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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블레어와 '제3의 길' 정치가 남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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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블레어와 '제3의 길' 정치가 남긴 것들

[김윤태 칼럼] 블레어의 자서전 <여정>을 읽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생물에 비유한다. 상식을 뒤엎는 반전에 정치의 묘미가 있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정치는) 한 번은 성공으로, 다른 한 번은 실패로 끝난다.” 성공하는 순간 실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정치인 이녹 파월이 말한 대로 “모든 정치적 경력은 실패로 끝난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도 예외는 아니다.

60년대 학생운동 세대의 정치권 진출

1990년대 영국 정치의 전환기에 나는 런던정경대학(LSE) 대학원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20대 학생이었다. 당시 총선에서 4번이나 패배한 노동당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처럼 보였다. 그런데 1994년 41세의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텔레비전에 나타난 블레어의 이미지는 과거 노동당과 전혀 연결되지 않았다. 노동당은 순식간에 늙고 고루한 이미지를 벗었다.

무엇보다도 블레어는 말을 잘하는 정치인이다. 당대의 가장 뛰어난 연설가였던 블레어는 메시지로 사람들을 더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보수당의 대처 총리를 칭찬했다. 블레어는 “기업을 강조한 대처가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는 사회주의 국유화를 제창하는 노동당에 커다란 충격이었다. 또한 당시에는 블레어가 100년 전통의 노동당을 얼마나 바꿀 것인지 예측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신노동당의 탄생

블레어는 영국 사회주의의 전통보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성공에 관심을 가졌다. 블레어와 클린턴은 공통점이 많다. 이들은 1960년대 학생운동 세대로, 변호사를 거쳐 정계에 입문했다. 젊은 시절 좌파로 활동하다가 중도적 위치로 이동한 점도 비슷하다. 청년 시절의 이상주의는 점차 현실 정치에 적응했다.

블레어는 노동당의 이름을 바꿨다. 클린턴이 ‘신민주당’을 제시한 것처럼, 블레어는 ‘신노동당(New Labour)’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이어서 노동당의 상징을 붉은 깃발에서 붉은 장미로 바꿨다(이는 1980년 프랑스의 미테랑 사회당 대통령이 처음으로 꾀한 변화다). 블레어는 새로운 대중정당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국회의원 공천권의 3분의 1을 장악했던 노동조합의 권력을 축소하고 ‘1인 1표’ 원칙에 따라 투표권을 부여했다. 노동당이 특정 계급의 대표가 아니라 국민정당이라고 천명했다.

블레어는 이 책에서 “나라를 바꾸는 것보다 당을 바꾸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다. 하지만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반대파를 설득했다. 그는 정당 개혁을 ‘현대화’라고 표현했다. 블레어는 산업의 국유화를 명시한 노동당 당헌 4조를 삭제하고, ‘시장과 경쟁의 기업’을 강조했다. 사회주의는 과거의 언어가 됐다. 노동당의 선거 전략가 필립 굴드는 노동당이 노동계급의 정당이 아니라 “중간계급의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3의 길 정치의 등장

정치인의 성패는 자신의 생각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리가 된 블레어는 노동당의 변화를 표현하는 용어로 ‘제3의 길’을 선택했다. 블레어는 “제3의 길은 경제적 역동성과 사회정의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곳에 있다”고 말했다.

블레어가 제3의 길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제3의 길’은 1950년대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먼저 사용했다. 스웨덴은 소련의 공산주의나 미국의 자유방임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중도 노선을 제시했다. 이에 비해 1990년대에 다시 등장한 ‘제3의 길’은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이 전혀 없던 미국에서 클린턴 정부가 사용했다. 클린턴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노선을 결합한 중도 노선으로 1996년 재집권에 성공했다.

사회민주주의의 쇄신인가, 배신인가?

1997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블레어는 제3의 길이 “전 세계의 신중도 좌파가 추구하는 진보 정치를 표현하는 용어”라고 강조했다. 1998년 블레어는 <제3의 길>에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중도좌파 이념인 민주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다시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변화는 전통적 사회주의의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 자유주의의 가치와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만인의 동등한 가치, 기회의 평등, 공동체와 함께 ‘개인의 책임’을 강조했다.

