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다이아몬드제도 6섬을 걷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다이아몬드제도 6섬을 걷다

5월의 섬학교, 수국(水國)에서 2박3일

신안군의 섬들, 자은-암태-안좌-팔금-장산-신의-하의-도초-비금도 등은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면 다이아몬드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섬들을 묶어 <다이아몬드제도>라 합니다. 이 섬들은 머잖아 모두 다리로 연결돼 내륙으로 편입될 예정입니다. 다리가 완공되면 섬도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다이아몬드제도 가는 길. 바다의 봄빛이 가득하다. Ⓒ신안군

황금연휴 5월의 섬학교는 5월 3(토)∽5(월)일까지 2박3일 동안 아직 섬으로 남아 있는 다이아몬드제도 안의 6개 섬을 찾아갑니다.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 화백의 고향인 안좌도와 일제하 치열했던 농민항쟁의 섬 암태도, 8마리의 새가 날아오르는 듯한 팔금도, 바다 위로 길이 난 추포도, 파라다이스 같은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천사의다리>를 건너 비구니 스님과 비구 스님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박지도, 신비한 반달의 섬 반월도까지 걸어갑니다. 안좌, 암태, 팔금, 추포, 박지, 반월도 등 짧은 시간에 신안 6개 섬들의 아름다움을 경험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안좌도]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시 <저녁에>

▲안좌도 <천사의다리>. 이 길에서는 누구나 잠시 천사가 되어도 좋다. Ⓒ신안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안좌도 김환기 화백 생가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이름한다. 그렇다면 유인도와 무인도는 어떻게 구분할까. 사람이 사는 섬은 유인도,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은 무인도일까.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무인도인 것은 맞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모든 섬이 유인도는 아니다. 국제해양법은 사람이 사는 섬이라 해서 모두 유인도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섬에 두 세대 이상 거주하고 식수가 있고 나무가 자라야 유인도라 한다.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그 섬은 유인도가 아니다.

물이 없고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섬이라면 사람이 살 수 없으니 유인도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물이 있고 나무가 자라고 한 세대가 거주하는 섬을 유인도가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뜻 보기에 타당하지 않은 듯한 이 규정은 사람살이[有人]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의이기도 하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이니 사람이 살아도 홀로(한 세대) 사는 섬은 유인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섬도 숨어서 홀로 살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섬뿐이랴. 사람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홀로 살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모두 커다란 화폭 속에 찍어진 하나의 점이다. 점들이 모여 비로소 인간이 되고 인류가 된다. 저 수화(樹話)의 그림처럼.

목포를 출항한 여객선이 한 시간의 항해 끝에 안좌도 읍동항에 입항한다. 포구에는 대합실과 가게만 몇 집 있을 뿐 마을은 섬의 내륙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안좌도는 <항아리와 여인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작가 수화 김환기 화백의 고향이다. 읍동리, 그가 살던 집을 찾는다. 안채는 ㄱ자형 기와집이고 바깥채는 ㅡ자형 기와집이다. 곳간과 건넌방, 대청, 안방. 정지(부엌), 정지 옆에서 ㄱ자로 꺾어져 다시 한 칸의 방이 더 들어섰다. 살림살이가 넉넉했던 듯 제법 번듯한 기와집이다.

수화의 생가에는 복사본 그림 한 장 걸려 있지 않고 그의 사진과 약력이 적힌 안내판 하나가 전부다. 마을 사람은 “옛날에는 초등학교에도 김환기의 그림이 있었는데 누군가 가져가 버렸다”고 아쉬워한다. 그때는 누구도 추상화의 가치를 모를 때라 눈 뜨고 그림을 도둑질 당했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수화는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한국화 했다는 상찬을 받고 있다. 화업을 시작하던 초기에는 추상미술의 선구자였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으며 절제된 조형성과 한국적 시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회화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평가받는다.

1913년 안좌도에서 태어난 수화는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갔다가 곧 중퇴하고 고향 섬에 내려갔으나 금방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 그림을 공부한 뒤 1937년 귀국했다. 고향 섬에서의 삶은 유년기가 전부이지만 섬에서의 기억은 평생 예술의 자양분이 됐을 것이다.

▲안좌도 읍동리 김환기 화백 생가 Ⓒ섬학교

수화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가져다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70년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수화는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수많은 인연들을 하나하나의 점으로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리운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찍어나간 점들이 모여서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우주적 윤회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화는 1974년 7월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져 뉴욕에서 이승을 하직했다.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 부인 김향안(본명 변동림)은 스무 살 때 6년 연상의 시인 이상과 결혼했었다. 하지만 이상은 4개월 만에 요절해버렸고 김향안은 딸 셋을 둔 수화와 재혼해 임종까지 곁을 지켰다. 1992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이 세워졌고 안좌도 그의 생가는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251호로 지정되었다.

