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편집위원인 성공회대 김민웅 교수가 새로운 칼럼을 시작한다. 제목은 [김민웅의 인문정신]이다. 그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변화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넘어, 그 밑바닥에 깊숙이 존재하는 “인식”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는 진정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생각의 뿌리를 노출하고 그것을 해부해서 본질을 공개해나가는 노력이 쌓여갈 때, 우리 자신과 세상의 달라짐을 이루어낼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그의 희망이다.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도 문명사와 인문교양 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그는 이 칼럼을 통해,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에서 했던 것과 같은 서평작업과 함께 우리의 시대가 고민해야 할 근본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펼쳐나갈 것이다. 편집자
별에서 온 도정일
바보의 재능과 건달의 재능
책 제목부터 엉뚱하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라니? 쓰잘 데 없어서, 쓰잘 데 없어도, 고귀한. 음, 어느 쪽일까? 그리고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는 제목만 보면 무슨 시집인가 하겠다. 혹은 천문학과 토목공학의 관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인가? 이 두 권은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7권으로 기획한 “도정일 문학선”의 1, 2권이다. 문학평론가이자 교육자이며 도서관 운동가인 그가 2008년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생각의 나무 펴냄) 내놓은 뒤 오랜만에 나온 저작이다.
지난 20년 동안 써낸 각종 칼럼을 모아 낸 것이라고 하는데, 그걸 다 언제 이렇게 긁어모았는지도 놀랍거니와 출간된 건 아직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은 분량이라니 이 저자는 도대체 어디서 온 외계인인가? 컴퓨터 파일에 저장하기에 망정이지 옛날처럼 원고지였다면 어쩔 뻔 했을까. 저자인 도정일은 청탁이라는 동전만 집어넣으면 글이라는 커피가 그냥 나오는 자동판매기도 아닐텐 데, 아마도 별들 사이에 길을 놓을 정도니까 이렇게 되는 모양이다.
독자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글마다 다른 색깔과 풍경이 담겨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궤도를 장난스럽게 이탈하는 유쾌한 풍자가 글 쓰는 법에 대한 깨우침과 글 읽는 즐거움을 곳곳에서 선사해준다.
신화적 상상력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인간에 대해 그는 “바보의 재능과 건달의 재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건 그가 말하는 대로 “붕어빵을 찍는 교육”, 아이들의 영혼을 “작은 상자에 가두는 교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그 바보와 건달의 재능을 겸하고 있는 도정일의 다음과 같은 글은 어떤가?
“청정 수행자에게 구도의 길은 신통술 터득의 길이 아니다. 이를테면 가사 장삼 주머니에 뭉칫돈이 날아들게 하는 것은 신통술일 수 있지만 스님의 먹물 옷 주머니는 그 안에 뭉칫돈 넣고 다니라고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스님이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오래 된 무덤 속처럼 텅텅 빈 주머니 안의 공허를 맨손으로 만지기 위해서다. 제로零를 애무하는 것은 불교적 구도의 핵심이다.”
수도자가 애무를 한다? 신성모독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걸 불교적 구도의 핵심 자세라니 너무 나가신 것은 아닐까? 그러나 진정으로 제로를 애무하지 않으면 그게 어디 수도자인가? 아니면 슬쩍 다른 걸 애무할 소지나 혐의가 매우 커지지 않겠는가? 허욕을 다스리는 마음에서 진실이 나온다. 도정일은 이런 방식으로, 세상이 집착하다시피 애써 쓰다듬고 제 손에 기필코 넣으려는 것들에 대해 인문학적 제동을 건다.
산치부족 이야기
그래서 그는 산치부족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산초가 아니라, 산치다.
“음정 잡는데 노상 실패하는 사람이 음치라면, 숫자 계산에 밝지 못한 사람은 '산치(算痴)'라 부를 만 하다. 계산에 서툰 사람, 계산하기를 싫어하는 사람, 계산을 거부하는 사람이 '산치부족'을 구성한다.”