1998년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제3의 길>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쇄신을 주장하면서,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강조하는 ‘사회투자국가’를 제시했다. 제3의 길 정치는 독일의 ‘신중도’, 네덜란드의 ‘폴더 모델’, 북유럽 국가의 ‘노르딕 모델’ 등 다양한 유형으로 등장했다. 1990년대 후반 유럽연합의 20여 국가 중 15개 국가에서 중도진보 정당이 승리했다. 하지만 제3의 길은 조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추구하는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에서 이탈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블레어를 “바지를 입은 대처”라고 혹평했다. 이에 맞서 블레어는 “제3의 길은 유럽의 사회적 모델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화하려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블레어 정부의 성공과 실패

16세기 이탈리아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이다. 일단 그렇게만 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든 칭송받고, 위대한 군주로 추앙받는다.” 마키아벨리의 통찰력은 현대 정치의 정수를 관통한다. 즉, 정치인은 신념이 아니라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제3의 길 정치는 무엇을 남겼는가? 사회주의의 배신자가 되었는가, 아니면 진보주의의 혁신을 이루었는가?

블레어 정부는 역동적 시장경제와 일자리를 향한 복지를 강조하면서 복지국가의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세계화와 지식경제의 확대로 발생한 국제 문제와 국내 문제를 모두 해결하지는 못했다. 이런 점에서 블레어 정부의 개혁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블레어 정부는 집권 이후 지속적인 경제 호황, 고용 확대, 공공투자의 증가, 아동과 노인 빈곤의 감소라는 긍정적 성과를 창출했다. 대처 정부에 비해 교육, 보건, 사회보장에 대한 정부 지출을 확대하여 최하위층의 상대적 지위가 개선됐다. 법인세와 소득세를 낮추었으며 기업과 중간계급의 지지를 확보하기도 했다. 블레어가 선거에서 3번 연속 승리한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신노동당이 집권하는 동안 시장과 기업의 힘이 지나치게 커졌다. 권력과 재산의 불평등은 민주주의에 커다란 위협이 됐다. 노동시장의 소득 불평등은 심화되었으며, 최상층의 소득이 급속히 증가했다. 반면에 저임금의 서비스직 일자리가 증가하고 노동시장의 이중화가 심화됐다. 제3의 길 정치가 사회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사회적 평등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고,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은 뼈아픈 지적이다.

금융위기와 이라크전쟁의 책임

블레어 정부의 다른 문제는 금융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영국의 경제성장은 주택 가격 상승에 편승한 소비자 부채와 은행 대출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것이었다. 블레어 정부는 경제 개방을 추진하면서 효과적인 금융 규제를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세계시장을 하나로 통합하는 지구화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정부의 경제 개입과 조세정책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금융시장의 탈규제와 불안정성에 따른 위험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결과는 심각했다. 2008년 금융 위기로 실업이 급증하면서 신노동당의 인기는 추락했다.

블레어 총리의 퇴임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이라크전쟁이었다. 블레어는 후세인 정부가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훗날 그 정보는 허위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해 이라크전쟁 초기 6년간 179명의 전사자를 냈다. 1982년 포클랜드전쟁이 일어났을 때 참전을 결정한 대처 총리는 인기가 치솟았지만, ‘부시의 푸들’이라는 조롱을 받으면서 파병을 밀어붙인 블레어는 스스로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영국 국민의 80퍼센트가 파병에 반대한 것을 고려하면, 블레어의 판단은 도박에 가까웠다. 결국 신노동당의 동지였던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의 정치적 쿠데타로 블레어는 임기 중에 물러나야만 했다.

