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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위스키'를 괄시 말아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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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위스키'를 괄시 말아야 할 이유

[주간 프레시안 뷰] 산업화 세대의 현재적 의미

<주간 프레시안 뷰>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만의 차별화된 고급 칼럼지입니다. <프레시안 뷰>는 한 주간의 이슈를 정치/경제/남북관계·한반도/국제/생태 등 다섯 개 분야로 나눠 정리한 '주간 뉴스 일지'와 각 분야 전문 필진들의 칼럼을 담고 있습니다.


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정치 선임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남북관계·한반도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국제는 이승선 프레시안 국제 선임기자, 생태는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맡고 있습니다.

이중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 현재 <프레시안 뷰>는 프레시안 조합원과 후원회원인 프레시앙에게 무료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 외 구독을 원하는 분은 프레시안 협동조합에 가입하거나 유료 구독 신청(1개월 5000원)을 하면 됩니다.(☞ <프레시안 뷰> 보기)

'도라지 위스키'를 아느냐고 후배 기자들에게 물었더니, 냅다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부터 합니다. 저녁 메뉴로 카르보나라와 고르곤졸라가 익숙한 친구들이니 당연합니다. 저 역시 마셔본 적도, 직접 본 적조차 없는 전설의 '짝퉁 위스키'가 바로 도라지 위스키입니다. 박물관에나 남아 있을까 싶은 고릿적 아이템입니다만, 대한민국 아저씨들의 18번이라는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타고 불멸의 생명력을 자랑합니다.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한 나이 어린 가수 지망생이 맛깔나게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역시 이 노래는 반쯤 취한 아저씨들이 노래방에서 두 눈 질끈 감고 미간을 모아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를 목 놓아 외쳐야 제맛입니다.

잃어버린 것. 누군가는 화려했던 날들을 쓸쓸한 낭만과 함께 가슴 속에 묻어두고 후배들에게 무대를 넘겨줘야 합니다. 기업체 정년이 대개 57세이니, 올해는 1957년생 선배님들이 퇴역할 차례입니다. 정년이 그럴 뿐이지 평균 53세 조기 퇴직이 일반화된 터라, 실제로는 1961년생 '어린 노인들'까지 실직의 아픔을 겪고 있겠죠. 이분들을 우린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라고 부릅니다. 산업화의 막내이자 민주화의 맏형, 빈곤과 풍요를 모두 경험한 세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경계이자 단층에 해당하는 세대입니다.

이분들 모두가 당장 현역에서 물러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무려 14%(700만 명 이상)를 차지하는 이 세대의 공통된 정서는 최백호의 노래처럼 지난날의 회한과 보잘것없는 현실, 불안한 노후를 오가는 만감(萬感)일 겁니다. 우리 정치에 누군가의 아픔을 달래고 어루만지는 기능이 아직 남아 있다면, 아마도 베이비부머를 맨 앞줄에 둬야 할 겁니다. 아울러, 보다 먼저 무대를 내려온 어르신들, 즉 자식 몫의 풍요를 위해 빈곤과 싸워야 했던 산업화의 역군들도 흘린 피땀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세대 간 대결 양상을 띠었던 지난 2012년 대선을 돌아봅니다. 선거의 중심 맥락에 소환된 박정희를 산업화의 영웅으로 볼 것이냐 독재자로 볼 것이냐의 논쟁은, 박정희 시대에 세상을 배웠거나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분들에겐 참으로 곤혹스런 물음이었을 겁니다. 도라지 위스키의 낭만이 이제 와 싸구려 짝퉁 취급받으면 서럽듯이, 박정희에 대한 부정은 곧 그분들 인생의 '잃어버린 것에 대한' 환기였겠지요. '다카키 마사오'가 검색어 순위 1위에 올랐을 때, 그건 박정희에 대한 모욕 이상의 충격을 그분들에게 가한 겁니다. 50대 이상 중장년층과 노년층의 압도적인 박근혜 지지 배경에는 자신들이 흘린 피땀과 일군 성과에 대한 정치적 보상심리가 짙게 깔렸을 겁니다.

그분들이 지금도 무너지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의 근간을 구성하고 있음은 모든 여론조사에서 확인됩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부단히 산업화 세대를 정치의 중심으로 호출합니다. 적어도 정치의 장에서, 산업화 세대는 퇴역이 아닌 가장 왕성한 현역으로 임명된 것이죠. 파독 광부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됐을 정도로, 고난과 번영을 대표하는 산업화 시대의 상징입니다. 이번 박 대통령의 독일 방문은 그런 점에서 의미화됩니다. 독일 방문에 있어 박근혜 대통령만큼 상징 자본을 활용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잠시 볼까요?

