제적 선택이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정치를 자본의 거대한 성채 앞에 헌납하는 일상을 반복하게 되고, 선거는 ‘자본의 제사장’을 뽑는 정치적 제의가 되고 만다. 자본주의 정치에 대한 대안이 없다고 저항을 포기하는 순간, 대안을 논의할 공간마저 사라진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사회적 망각과의 투쟁

그렇다면 이러한 현재를 극복하고 격조 있는 정치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많은 노력과 대안들이 제시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만 핵심으로 뽑아 말하자면, “사회적 망각과의 투쟁”이 가장 절실하다.
우리 사회는 아무리 충격적인 사건을 겪어도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그 일에 대해 깨끗이 잊고 산다. 권력은 이걸 이용해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버틴다. 그 사이에 희생되는 이들의 처지는 극도로 취약해진다. 한편 사람들은 사건과 사건의 고리를 짜임새 있게 연결시켜 하나의 큰 그림으로 읽어내지 않고 사건 자체의 화제성에만 몰두하고, 시간이 좀 지나면 이내 시들해져버린다. 사유의 깊이가 얕고 가벼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의 내적 변화에 대한 성찰도 깊게 다져지지 않는다. 무엇이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했는지, 무엇이 우리를 일으켜 세웠는지 또 무엇이 우리에게 절망과 희망을 주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뭔가에 쫓기듯 줄곧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한다. 이런 곳에서 역사의식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기에, 당장 필요하고 실용적인 것은 뭐냐, 라는 질문에 대해 조급히 답하기에 바쁘다. ‘본질적 가치’에 대한 논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겨를은 좀체 없다. 그런 곳에서 정치는 망각을 밥으로 삼아 기만을 일삼는다. 망각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진실을 왜곡되게 재구성하는 토대가 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약자를 위한 공동체의 책임과 연대를 구축해갈 정치는 뿌리를 내릴 토양이 없게 되는 것이다. 현상의 본질 또는 진실에 대한 접근은 차단된다. 권력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주장만이 합법적이고 그밖에는 불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을 끊임없이 새롭게 불러들이는 일은 모든 정치행위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원인도 모르고 책임도 불분명해지며 가야 할 목표도 헷갈리게 된다. 되돌아본다는 것은 ‘지나고 보니 전체가 보인다.’라는 깨달음과 맞닿아 있다. 현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 좌표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국정원의 대선 불법 공작사건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의제목록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면교사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다.

결국, 쉽게 망각하는 공동체는 현재에 대해서도, 앞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도 무지해진다. 현실을 세심하게 기록하고 그 안에 담긴 본질을 응시하는 일은 우리 자신을 아는 일이다. 자신을 빼놓고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는 이는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자다. 그런 이가 많은 사회에서 정치는 권력이 정한 방향으로 눈이 먼 채 질주하게 마련이다.

저널리즘과 역사학이 한 몸이 되어서 새로운 질문에 지속적으로 마주하는 일은 정치의 질적 발전을 위해 반드시 요구된다. 오늘날 한국의 저널리즘은 빠른 속도로 과거의 망각 위에 새로운 뉴스를 포화상태로 만들고, 역사학은 현재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이걸 넘어서야 한다.

“사회적 망각과의 투쟁”은 정치의 격을 무너뜨리는 독선적 권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적 정치철학의 모든 출발점은 지난 시기의 역사에 대한 기록과 성찰에서 비롯되었다. 한 시대가 겪은 사건에 대한 기억이 말소되지 않도록 지켜갈 때 비로소 내용이 갖춰진, 품격 있는 정치가 가능해진다. 격조 있는 정치는 정치 공학적 발상에서 나온 기만과 술책을 거부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모멸적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강자를 위한 계급권력의 복원에 저항한다.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면, 답이 나온다. 역사를 스승으로 모시지 않는 정치는 망각의 늪에 빠진, 뇌가 없는 정치가 된다. 그런 정치가 생각의 변화를 가져올 능력이 있을 턱이 없다.

생각이 바뀌지 않고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갈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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