키가 유달리 컸던 수화는 목이 길었다. 누군가 당신은 왜 그렇게 목이 기냐고 묻자 그는 자신은 섬사람이라 육지가 그리워서 목을 뺐더니 그만 길어지고 말았다고 대답했다 한다. 나그네는 그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다. 섬에서 자란 나그네 또한 어릴 적 여객선의 뱃고동이 울릴 때마다 뭍에서 누가 오지 않을까 설렘에 목이 빠지곤 했었다. 끝끝내 오지 않는 것들에 대한 기다림. 늘 실망하면서도 그 기다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기다림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자란 아이들은 섬을 떠났다. 섬을 떠나 뿔뿔이 흩어진 아이들은 어른이 된 뒤에야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더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났고 더러는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다. 만난 이들도 결국 다시 흩어져 갔다.

▲김환기 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여자들의 바람기를 잠재우려 만든 남근석 둘

과거 안창도에 속했던 안좌도의 대리마을에는 3개의 성기 바위가 있다. 남자의 성기가 둘이고 여자의 성기가 하나다. 남근석 둘은 마을 앞의 밭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다. 남근석은 화강암을 거칠게 조각해서 세웠다. 여근석은 마을 뒷동산인 후동산 정상에 있다. 남근석은 마을의 당제 때 당신으로 모셔지기까지 했었다.

옛날 이 마을 여자들은 바람이 잘 나기로 유명했다. 마을의 장로들은 여자들의 바람기가 후동산의 여근석이 눈에 띄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부정한 기운을 막기 위해 여근석 앞에다 소나무를 심어서 가렸다. 그래도 걱정이 남아 마을 입구에 남근석 두기를 세워 음기를 제압하고자 했다. 그 후에 마을 여자들의 바람기가 잠잠해졌는지 어쨌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는 남아 있지 않다. 아주 없어지기야 했겠는가. 더 은밀해졌겠지.

과거 대리마을은 섬에서도 손꼽히게 큰 마을이었다. 한데 얽혀 사는 사람이 많으니 바람 잘 날도 없었겠지. 그 바람이 어디 말없는 바위 탓이었겠는가.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남는다. 장로들은 대체 무슨 근거로 여자들이 여근석을 보고 바람이 난다고 생각했을까. 여근석을 보고 음심이 동한 것은 장로들을 비롯한 남자들이 아니었을까. 더구나 여자들이 바람을 피우는 상대는 남자들일 텐데 어째서 남자들의 바람기는 제압할 생각을 안 했던 것일까. 바람의 원인을 여자들에게 뒤집어씌운 것은 장로들도 뭔가 스스로 꿀리는 것이 많아서는 아니었을까.

대리마을 입구에는 60여 그루의 팽나무 고목들이 마을을 감싸안고 있다. 400여 년 전 방풍림으로 조성되었던 숲의 일부다. 신앙적 의미가 있는 우실 숲이기도 하다. 우실의 어원은 '울실'이다. '마을의 울타리'라는 뜻.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농작물 피해를 막는 한편 액운도 막는 신앙적 의미로 돌담을 쌓거나 나무를 심은 것이다. 본래 마을 앞은 갯벌이었다. 매립이 되면서 바다는 농토가 되었고 숲은 대부분 훼손되었다. 간척이 되기 전 갯벌은 숭어, 농어, 도다리, 광어, 낙지, 문어 등이 바글거리는 황금어장이었다. 갯벌을 매립한 것은 바다에서 나는 이익보다 땅에서 나는 이익이 컸기 때문이다. 갯벌은 사람의 이익에 따라 바다가 되기도 하고 땅이 되기도 한다. 이제 바다에서 나는 이익이 더 커졌으니 땅도 다시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안좌도는 본래 안창도와 기좌도 두개의 섬이었는데 두 섬 사이 바다가 간척으로 매립되어 하나가 된 것이다. 안창도 쪽의 남강리와 기좌도 쪽의 향목 사이의 바다가 메워졌다. 남강리 마을에서 만난 노인은 양쪽 나루터의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배를 타고 건너다녔던 옛날을 회상하며 우수에 잠긴다.

이제 두 섬 사이를 흐르던 물길은 끊겼다. 남강리 마을 앞 해변에는 외로운 백로 하나, 홀로 먼 산을 보고 서 있다. 물고기 한 마리 자셨는가. 오늘 굶주림을 면했으니 족하다. 집도 없고 쌓아둔 먹이도 없으나 잃을까 노심초사하는 근심도 없다. 사람이 한 마리 새보다 나은 것이 무엇일까. 오늘 굶주림을 면하고, 이슬 피할 잠자리를 구했어도, 평생 살집, 평생 먹을거리를 쌓아놓고도 도대체 근심은 떠날 줄을 모른다.

