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만 되면 어김없이 ‘민생(民生)’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정쟁이 아니라 민생을 챙기겠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정쟁’보다 ‘민생’의 실체를 설명하기는 더 어렵다. 애매한 수사(修辭)로 본질을 가리고 문제를 희석시키는 방식은 정치에서 오래된 전략 중 하나다.
평범한 시민들의 먹고사는 문제, ‘민생’은 무엇으로 고쳐 쓰면 좋을까?
‘경제 정책’이 아닐까? 경제 정책은 장바구니 물가를 결정하고 골목 상인의 생계를 책임진다. 세계적 경제 위기를 통해 경험했듯 때론 국가 체제의 존폐 위기를 초래하기도 하며, 국가 간 첨예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그 동안 ‘경제’는 평범한 시민과는 먼 일처럼 여겨졌다. ‘경제는 시장과 기업에 맡겨라’식의 논리가 우리 사회에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최근 몇 년 사이 ‘사회적경제’와 ‘공공경제’ 개념이 주목 받고 있다. 협동조합과 소셜벤처 붐, 국가기간산업의 민영화 반대, 교육과 복지 분야에 대한 정부의 보다 많은 개입 요구 등이 모두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지난해 출간된 <협동의 경제학>은 이런 흐름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시장경제가 갖는 긍정적 의미는 제한적으로 인정돼야 하며, 기존 경제학이 ‘실증’이라는 이름으로 내다버린 ‘정의’의 가치를 복원시킨 공공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이타적 경제학, 협동의 경제학 출현 가능성을 예고하는 사회적경제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대안으로 떠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정태인 원장과 함께 이 책의 공저자로 이름을 올린 이수연 연구원은 30대 초반의 젊은 경제학자다. 대학 시절, 학교 밖 사회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래프가 현실 속 많은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진보적 성향의 민간 싱크탱크에서 일하며 실천적이고 대안적인 경제학과 경제정책을 고민해왔다. 책 출간 이후 강의와 팟캐스트를 하면서 사회적경제 분야 종사자와 대안적 경제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는 이수연 연구원. 그녀를 정치발전소 청년 계절학기 <리얼소셜>을 통해 만났다. 협동조합과 사회적경제 이야기, 젊은 경제학자가 생각하는 한국 경제정책의 문제와 대안을 들어보았다.
- <협동의 경제학>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이 뜨거웠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이 ‘돈은 못 벌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 정도로 인식되곤 하는데, ‘사업체’로서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경제학 이론으로 설명해드리니 힘을 많이 받으시는 것 같다.
협동조합 세부 정책이나 실례는 강연장에 앉아계신 분들이 더 잘 안다. “실제 해보면 절대 이렇게 안 된다.”며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렇게 듣는 현실 얘기에서 오히려 많이 배운다.
- 국내 협동조합 붐과 달리, 이상적 모델로 칭송받던 몬드라곤 협동조합 기업집단의 파고르 전자가 작년 말 파산했다. 그 때문에 때 이른 협동조합 회의론이 나오기도 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파산 원인에 대한 완벽한 분석이 나오지 않았다. 빠른 의사결정과 대응을 요하는 국제시장에서 협동조합이라는 경영구조가 글로벌기업에 밀린 것이라는 분석도 있고, 일부 연구자는 파고르가 협동조합으로서의 원칙을 저버려서 망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왜 실패했나를 살펴봐야 한다. 성공사례만큼이나 실패사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이 협동조합을 막 시작하는 단계에서 이런 사례를 경험한 것은 좋은 일이다. 협동조합도 기업이기 때문에 경쟁시장에서 전략적 선택을 잘못 하면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계기가 됐다. 한편 몬드라곤 협동조합 그룹 안에서 파산의 책임을 나눠지고 정리해고 노동자를 재교육·재취업시키는 모습은, 비록 파산했지만 협동조합이 일반 기업과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 협동조합을 위한 팟캐스트 ‘공존공생’도 진행하고 있다.
