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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나는 개였다"…형제복지원 생존자들 '눈물의 증언'

책임 회피하는 안전행정부…국가의 책임은 없다?

국회 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이 눈물 바다가 됐다. 상상을 초월하는 인권 유린이 발생했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생존자들이 8일 국회에서 증언에 나섰다.

1987년에 세상에 알려진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 박정희 정권의 내무부(현 안전행정부) 훈령 410호를 통해 국가 차원의 '인간 청소' 정책에서 시작됐다. 이후 1980년 쿠데타를 통해 불법으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이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앞두고 이를 적극 활용했다. 시민단체는 이를 '인간쓰레기로 분류된 인간'에 대한 '사회정화'의 명목으로 행해진 국가 차원의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프레시안>에 연재된 '26년, 형제복지원' 기사 바로가기)

형제복지원 설립자의 사위였던 박인근 씨는 1960년대부터 형제복지원 운영에 관여했고, 1965년 7월 부산시로부터 아동 복지 시설 인가를 따내 국가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내무부 훈령이 제정되면서 정부는 공무원, 경찰 등을 동원, 신원불분명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여 형제복지원에 보냈다.

형제복지원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오래 전이지만,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지난달 24일 새정치연합 진선미 의원은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과 보상 책임을 담은 특별법을 발의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안전행정위가 아니라 보건복지위 소관으로 배정됐다. 당시 내무부 등이 관여했던 정황 등에 비춰보면 이 사건은 국가 폭력이자 '국가적 인신매매'로 볼 수 있지만, 안행부가 이 사건을 복지부 소관으로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부 소관이 되면 배상 등과 관련해 '복지 시설에 의한 피해 문제'로 축소될 수 있다.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모임(한종선, 박태길 공동대표)은 8일 오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 차원에서 벌어진 과거사 사건을 책임지지 않겠다는 무책임한 태도는 힘겹게 살아남은 피해 생존자를 두 번 죽이는 것이며, 의문의 죽임을 당한 넋들의 영혼까지 짓밟는 행위"라며 "안전행정부는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형제복지원의 후손, 박인근 씨 일가가 운영하는 부산 '실로암의 집'에는 형제복지원 시절 강제 노역의 실상이 담긴 사진이 아직도 버젓이 걸려 있다. ⓒ여준민


"형제복지원 지옥 8년, 탈출해보니 집까지 5정거장이더라"

형제복지원 피해자는 약 3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그 유가족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 200여 명이 현재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현재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당시 벌어졌던 일에 대한 증언은 일부 나와 있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 벌어졌던 형제복지원의 실태에 대한 증언은 많지 않은 상황이다. 이날 형제복지원 피해자 증언대회에 참석한 피해자 김희곤 씨는 1970년대 형제복지원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김 씨는 1970년 국민학생(초등학생) 시절 부산 서면에 있는 집 근처에서 놀다가 형제복지원에 끌려가 폭행과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국가가 장려한 '폭행'의 희생자였던 셈이다. 김 씨는 SBS <그것이 알고싶다> 형제복지원의 진실 편을 본 후 용기를 내 형제복지원 피해자 유가족 모임(한종선 대표)에 연락을 해 왔다고 밝혔다.

"저는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70년부터 형제복지원에서 나올 때까지인 1978년 3월까지 있었다. 들어가기 전, 부산 서면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는데 끌려갔다. '왜 내가 잡혀가야 하나. 나는 부모도 있고 5남매의 장남이다'라고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구타를 당했고, 구둣발로 얼굴을 차여 이빨, 코가 다 부러졌다."

김 씨는 박정희 정권 시절, 형제복지원의 운영 실태에 대해 상세히 증언했다. 김 씨의 말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은 원생들에게 낚시나 건설 등 강제 노역을 시켰다. 낚시에 동원되지 않은 원생들은 산을 깎아 다지고, 건물 만드는 일을 했는데 그들은 '개척자'로 불렸다고 한다. 형제복지원은 원생들을 그룹으로 나누어 '1차 개척자', '2차 개척자' 등으로 명명했다.

"저는 2차 개척자로 떠나게 됐다. 1차 개척자 24명 정도 있었고, 2차 개척자가 한 40명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산을 깎고 부로크(벽돌)를 찍고 그런 일을 했다. 산이 있으면 그 밑을 깎아 1미터 정도 굴을 판 후, 굴 위로 올라가 파이프를 박아서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산을 깎았다.(울음) 위에서 흙을 무너뜨리면 아래에서 작업하다가 튀어나오는데, 곡괭이, 삽을 놓고 나오면 다시 가져오라고 해서 들어갔다가 흙더미에 깔리는 사고가 빈번했다. 천막에서 살면서 산을 개간해 평지를 만들어 집을 지었다. 그곳에서 8년 넘게 있으면서 속옷, 양말 하나 배급 받은 기억이 없다. 밥은 쌀 한 톨 없는 보리밥에, 물에 된장을 풀어서 줬다. 일을 안 하면 밥을 안 줬기 때문에, 일을 하고 밤에 두드려 맞았다. 다음날 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그 몸을 끌고 일을 하러 갔다."