▲안좌도 바다에는 요즈음 보기 어려운 전통 김양식인 지주식 김발이 남아 있다. Ⓒ섬학교

칠성신앙의 대상이 된 고인돌과 마을 샘

안좌도에는 곳곳에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이 남아 있고 백제시대의 석실고분도 보존되어 있다. 고인돌의 존재는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다. 고인돌들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방월리의 고인돌군이다. 크게 4개의 무리가 있는데 마을 초입에도 있고, 우물가에도 있고, 밭 가운데도 있다. 마을 우물 주변에 있는 고인돌은 칠성바위라 불렀었다. 고인돌은 매년 정월 보름날 거행됐던 방월마을 당제의 아랫당이기도 했었다. 본래는 7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4기만 남아 있다. 도로 공사를 하면서 들어내거나 파손되어 버렸다. 고인돌에서는 돌칼과 돌화살, 민무늬 토기 등이 출토됐다.

방월리 노인당에 모여 놀던 할머니들은 고인돌이 화제에 오르자 너도나도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선다. 오랜 세월 고인돌 아래서 칠성님께 기도하곤 했었으니 어찌 사연이 없겠는가. 고인돌 바로 옆에는 마을 공동우물이 있다.
“그 새미 하나로 95집이 물을 먹었어.”
이 섬에서도 샘을 새미라 한다. 95가구 수백 명의 식구들이 물을 길어 먹어도 될 만큼 샘은 수량이 풍부했다. 게다가 샘터에서 빨래까지 했으니 마을 샘은 마르지 않는 생명의 원천이었다. 샘 옆에 살던 한 할머니는 명절 때마다 샘에 밥을 해서 올렸다. 마을의 생명줄이니 샘에 어찌 공을 들이지 않았을까.

여름에는 시원한 샘이 겨울에는 김이 푹푹 났다. 겨울인데도 물이 따뜻해서 손도 안 시렸다. 어느 해에는 고인돌과 마을 샘 위쪽에 공회당을 지었다. 그랬더니 “샘물이 보타버렸다.” 마을에서는 난리가 났다. 결국 공회당은 철거되고 말았다. 샘의 신이 노했던 것일까. 공회당을 뜯어내자 다시 물이 솟아났다. 지금은 “가정새미”가 생기고 수도도 들어와서 옛날처럼 마을 샘에 정성을 드리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어느 때부터 마을 샘물이 시퍼렇게 변해버렸다고 노인들은 아쉬워한다.
[팔금도]

여덟 마리의 새로 날아오르다

안좌도, 팔금도, 자은도, 암태도 등 다이아몬드제도 내 4개의 섬은 서로 다리로 연결되어 이미 하나의 생활권이 되었다. 본래 팔금도는 매도, 거문도, 거사도, 백계도, 원산도, 매실도, 일금도 등 8개의 섬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8개의 섬들은 갯벌이 메워져 간척이 되면서 하나의 섬으로 재탄생했다. 새 모양으로 생긴 팔금도의 금당산(金堂山)이 이들 8개의 섬들을 거느리고 있다 해서 팔금도(八禽島)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팔금면 소재인 읍리 마을 초입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그 옆에는 열녀비와 효자비가 함께 모셔진 제각이 있다. 삼층석탑은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0년경 탑 주변에서 앞부분이 떨어져 나간 O평흥국(O平興國)이란 연호가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라진 글씨는 태(太)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태평흥국은 송 태종(太宗) 조광의(赵匡义, 재위 976~997)의 첫 번째 연호로 976.12~984.11까지 약 8년간 사용됐었다. 당시에 이 일대에 제법 규모가 큰 불교 사찰이 있었다는 증거다.

▲고려시대 초기 팔금도에 세워진 삼층석탑 Ⓒ섬학교

이 석탑은 1942년 작성된 <조선보물고적자료>에도 소개됐을 정도로 진작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발견 당시에는 5층이었는데 일부가 소실되고 지금은 삼층석탑으로 남았다. 이 석탑은 일찍부터 해양 교류를 통해 전해진 불교문화가 섬에서도 꽃을 피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찰의 흔적은 또한 사찰을 운영할 수 있는 세력이나 집단이 섬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준다. 지금은 쇠락한 팔금도가 그 옛날에는 더욱 융성했음을 추정케 한다.

일전에 왔을 때는 열녀비와 효자비를 보호하는 건물의 지붕이 허물어져 더 이상 돌보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오늘 다시 오니 새롭게 단장되었다. 두 비석이 나란한 것은 아마도 수절하여 자식을 성공시킨 어미와 조정의 관리가 된 아들의 효성이 지극했던 까닭이리라. 효자비의 주인공은 양성 이씨, 이름은 지워져 판독이 어렵다. 아들은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의 지위까지 올랐다.

읍리 마을 입구. 소막이 보여 집안을 기웃거리는데 노인 한 분이 농약통을 지고 나온다. 소막에는 어미 소와 중소 하나가 갇혀 있다. 늦은 저녁에 밭에 약을 치러 가시는가 보다. 노인은 처음 보는 나그네를 붙들고 대뜸 하소연이다. 얼굴이 불콰한 것을 보니 낮부터 한잔 자신 모양이다.
"농민들이 기를 수가 없어요. 사료금은 오르지요. 산지 소끔은 떨어지지요. 소끔이 떨어지면 사먹는 가격도 떨어져야 하는데 값은 그대로지."