미디어콘텐츠창작자협동조합(MCCC)에서 팟캐스트 제작을 도와달라고 해서 자료 제공이나 대본 쓰는 일인 줄 알고 승낙했는데 진행을 맡게 됐다.
현장 사례를 접하며 느끼는 게 많다. 협동조합이라고 하면 조합원이 고학력자일 것 같다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평범한 시민들이 조합을 만들고 총회를 열고 회의를 해나가며, 그 과정에서 배우고 성장한다.
협동조합의 의미를 평가할 때 “민주주의를 배우는 장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실제 그런 것 같다. 결사체를 조직하고, 평등하게 참여하는 절차를 거치며, 토론과 설득을 통해 합리적 의사결정을 해나가는 과정을 배우는데 협동조합만큼 좋은 틀이 또 있을까.
- 기억에 남는 협동조합이 있나?
“사회에서 가장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오토바이 한 대 사서 오는 곳”이라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퀵서비스 기사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배달 스케줄 때문에 한데 모이는 것도 힘들지만, 조합원이 거의 40~50대 남성이다 보니 대화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도 “의리를 지켜야지! 어렵지만 끝까지 할 거야!”라고 하더라.
쪽방촌 분들이 만든 동자동사랑방공제조합, 구두 장인과 구두회사 경영자들이 설립한 성수동수제화협동조합도 인상 깊었다.
그저 즐거워서 협동조합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인디밴드 허클베리핀의 팬클럽협동조합이라든지, 도시농업을 하는 청년들이 만든 씨앗들협동조합 등이다. 처음엔 ‘동아리까지 협동조합으로 하나’ 생각했는데, 만나보니 의미가 있더라. 허클베리핀팬클럽협동조합은 장기적으로 허클베리핀의 공연을 협동조합에서 기획하는 것도 구상하고 있다. 축구 팬이 구단을 소유하는 FC바르셀로나처럼 음악팬이 밴드를 지원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획사가 탄생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 시민단체나 계모임으로 하면 될 것 같은 곳도 협동조합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 아닌가?
협동조합이라는 틀이 생기니까 사람들이 뭔가 만들어보고 싶어 한다. 의욕을 자극하는 무엇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조직이 적합한지는 잘 따져봐야 한다. 협동조합은 손이 많이 간다. 전문가들도 신중한 검토를 거쳐 3년은 준비해서 만들어야한다고 조언한다.
협동조합법 발효 1년, 협동조합 3000개 중 사업을 시작한 곳은 절반도 안 된다. 어디가 살아남고 어떻게 확산되는지 지켜봐야할 것 같다. 원래부터 새로운 것, 대안적인 것에 관심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협동조합에 친숙해지고 확산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사례를 많이 발굴하고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
- 최근 몇 년 사이 사회적경제 분야가 크게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주류경제, 즉 시장경제를 대체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심지어 주류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사회적경제는 시장경제를 해하려는 소규모의 감정경제”라는 발언까지 나온 적이 있다.
사회적경제가 시장경제를 해할 수 있는 역량이 되면 참 좋겠다.(웃음)
사회적경제가 시장경제를 100%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미 시장을 통한 교환과 화폐의 개념이 충분히 자리 잡은 상태에서 이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고, 무엇이든 한 가지가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면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원리들이 존중받으면서 각자 적합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지금 시장경제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사회적경제나 공공경제가 다뤄야할 영역에까지 시장의 원리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열린 ‘서울국제사회적경제포럼’ 선언문에 “다원적 경제를 이뤄야 한다.”는 문구가 있다. 사회적경제나 공공경제의 비중을 높이면서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줄여나가야 한다.
- 민주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의 실정을 꼽으라면 많은 시민들이 ‘경제 정책’을 지적한다. 그런 평가의 연장선에서 보수 정권이 집권, 재집권했다. 진보는 경제정책에 약한 걸까?