그런데 도정일이 여기서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세 번째 등급, 계산을 거부하는 종족이다.
“그는 산치를 적극적으로 선택한 산치, 지상의 산법을 버리기로 작정한 퍽 '철학적'인 산치다. 그는 세상이 의존하는 기초 산법의 신빙성을 문제 삼기도 하고 그 자신만의 독특한 산법을 내놓기도 한다. 1+1이 2라고? 천만에 1+1은 1이야, 라거나 2+2는 반드시 4가 아니다. 5일 수도 있고 8일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산법이다.”
이 산치는 오늘날 “세상의 희귀종”이고 “사라져가는 부족”이며 “박물관의 구경거리”다. 이렇게 된 까닭은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목표가 “산치박멸”이기 때문이란다. “산치부족을 데리고서는 어느 나라도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시장의 시대에 산치는 어느 구석에도 쓸모없는 완벽한 미스피트misfit 부적합자, 사회의 짐, 없어져야 할 바보 천치다.”
그러다보니 문학에서조차 이러한 산치를 만나지 못하는 우울한 시대가 되었다고 도정일은 진단한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산치의 공식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계산의 천재만을 키우려드는 사회는 인간을 반 토막 내고 보물을 내던져 역설적으로 계산에 실패하는 사회다. 문학이 각종의 산치 바보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갖는 것은 그들에게 인간의 한 절정이 있다는 진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계산의 천재로부터 상상력은 나오지 않으며,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깨달음은 태어나지 못한다. 질문의 기쁨보다는 주어진 규격에 갇혀 정답에 대한 골몰로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유폐시키고 만다. 그래서 그는 이런 인간을 아나톨 프랑스가 말한 “베르제 선생의 강아지”로 비유한다.
“베르제 선생의 작은 강아지는 하늘의 푸르름을 쳐다본 적이 없다.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강아지에게는 푸른 하늘, 여름 저녁의 노을, 눈 내린 숲의 아름다움은 관심사가 아니다.”
물론 이런 관심사를 가진 강아지가 꼭 없다고 우길 수는 없으나, 있다면 그건 분명히 베르제 선생이 기르는 강아지는 아니다. 여기서 방점은 “강아지”가 아니라 “베르제 선생의”에 있다. 사실상 우리는 온통 베르제 선생의 강아지를 도처에서 키우고 있다. 이 강아지 기르기의 교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자라는 데는 왜 시간이 걸리고 과일은 왜 천천히 익고 씨앗들은 왜 겨울 눈 더미와 지층 사이에서 서서히 싹 틔울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성장은 왜 업그레이딩과 다른가?”
인간의 느림, 폭력이 된 교육
그래서 그는 기다림, 느림의 윤리가 교육에 얼마나 소중한지를 역설한다. “인간의 성장 속도가 느린 것은 그 느린 과정에 의해서만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 능력들이 자라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키우는 과정은 느려야 하고 숨통 조이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여유로워야 한다.” 도정일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속도의 포로”가 된 어른들이 “정신의 기형적 위축을 성장”이라고 부른다면서 아파한다.
도대체가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일주일이란 어떤 것인가?
“월요일의 아이는 피곤하고, 화요일의 아이는 졸립다. 수요일의 아이는 더 졸립다. 목요일의 아이는 눈이 무겁고 금요일의 아이는 온몸이 무겁다. 토요일의 아이는? 토요일의 아이는 퉁퉁 부었네, 다.”
그는 진정한 교육이란 그 안에 도덕의 나침반과 비판력의 초침이 있다며 이를 준비하도록 촉구한다. “비판력이 마비될 때 망각은 죽음의 책략”이라고 똑 부러지게 짚고 있으며, 도덕의 나침반 없는 목적설정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건 인간이면 다 자동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생명체의 몸에 새겨진 유전자는 “자신의 미래가 적힌 일기장”이기도 하지만 그건 문화적 유전자와 함께 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내면에 숨 쉬는 그리움, 사유의 즐거움, 이성의 진보와 같은 것들은 문화적 유전자의 요람인 독서와 교육에서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난다.