산지 가격이 떨어져도 소비자 가격은 변함이 없는 것이 소값뿐일까.
"산지 소는 아주 그저 가져갑니다. 정부가 농민들 죽이려고 작정을 했어요."

노인은 벼농사 외에도 녹두와 콩, 참깨, 고추 농사를 짓지만 일손이 없어서 목포에서 인부들을 사온다. 밭 1,500평, 논 700평 농사를 지어도 인부들 일당 주고, 비료 값, 농약 값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인자는 우리 농사꾼들도 아주 농사를 짓지 말아야 할랑 갑소. 우리 묵을 만치만 짓고 절대로 내다 폴지도 말아야지."

할아버지의 푸념이 계속되는데 집안에서 허리가 아주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나오신다. 할머니는 소막의 물 호스를 잡으며 어미소에게 대뜸 지청구부터 한다.
"뭔 지랄이여. 저랑께 맨날 딸겅딸겅."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도 지청구를 빼먹지 않는다.
"저라고 워치케 가서 약하까잉 큰 일이네."

술 취한 할아버지가 비틀거리며 농약통이나 제대로 맬지 걱정인 것이다. 어미소가 가려운 데를 긁으려고 자꾸 먹을 물을 주는 호스에 머리를 가져다 대니 물 호스가 물통에서 빠져 버린 것이다. 머리 긁는 소리가 딸강딸강 났었나 보다.
"게란데 긁을라고. 사람보다 안 영리하요. 그라께 소가 멍청한 사람보다 낫다 안 합디야. 짚을 좀 줘야 쓸랑 갑다. 똥에 들어눴으께"

할머니는 마른 짚단을 풀어서 질척한 바닥에 깔아준다. 송아지를 벗어나 중소가 된 새끼소는 여전히 장난기가 남아 있다. 자꾸 제 밥그릇에 발을 넣어 본다. 아무리 인내심 많은 소라지만 좁은 소막에 갇혀 종일 서 있자니 얼마나 심심하고 답답할까.
"이눔아, 뭐 한다고 자꾸 니 밥 구덩에다 발을 넣고 지랄이냐."
할머니는 지청구를 하면서도 소의 머리를 긁어준다.

[박지도]

사람이 천사고 사람이 악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은 시작된다. 바다 위로 난 길을 걷는다. 섬과 섬을 연결해주는 다리. 사람의 길이어서 반갑고 고맙다. 안좌도 두리 마을과 박지도를 연결하는 다리는 자동차는 다닐 수 없는 인도교다. 박지도에서 다시 건너섬 반월도까지도 길은 이어지는데 이 다리의 이름이 <천사의다리>다.

사람의 다리에 ‘천사의 다리’란 이름을 붙인 것은 얼마나 속 깊은 일인가.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는 사람이 곧 천사고 악마다. 천사로 살면 천사가 되고 악마로 살면 악마가 된다. 이 길에서는 누구나 잠시 천사가 되어도 좋다. 어떠한 악마의 심성도 다 내려놓고 천사의 마음으로 건너보시라. 그 마음 세상으로 되가져 간다면 세상은 마침내 천국이 되리니.

안좌도와 박지도까지 547m, 또 박지도에서 반월도까지 915m. 왕복 3km, 천사의다리에서면 누군들 천사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썰물이면 갯벌의 길이고 밀물이면 바다의 길이다. 지금은 밀물의 시간. 바다는 더없이 잔잔하고 평화롭다. 천사의 다리를 건너 박지도 해안 길을 걷는다. 박지도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 섬은 전체 둘레가 4km에 불과할 정도로 아담하다.

박지는 언뜻 박쥐처럼 들리지만 박쥐와는 무관하다. 섬의 생김이 바가지 모양이라 해서 배기섬 혹은 바기섬이라 하다가 박지가 됐다. 백일(白一)이라는 지명도 있었는데, 박지도 마을에서는 해가 떠서 해가 지는 모습을 모두 볼 수가 있다. 하루 온 종일 해가 드는 밝은 마을이라 백일이라고도 했다.

섬 초입 입간판의 “마을 뒷산 당에서는 매월 정월 대보름 마을의 안녕과 질병 퇴치를 위해 흠 없는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서 당제를 지냈다”는 설명이 인상적이다. 송아지의 각을 뜬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길가에는 간간이 격언 같은 구절들이 새겨진 푯말이 서 있다. 어느 푯말에는 “평온한 바다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지 못한다.”고 적혀 있다. 섬에 맞는 섬사람들의 삶에 어울리는 명언이라고 뽑아 쓴 듯하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 그 유능한 뱃사람도 실상 거센 풍랑 몰아치는 광폭한 바다보다는 평온한 바다를 더 좋아하지 않을까. 설핏 웃음이 나온다. 이런 길에서는 웃음이 헤퍼진다.