상반된 역사적 평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인의 회고록에 비판적이다. 자신의 잘못은 축소하고, 업적만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자기 합리화로 가득 찬 회고록은 차라리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것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 회고록은 중요한 역사적 유산이다. <토니 블레어의 여정>은 블레어가 총리로 재임한 10년을 상세하게 다루어 관심을 끌었다. 신노동당 개혁, 테러와의 전쟁, 브라운 총리와의 내부 갈등을 다루면서 블레어는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영국 언론 〈옵서버〉는 이 책을 “가장 솔직한 정치 회고록”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가디언〉은 “악몽 속에서 유체 이탈 현상을 경험하듯 쓴 회고록”이라고 혹평했다. 그의 회고록이 상반된 평가를 받은 것처럼, 블레어의 재임 중 업적에 대해서도 상반된 평가가 있어왔다. 그는 ‘전범’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금융 위기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영국의 역사적 변화를 이끌어낸 정치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 공공서비스 개혁, 북아일랜드 평화 협상 타결 등 중요한 업적들을 남겼다.

제3의 길 정치의 명암

무엇보다 블레어가 제시한 제3의 길은 현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새로운 단계로 바꾸었고, 이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앤서니 기든스 교수조차 제3의 길이라는 용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니 더 이상 사용하지 말자고 제안했지만, 제3의 길이 추구했던 주요 정책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제3의 길이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고 보거나, 완전히 실패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이념의 구분을 뛰어넘으려는 제3의 길의 장점이 곧 단점이 된 이유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제3의 길은 자유와 평등, 책임과 권리,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형평성 등 좌파와 우파의 이념적 대립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으려고 했지만, 일관성 있는 정치 이념과 경제 이론을 제시하는 데는 실패했다. 제3의 길이 이데올로기를 포기하고 실용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보수적 정당과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제3의 길은 복지국가의 개혁을 주장했지만, 사실상 복지국가는 더욱 시장 지향적 모델을 향해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은 더욱 심각해지고 사회통합과 사회정의의 가치는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제3의 길은 어떻게 한국 정치를 바꾸었나?

토니 블레어만큼 한국의 정치권에 널리 알려진 현대 정치인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제3의 길은 한국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1998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제3의 길에 관심을 가졌고, 앤서니 기든스 런던정경대학 총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하기 위해 한국에 방문하기도 했다. 나중에 김대중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정 지표와 함께 ‘생산적 복지’를 제시하고, 실업자의 자활 지원과 실업급여의 조건부 수급제를 강조했다. 이는 제3의 길이 제시한 ‘일자리를 향한 복지’에 영향을 받은 개념이다.

2003년 등장한 노무현 정부도 제3의 길에 주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모들은 기든스의 책을 탐독했다. 노무현 정부가 경제와 복지의 ‘동반 성장’을 강조하고 사회 투자 정책을 도입하려고 노력했던 점은 제3의 길 정치와 유사한 점이 많다. 특히 ‘사회투자국가’라는 구호는 영국에서 수입한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불평등의 지속적 증가를 막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시장 지향적 제3의 길 정치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제3의 길을 넘어서

민주 정부는 제3의 길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생산적 복지와 동반 성장은 민주 진보 세력의 효과적 대안 담론이 되지 못했다. 이제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제3의 길이 추구했던 가치와 전략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해야 할 시점이다. 제3의 길이 주장한 시장의 역동성, 경제성장, 복지 개혁의 목표가 냉혹한 시장경제의 승자에게만 혜택을 제공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특히 제3의 길이 강조한 일자리를 향한 복지가 시장경쟁의 패배자인 노동계급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근로 빈곤층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무겁게 들어야 한다.

제3의 길 정치의 역사적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정당의 이념과 전략적 선택은 보통 사람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정당이 대안과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행복은 공허한 수사학에 그치고 말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정치를 둘러싼 논쟁은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는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통해 더 많은 기회와 경제적 번영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진보주의는 더 많은 민주주의, 사회정의, 사회적 연대의 사회적 가치를 유지하면서 지속적 혁신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토니 블레어의 여정>은 독자들에게 현대 정치를 꿰뚫어보는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이 글은 2014년 4월 출간 예정인 토니 블레어의 자서전 <토니 블레어의 여정>(랜덤하우스코리아)의 서문으로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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