가해자들은 원생들을 내무반 형태의 수용 시설에 빼곡하게 집어넣었다. 군대식이었다. 원생들의 머리 쪽에 다른 원생의 다리가 오도록 해 '지그재그' 방식으로 '칼잠'을 재웠다. 이른바 '소대장'(관리자)들은 "몸을 밟고 지나갈 때 발이 빠지면 죽을 줄 알으라"고 엄포를 놓았다. 얼마나 빼곡하게 원생들을 눕혔는지, 밤에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면 자리가 없어질 정도라고 했다.

세면시설도 없어 바닷가에서 씻었다. 낚시 작업을 하는 어린 아이들이 낚싯바늘을 다루다 손가락을 찔려도 치료를 받지 못했다. "낚싯바늘에 찔린 자리에 고름이 질질 새는데, 바닷물에 고름을 씻고 상처를 씻었다"고 했다.

김 씨는 "제가 있을 때 구타로 죽은 사건이 많았는데, 기억하는 이름이 송기훈이라는 친구였다. 구타를 당하고 아침에 자다가 일어나 집합 장소로 가던 중 쓰러져 죽었다.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김 씨는 "그중에 부자지간에 끌려온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이 맞아 죽어서 아버지가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는 "3소대에 공 씨라는 사람이 죽게 됐다. 그 사람이 죽으니까 그 사람 관물함에 있는 그 누더기 옷을, 입소자들이 하나라도 챙기려고 싸웠다. 지옥보다도 더 그런 세계였다"고 증언했다.

"제가 있을 때 1소대부터 8소대까지 운동장부터 건물을 다 지었다. 1978년에 가족들이 찾아와서 그해 3월 6일 나가게 되는데, 원장이 내가 돈 벌은 것이라며 4만2000원을 저희 가족들에게 줬다. 제가 어린 시절 청춘을 다 뺏기고, 청소년기를 그 곳에서 말살당했는데, 돈 4만2000원을 주면서 가라고 합디다. 집이 부암동이고 국민학교 4학년 다니는 아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구타로 돌아왔다. 1978년 3월 6일, 형제복지원에서 나왔는데, 거기에서 다섯 정거장만 가면 제 집이더라. 다섯 정거장. 거기까지 가는데, 9년이 걸렸다. 집에 갔더니 아버지가 1976년에 돌아가셨다. 저를 찾으러 전국 방방곡곡에 다니다가 돌아가셨다. 집 옆에 있는 저를 찾지도 못하고 돌아가시니 저는 천하의 불효 자식이 돼 있었다. 저 혼자 평생 살았다. 제 나이 55세, 가족, 사람 이런 거 모른다. 왜 제가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을 안아야 하는지 국가를 많이 원망했다."

김 씨는 현재 기초생활자다. 억울함을 토로하려고 해도, 끌려갈까 봐 두려워 못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어린 시절 당했던 구타에 온몸이 성치 않은 상황이다. 김 씨는 "국가에 대한 이야기는 못 배워서 무식해서 할 수는 없지만, 과연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나는 부랑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철거된, 형제복지원의 과거 모습 ⓒ연합뉴스


"나는 인간이 아니라 개였다"

이날 증언대회에 나온 최승우 씨는 1982년 입소해 1986년까지 형제복지원에서 생활했다. 그는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부산 서면에 살았고,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부모님이 따로 살아 할머니 밑에서 살았다. 그는 공부밖에 모르는 학생이었다. 그가 학교에서 급식으로 빵과 우유를 받아온 어느 날, 한 순경이 최 씨를 붙잡고 가방 검사를 했다. 순경은 "훔친 것 아니냐"고 질문했고 최 씨는 "훔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순경은 어디론가 전화를 했고, 잠시 후 형제복지원이라는 이름이 적힌 차량이 한대 왔다. 그 차에서 나온 사람들은 순경이랑 몇 마디 대화를 한 후 최 씨를 강제로 끌고 갔다. 거기에서 최 씨는 형제복지원을 만났다.

"그날 이후로 저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하다. 어떻게 그곳에서 그렇게 살았는지. 신입 소대에 들어가자마자 모든 옷가지를 다 벗겨냈다. 소대장이라는 사람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몸이 아파 쓰러졌는데도 두드려 패더라. 그때 어린 나이에 나는 죽고 싶다는 마음 밖에 없었다. 그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오만 악행들이 다 있었다. 기합 주고, 몽둥이로 때리고, 조금 예쁘장하면 끌고가서 성폭행한다. 그때 산에 돌아다니면서, 오래 있던 원생들이 "산에 시체가 있다. 그 시체에서 인이 나온다"고 했다. 인이 몸에 좋다고 해서 그 인을 먹었다. 그렇게 살았다.

그곳만 생각하면 정말 미칠 것 같다. 정말 나는 개였다. 음식을 주는데 너무 냄새가 역겨워 먹지를 못해 오바이트(구토)를 했다. 그것을 보고 중대장이 몽둥이를 들고 와 때렸다. 맞으면서 다시 먹다가 또 오바이트를 했다. 때리니까 맞고 또 그것을 먹었다. 오바이트 하고 또 그것을 먹고…. 나는 인간 이하로 살아왔다."

형제복지원 생존자인 한종훈 씨는 "동생과 함께 형제복지원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동생은 현재 사고가 나서 지적장애를 겪고 있다. 우리를 찾던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인해 현재 치매를 앓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 이후로 저희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정부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밝혀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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