시원스레 솟아오른 해송 사이 길을 혼자 걷는 즐거움을 무엇에 견줄 수 있을까. 이 평화로운 시간을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눠줄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 해송 숲길을 빠져 나와 바다를 보다가 나는 그만 넋을 잃고 만다. 경이로운 풍경을 목격한 때문이다. 원형이 완벽히 보존된 독살을 발견한 것이다. 해안에 돌을 쌓아 들물 때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해서 잡는 함정어법이 독살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전통어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은 섬에 완벽한 독살이라니! 나는 도저히 흥분을 가눌 수가 없다. 갑자기 발길이 빨라진다. 어서 가서 주민들에게 아직도 독살로 물고기를 잡는지, 얼마나 많이 잡히는지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다. 숲에는 귀하다는 호랑가시나무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호랑가시나무에게 눈을 빼앗겼다가 되찾고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바닥의 바위들이 눈을 빼앗아간다. 길가에 나오면 내 눈은 언제나 내 것이 아니다. 눈을 뺏으려 달려드는 눈 도둑들. 하지만 나는 이 도둑들이 고맙기만 하다. 내 눈을 훔쳐가는 도둑들이 많을수록 내 눈은 더욱 크고 맑아진다. 안목은 그렇게 열리는 것이다.

길게 누운 바위는 기둥 같기도 하고 어떤 조각품 같기도 하다. 누군가 일으켜 세우려다만 미륵일까. 일으켜 세우기만 하면 그대로 미륵불이 될 듯하다. 나 또한 일으켜 세워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서원도 부족하고 정성도 부족하고, 기도도 부족한 나는 결코 미륵을 세울 수가 없다. 그대로 누워 계시라 미륵이여. 그대가 일어선다고 이 사바[忍土]의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으리라. 어차피 이 세계는 견뎌야 하는 땅. 57억 년 뒤에 오신다는 그대. 57억 년 뒤의 약속이란 지키지 않겠다는 약속과 같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만큼이나 가늠할 수 없는 약속. 헛된 기대로 시간을 탕진하기에는 인간의 삶이 너무도 짧다!

▲뚝을 쌓아 만든 논이 다시 갯벌로 돌아가고 남은 흔적 Ⓒ섬학교

논이 됐던 갯벌 다시 갯벌이 되다!

오리쯤이나 될까. 해안 길을 돌아서니 마을이다. 길가에서 마침 이장님을 만났다. 커피나 한 잔 하고 가라고 경로당으로 이끄신다. 경로당에는 마을 노인들이 마실을 나와 한담을 나누고 있다. 이런 복이 있을까.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구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참았던 궁금증을 터뜨린다.

“오다 보니 독살이 있던데 아직도 사용하나요?”
“독살처럼 생겼지만 독살이 아니요.”
일흔 둘의 정오용 박지도 이장님이 답변하신다.
“아니 그럼 무언가요.”
“논이었어요.”

논 이야기가 나오자 경로당이 분분해진다. 마을의 뒤 안이어서 그 지역은 뒷면이라 부른다. 뒷면의 논은 섬사람들이 둑을 쌓아 만든 간척지 논이었는데 오랫동안 농사를 짓지 않다 보니 바닷물이 들어와서 둑이 허물어지고 다시 갯벌이 되었다. 독살처럼 보이는 돌담은 그 둑의 일부란다. 한 400여 년 전 둑을 쌓아 만든 논이 유실된 게 20여 년 전의 일이다. 조금씩 균열이 가던 둑이 바닷물의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아주 터져버린 것이다.

논농사를 지을 때는 사람들이 해마다 둑을 보수하고 관리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갯벌에 나가 일렬로 서서 뻘 흙을 퍼서 전달해 주면 그것으로 터진 곳을 ‘땜빵’했었다. 둑의 안쪽에는 원안이라는 것도 있었다. 제방둑과 논둑 사이에 고랑을 파서 물을 채운 것이 원안인데 원안은 논에 바닷물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는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그런 논들은 원안의 논이라고도 했다.

독살이 아니라는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도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건 독살보다 더 중요한 발견이 아닌가. 독살은 어업유산이지만 원안의 논은 섬의 농업유산이고 갯벌문화다. 참으로 흥미롭고 소중한 유물이다. 사람이 갯벌을 빼앗아 논을 만들자 바다는 갯벌을 되찾으려고 끊임없이 싸움을 걸었다. 그러다 방조제에 구멍을 내서 마침내 갯벌을 되찾아 간 것이다. 사람에 대한 바다의 승리. 갯벌이 논이 되고 논이 다시 갯벌이 되는 생태순환의 산 증거물이 아닌가. 반드시 보존해야만 할 자연유산이고 농업유산이다.