그러기에 그는 도서관이 우리 사회에서 주변부화된 것에 그토록 애타하며, 책 읽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운다. 그건 어쩌면, 그런 일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돈만 쫓는 시대의 바람과 마주해서 달려가는 돈키호테와 같다. 그러다가 나동그라져도 괜찮은 모양이다. 그러기에 그는 책으로 세상을 새롭게 세워나갈 수 있다고 여기는 이 시대의 바보, 다름 아닌 산치부족 족장이다. 그러나 그는 엄연히 우리 사회의 소중한 공공지식인의 대표명사 가운데 빛나는 이름 하나다.
도정일에 따르면, “공공지식인이란 이성의 사회적 사용이라는 원칙 위에 공공의 사회적 가치와 선과 규범을 위해 삶의 문제에 개입하고자 하는 지식인”이다. 그래서 그는 “권력과 돈과 지식의 한국판 공생관계”에 대해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그건 그가 인용한대로,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자본의 치즈에 빌붙은 벌레들'"에 대한 질타를 공공 지식인의 임무로 여긴다. “권력과 돈 외에는 아무 것도 진실일 수 없는 사회는 이미 무의미한 사회, 활력의 가면 아래 시드는 허무한 사회”임을 그는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도정일은 세상이 쓰잘 데 없다고 버리는 것들의 고귀한 가치를 알아보고 복원하는 문명의 사제가 된다. 그건 마치 예수가 “세상이 버린 돌이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 돌이 된다”고 했던 것과 닮아 있다. 도정일이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뼈대를 세운 것도 바로 이 쓰잘 데 없는 일의 고귀함을 이 세상에 누룩처럼 퍼뜨리려는 계책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정신적 수난과 사회적 모순의 밑바닥에는 바로 이, 진정 고귀한 것들을 폐품취급하고 내다버리는 의식의 탁류가 흐르고 있다. 요즈음 갑자기 인기가 오른 인문학의 식구 가운데서조차 이런 탁류에 몸을 내맡기거나 합류하고 있는 종자(種子)들이 있으니 실로 딱한 노릇이다. 그래도 이렇게 대세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것들에서 남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게 뿜어 나오는 반짝이는 빛을 포착하는 이가 있어 우리는 외롭지 않고, 마음에 지혜의 문패를 간신히 라도 달아 놓을 수 있게 된다.
별에서 온 그대의 중력이탈
그러면서 우리는 그의 손에 이끌려 마침내 판타지의 세계로 슬며시 잠입하게 된다. “판타지는 세계를 지배하는 모든 중요한 현실원칙들을 부정, 거부, 초월함으로써 그것들의 작동을 한순간 정지시킨다. 판타지의 세계에서 중력은 무시되고 시간과 공간의 법칙은 사라지고 일상의 규범들은 잊혀진다. (.....) 이 마술적 세계로 날아오르는 순간 상상력은 모든 족쇄에서 해방”된다. 그 판타지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핵심은 바로 이 “현실원칙의 중력을 뚫고 솟아오르는 가벼운 세계”에 대한 비밀이다.
그 비상(飛上)의 시선으로 우리는 현실을 다시 돌아보고, 그 현실이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지, 무엇을 무겁게 매달고 살아가게 하고 있는지 명료하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판타지는 무책임한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예리한 해석과 대안의 통로가 된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궤도와 우주의 중력도 이 생각의 자유로움을 질서라는 이름의 수갑을 채워 체포할 수 없다.
그제서야 우리는 별들 사이에 길을 놓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도정일은 아무래도 별에서 온 것 같다. 지구인이 모르는 중력이탈의 비법을 체득한 모양이니 말이다.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 도민준도 그렇지 않은가? 아, 이제 보니 일가(一家)인 모양이다. 성이 둘 다 “도” 아닌가?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런 건가, 그러면?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