민주정부와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던 이유는 살기 힘들어졌다는 판단 때문이다. 10년 동안 시장에서의 불평등이 더 커졌다. 양극화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이뤄지는 분배 불평등을 잡지 못한 채 복지 지출이나 사회보장 제도로만 해결하려다 보니,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한 것이다.
진보진영에 경제전문가가 없는 것이 아니다. 진보가 내놓은 좋은 경제정책도 많다. 그게 잘 알려지지 못했고, 힘이 없다보니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경제정책을 잘 만들고 못 만드냐의 차이보다 결정적인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명박 정권 때는 살기가 좋았나? 그래도 보수는 정권을 재창출했다. 진보는 좋은 정책을 가지고 있긴 한데, 장기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통일된 하나의 개념이 없었던 게 아닐까. 구체성과 현실성도 부족하다. ‘기본소득제’의 취지에 동의하는 시민조차 “모든 사람에게 같은 금액을 나눠주면 물가만 상승하는 것 아닌가? 재원은 어디서 마련하나?”라는 질문을 하는데, 진보는 속 시원한 설명이 없다.
- 지난 50년간의 고속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재벌 중심의 성장 전략이 결국 ‘고용 없는 성장’으로 귀결되면서, ‘성장’이라는 전략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움직임이 있다. 반성장주의 혹은 제로성장주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분배와 평등에 방점을 두는 진보에서는 태생적으로 ‘성장’이라는 단어에 ‘노이로제’가 있는 것 같다. ‘성장지상주의’는 경계되어야 하지만, ‘성장 없는 행복’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시민들이 의구심을 갖는다.
수출과 부채 중심의 신자유주의 경제 성장에 대한 대안으로, ‘소득주도 성장’, ‘임금주도 성장’이 얘기되고 있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이 2012년 출간한 <리셋코리아>에서 거시경제정책 중 하나로 제시했고, 국제노동기구(ILO)도 관심을 갖고 최근 전담팀을 만들었다고 한다.
노동자에게 임금을 더 줘서 소비를 하게 만들고, 내수경제가 잘 돌아가게 함으로써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논리다. 당연히 노동권 강화와 최저임금 인상도 연계될 수밖에 없다.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담론은 진보가 ‘성장’을 다루는 좋은 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협동조합’과 ‘사회적경제’ 외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나 연구 주제는 뭔가.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경제이론을 공부하는 모임도 하고 있다고 들었다.
‘행동경제학’이다. 경제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가정한다. 그러나 실제 인간이 늘 이기적이고 합리적이지는 않다. 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하고, 제한적 합리성을 가진 인간에게 맞는 경제정책이나 경제이론은 무엇인가를 다루는 것이 행동경제학이다. 사람마다 다른 특징을 설정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결과를 예측하는 ‘행위자기반모델’도 연구하고 있다. 실제 인간의 삶에 적용되는 정책을 만들 때 도움이 될 것이다.
- 정태인 원장이 자신의 수제자이자 뒤를 이을 차기 정책가로 지목했다. 스승의 뜻을 떠나, 본인이 설계하고 있는 미래는 무엇인가?
최근 몇 년 사이 공부하는 청년이 늘고 있다. 석사, 박사 하는 친구들이 많다. 그런데 이들 모두 유학을 떠나거나 교수가 될 수 없고, 국책연구원 채용도 한계가 있다.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 전형적인 코스를 밟지 않아도 학자나 정책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공부하며 좋은 일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에서 일하는 게 부럽다.”고 하는 분이 많다. 나 역시 후배들에게 “그런 블루오션에 도전하라!”고 말하곤 하는데, 가능성이 큰 만큼 불안감도 크다. 정태인 원장이나 국가재정·복지 전문가인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특수한 경우다. 뛰어난 개인이 자신의 역량만으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배출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역할 중 하나가 그것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조금 다른 가능성의 길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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