그런데 걱정스럽다. 이 유산 또한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머잖아 이 섬의 해안 전체를 둘러쌓을 방조제 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란다. 내륙의 먹잇감이 줄어들자 토건족들이 섬과 바다로 눈을 돌린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그것은 주로 섬의 간척이나 방파제공사, 조력발전소 건설 등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섬의 농토와 토양 유실을 명분으로 곳곳에서 방조제 공사를 벌이고 있다.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낸 것이다.

이런 토목공사는 보통 수십, 수백 억의 예산이 쉽게 쓰인다. 농사도 짓지 않는 농토, 폐전으로 습지가 된 염전 땅들(그 땅들은 대부분 도시의 투기꾼들 소유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세금 도둑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도둑질 당하는 혈세가 해마다 수조는 족히 넘을 것이다. 게다가 혈세를 낭비해서 자연스런 해안지형까지 파괴한다. 이야말로 바다판 4대강 공사다. 그런데 이 토건족들의 범죄는 소리소문없이 은밀하다. 나라의 재앙이고 우환덩어리다. 어떻게든 보존할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작은 섬이지만 박지도는 어업이 없고 농사가 주업이다. 지금은 묵히고 있지만 예전에는 산 꼭대기까지도 논이 있었다. 물이 좋았기 때문이다. 섬에 어업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섬이 바가지가 엎어진 모양이기도 하지만 배가 엎어진 모양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배가 엎어진 섬은 배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없다는 속설이 있었던 것이다.

경로당의 노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박지도의 인심이 어느 섬보다 좋았고 지금도 좋다고들 말씀하신다.
“여기 사람들이 순해요. 섬이 보통 억센데 여기 사람은 말도 순해요.”
심성이 순하고 인심까지 후했으니 한국전쟁 무렵에는 피난 온 사람들한테 집을 지어주고 식량까지 대줘서 먹여 살렸다. 섬은 오래전부터 부촌이었다. 돈벌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살림을 잘해서 부촌이 됐다. 박지 사람들은 농협에 빚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돈을 빌려주고 산다. 농사가 더 이상 돈이 되지 못하는 세상. 농사지어서 얼마나 큰 재산들을 모았겠는가. 그저 모든 것을 아끼고 또 아낀 결과다. 큰돈을 벌어서 부자가 아니라 빚이 없이 알뜰하고 자족하며 살아가니 부자들인 것이다.

당제 이야기를 안 물어 볼 수가 없다.
“당제 모실 때 송아지의 각을 떴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요?”
인근에서도 박지 당은 유명했더란다. 해마다 정월 당제를 모실 때가 오면 마을에서는 흠결 없이 깨끗한 송아지를 한 마리 샀다. 송아지는 열흘간 잘 먹여 살을 찌웠다. 정월 열나흗날 당이 있는 산 정상까지 끌고 갔다. 이상하게도 송아지는 순하게 잘 따라갔고 당 앞에서 딱 멈췄다. 제관은 옹달샘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송아지를 잡아 바쳤다. 또 백설기 떡을 하고 밥을 지어 제단에 올렸다.

당제가 끝나면 제주는 송아지를 53덩이로 균등하게 잘랐다. 당시 마을이 53가구였기 때문이다. 송아지 각을 뜬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제관은 각을 뜬 송아지 고기를 지게에 지고 마을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마을사람들의 쉼터인 멀구슬나무 아래에 지게를 받쳐놓았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와서 자기 몫의 송아지고기를 한 덩이씩 가져갔다. 하지만 개중에 제사 고기 먹는 것이 께름(꺼림직)한 사람은 안 가져갔다. 임산부가 있는 집도 안 가져갔다. 머리와 내장 등 부속물은 제주가 큰 가마솥에다 국을 잔뜩 끓여서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백설기 떡도 잘라서 나눠먹었는데 그러면 부스럼이 안 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설날부터 한 달을 내리 놀았다. 그야말로 한 달 내내 잔치였다. 가난했지만 집집이 나누고 살 줄을 알았었다. 그래서 “정월 달 같으면 남의 집 머슴 안 산다.”는 속담도 생겼다. 그렇게 흥청거리던 섬이 이제는 조용하다. 박지도 또한 노인들만 사는 늙은 섬이 되고 말았다.

비구니와 비구의 그리움이 놓은 징검다리 - 중노두

다시 박지도 마을을 벗어나 해안 길을 따라 걷는다. 길은 어느새 섬의 초입으로 이어진다.
박지도와 반월도 사이에도 노두가 있었다. 노두는 바다를 가로질러 갯벌에 놓인 징검다리다. 박지, 반월의 노두에 얽힌 전설은 애틋하다. 두 섬 사이의 노두는 ‘중노두’라 한다.


▲비구니 스님과 비구 스님의 애틋한 사랑이 놓았다고 전해지는 중노두가 물에 잠겨 있다. Ⓒ섬학교

옛날 박지도의 암자에는 젊은 비구 스님 한 사람이, 반월도 암자에는 젊은 비구니 스님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얼굴을 본 적이 없었지만 박지도 비구는 멀리서 아른거리는 자태만 보고 반월도의 비구니를 사모하게 됐다. 그러나 바다와 갯벌이 가로막아 오갈 수가 없었다. 달 밝은 밤이면 들리는 반월도 비구니의 목탁 소리에 사모의 정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박지도 비구는 망태에 돌을 담아 반월도 쪽을 향해 갯벌에 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 이제 반월도 비구니도 광주리에 담은 돌을 머리에 이고 박지도 쪽을 향해 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오랜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은 어느새 중년이 되었고 마침내 두 돌무더기 길은 서로 만났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 사이 들물 때가 되었고 바닷물이 불어나기 시작했으나 두 사람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마침내 둘은 서로를 부여안고 물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썰물이 되자 돌무더기 길만 남았다.

두 남녀의 그리움이 놓은 징검다리 노두. 어째서 그리움의 끝은 비극의 시작인가. 물거품 같은 사랑이 두려워 그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 것일까. 사랑도 하염없고 바다도 하염없다. 이제 더 이상 저 사랑의 노두 길을 건널 자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건널 것인가 돌아설 것인가. 나그네는 내내 머뭇거리고만 서 있다.

[반월도]

신령한 당숲

섬의 모양이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반달 같다 해서 반월도다. 천사의 다리로지도, 안좌도와 연결되어 있다. 반월도에는 안마을과 토촌 두 개의 마을이 있다. 섬의 최고봉은 견산(202m)이다. 1670년대 인동 장씨가 입도해 정착하며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 "둘레는 12리이다. 호적에 편성된 민호는 27호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반월도 반월마을의 당숲은 신령함이 가득하다. Ⓒ섬학교

반월마을은 인동 장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반월마을 입구에는 수백 년 전 주민들이 입도하면서 심은 나무들이 고목나무숲을 이루고 있다. 당 주위의 숲은 느릅나무, 팽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송악, 마삭줄 등 난대 수종이 주종이다. 반월마을 주민들은 매년 정월보름날 이 숲에서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지냈었다. 이 당숲은 왕매미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제14회 아름다운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받았다.

[추포도]

갯벌의 징검다리 노두

서남해의 섬들은 바다에 징검다리를 놓고 다녔다. 섬과 섬을 잇거나 섬과 육지를 이어주던 갯벌 위의 징검다리를 노두라 했다. 신안의 추포도에는 한국에서 가장 긴 징검다리가 있었다. 추포도는 남쪽의 추엽도와 북쪽의 포도가 연결되어서 생긴 섬인데, 추포도와 암태도의 수곡리 사이의 노두가 바로 그 징검다리였다.

갯벌이 가로놓인 섬들은 들물이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지만 썰물이면 배가 있어도 건너지 못했다. 그래서 섬과 섬을 이어주는 징검다리를 놓았다. 추포도 사람들은 노두를 건넌다 하지 않고 노두를 탄다 했다. 바다를 넘나드는 일이니 배를 타는 것처럼 탔던 것일까.

수천수만 개의 돌을 깔아 징검다리를 만드는 일도 참으로 고된 노역이었을 터지만 노두는 또 해마다 뒤집어주는 수고를 감내해야 징검다리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끼가 끼면 미끄러질 수 있으니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또 노두돌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켜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온 섬 주민들이 울력을 해서 지켜온 다리였다.

추포도 노두는 300여 년 전쯤에 생겼고 1800년대 초반에 크게 개보수를 한 뒤 근래까지도 사용됐다. 디딤돌만 3,653개, 굄돌까지 합하면 만 개도 넘는 둘들을 해마다 사람 손으로 뒤집어가며 관리를 해 주었다. 어른들은 노두를 타고 장을 보러 다녔고 아이들은 노두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신행 오던 새색시도 가마에 실려 노두를 탔다. 급한 마음에 들물 때 노두를 건너다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 생사를 건너는 다리였다. 2000년 6월 옛 노두길 옆으로 2차선 도로가 놓였다. 추포도 사람들이 수백 년 이어온 고난을 덜어준 고마운 길이다. 옛 노두는 이제 갯벌에 파묻혀 사라져가고 있다. 흔적만 남은 노두를 바라보며 바다를 건넌다. 물 위를 걷는다.

▲옛 노두를 대신해 암태도와 추포도 사이 바다를 가로질러 난 도로. Ⓒ섬학교

[암태도]

일제 강점기 농민항쟁의 상징

목포에서 서쪽으로 28.5㎞ 떨어진 암태도는 면적 40.08㎢ 중 13.25㎢가 농토일 정도로 농사가 많은 섬이다. 쌀과 양파, 마늘 등 논, 밭작물과 함께 일부는 김 양식업을 하기도 한다. 암태도는 자은도 팔금도와 다리로 연결되었고 팔금도는 또 안좌도와 다리로 연결됐으니 4개의 섬은 이제 하나다.

1920년대 일어난 <암태도 소작쟁의>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농민항쟁이었다. 1923년 암태도의 소작농들은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해, 약 1년간 암태도의 지주 문재철(文在喆)과 이를 비호하는 일제에 대항해 소작쟁의를 벌였다. 문재철은 암태도 수곡리 출신으로 일제의 식민수탈정책에 편승해 토지 소유를 확대한 전형적인 식민성 지주였다. 암태도·자은도 등의 도서 지역과 전라남북도 등지에 755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암태도에는 약 140정보[논 98정보, 밭 42정보]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문재철은 소유지를 마름의 감독으로 경영하였다. 1910년대에는 지세(地稅)와 제반 경비를 공동부담으로 하는 반분타조제(半分打租制)로 소작료를 징수하였는데 1920년대 들어 7할 내지 8할의 소작료를 징수해 갔다.

이에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3년 8월 추수기를 앞두고, 서태석(徐邰晳)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거절되자 추수거부·소작료불납동맹으로 지주에게 맞섰다. 소작쟁의가 발생하자 일제경찰은 농민대표를 구속시켰다. 이에 암태도 주민들은 1차로 400명, 2차로 600명이 목포로 나가 경찰서 앞에서 단식투쟁을 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아사동맹이라 표현했다. 결국 소작료를 4할로 내리는 승리를 쟁취했고 농민대표들은 풀려났다. 이것이 도화선이 돼서 일제하 소작쟁의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소작쟁의의 핵심적인 인물은 서태석(1885∽1943)인데 1913년부터 7년간이나 암태 면장을 지낸 바 있다. 3.1운동을 계기로 서태석은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3.1운동 1주기 때 유인물을 배포하다 체포돼 1년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고 1923년에는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해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하지만 서태석은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소작쟁의 후에도 독립운동을 하다 수차례 투옥됐는데 그때 받은 고문 후휴증으로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서태석은 정신병자처럼 거리를 전전하다 압해도의 어느 논에서 벼 포기를 움켜쥐고 죽음을 맞이했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었다는 이유로 해방 후에도 서태석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일가친척은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친일파의 나라가 만든 비극이었다. 서태석은 2003년에야 비로소 독립유공자 훈장을 받았다. 서태석의 며느리는 1923년 11월에 일어났던 광주학생의거의 주역 박기옥이었다. 1998년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이 세워졌다.

섬학교 제27강, 2014년 5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5월3일(토)>
07:00 서울 출발(뱃시각에 대야 하니 출발시각 엄수 바랍니다. 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27강 여는 모임
11:00 목포 도착
11:30-12:30 목포에서 점심식사(목포 제일의 장어탕, 회덮밥 중 택일)
12:30-13:10 목포→압해도 버스 이동
14:00 압해도 송공항 출발
14:30 암태도 오도항 도착
14:40-15:40 암태도 등대오솔길 걷기(3km)
16:00-18:00 추포도 노두길 걷기(5km)
암태도→추포 노두→추포도해수욕장→암태도
18:20-18:30 암태도소작쟁의기념탑 탐방
18:40-20:40 저녁식사 겸 뒤풀이(암태도 어부인 주인이 직접 잡는, 토속적이고 맛깔스러운 횟집에서 자연산 생선회와 탕요리)
21:00-자유시간 및 취침(안좌도 <유성모텔>, 다인실)

<5월4일(일)>
07:00 기상
08:00-09:00 아침식사(섬마을의 조기탕백반)
09:30-12:30 천사의다리, 박지도, 반월도 걷기(10km)
안좌도 두리→천사의다리→박지도 입구→해변산책로→박지마을→박지도 입구→천사의다리→반월도→당산→안마을→천사의다리→박지도→안좌도 두리
13:00-14:00 점심식사(섬마을의 우럭탕, 장어탕 중 택일)
14:30-15:30 대리마을 우실숲 산책
15:50-16:30 방월리 지석묘 탐방
17:00-18:00 김환기 화백 생가 탐방
18:30-20:30 저녁식사 겸 뒤풀이(섬마을의 싱싱한 민어회와 민어탕요리)
21:00-자유시간 및 취침(안좌도 <유성모텔>, 다인실)

<5월5일(월)>
07:00 기상
08:00-09:00 아침식사(섬마을의 해장백반)
09:10-09:30 읍동 백제석실고분 탐방
09:50-10:30 팔금 삼층석탑 탐방
11:00 암태도 오도항 출항
11:30 압해도 송공항 도착
12:30-13:30 점심식사(목포 최고의 준치, 병어, 송어회(밴댕이)무침 중 택일)
13:30-14:30 목포 항동시장 장보기
14:30 제27강 마무리모임, 서울 향발

▲섬학교 제27강 답사로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모자,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어머니전>

섬학교 제27강 답사 참가비는 30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2일 숙박비, 8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 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 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러싸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