1964년, 가난한 한국의 대통령은 전용기가 없어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사가 제공한 비행기 편으로 무려 7개 도시를 경유해 28시간 만에야 독일에 이릅니다. 그는 루르 탄광 지대의 함보른 광산을 방문합니다. 다른 나라에 돈 빌리러 온 자신의 처지도 남루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현지 광부들로 구성된 밴드의 애국가 연주에 500여 명의 파독 광부들이 일제히 눈물을 쏟아낸 겁니다. 연단에 선 그는 준비된 원고를 물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들에게만큼은 잘 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라고 외칩니다.

꼭 50년 후인 오늘, 세계 10위권의 부국이 된 한국의 대통령이 독일을 찾아 이제 백발이 된 파독 광부와 간호사, 재독 동포들을 부둥켜안고 손을 어루만집니다. 말하지 않아도, 언어가 됩니다. 50년 전 통한의 눈물을 잊지 않고 여러분 앞에 이렇게 다시 섰다고, '라인강의 기적' 같은 '한강의 기적'을 일군 우리가 이제 다시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루자고, 당당한 한국의 대통령이 된 내가 바로 박정희의 딸이라고. 허구보다 감동적인 이 장면을 모든 매체가 대서특필하고 있고, 종편은 반복하고 또 반복해 중계할 겁니다.

성공한 한국의 대통령은 이제 통일 독일의 현장에서 통일 한국의 미래를 약속합니다. 싼 티 난다고 타박 받는 '통일 대박론'을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는 절차입니다. 방독 전부터 언론은 '드레스덴 선언', 혹은 '드레스덴 독트린'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내용이 새롭건 아니건, 충실하건 아니건 큰 상관은 없습니다. '아버지 박통'이 빌리 브란트와 만나 "베를린과 판문점의 비극"을 공감하며 통일 의지를 밝혔듯이, 박근혜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를 만나고 드레스덴 공대의 학생들 앞에서 통일의 꿈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처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은 결코 빈약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산업화 세대의 정치적 이탈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이죠. 그분들의 정서와 정치적 취향을 동력 삼고, 경제와 통일 담론을 엔진 삼아 지방선거라는 고개를 사뿐하게 넘어가려 할 겁니다. 국민 통합이라는 통치의 과제와 세대 전략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우리 사회의 막강한 다수인 50대 이상을 지금 현재 정치적으로 포괄하는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이 3월 27일 오전(현지시간) 독일 예술가들과 함께 옛 서독과 동독을 가르던 베를린 장벽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우여곡절 끝에, 3월 26일 닻을 올린 야권의 통합 신당 '새정치민주연합'도 산업화 세대를 향해 방향타를 맞췄습니다. 공동대표인 김한길-안철수, 두 조타수가 이 항해를 이끕니다. 신당의 정강·정책에도 기존의 민주당 강령과 달리 "대한민국은 분단의 어려움 속에서도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긍정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을 통해 압축 성장을 이뤘다"라고 언급돼 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6.25 전쟁 참전용사, 중동 건설 노동자, 파독 광부와 간호사 등을 출범식장에 초청해 이들을 일일이 소개했습니다. 무대 뒤엔 안중근 열사의 순국 104주기를 연상케 하는 '안중근 손도장'이 눈에 띄었고, 천안함 사건 4주년이 되는 날 치러진 행사인 만큼 빈 의자 위에 국화꽃을 얹어놓고 추모하기도 했습니다. 과거의 민주당 시절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적극적인 산업화 세대 끌어안기의 일환입니다.

민주화 세대와 그보다 젊은 미래 세대뿐 아니라, 지금의 우리 사회를 있게 한 어르신들에 대한 존중의 의지로 해석합니다. 지난 대선 때 앙칼지게 박정희를 할퀴던 모습보다는 훨씬 성숙한 태도입니다. 박정희의 '정적' 김대중이 박정희의 딸에게 아버지의 과오를 용서함으로써 더 큰 품격과 권위를 얻었듯이, 민주화 세대의 총아들이 주로 포진한 새정치민주연합이 선배 세대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일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늦어도 한참 늦은 듯한 만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는 박정희 독재나 박정희 체제의 그늘을 비판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는 문제가 결코 아니니까요.

하지만 신당의 산업화 보듬기가 언어의 감옥에 갇혀선 곤란합니다. 이들이 산업화 세력을 정치적으로 호명하는 방식엔 아직도 구분과 경계의 뉘앙스가 너무 진합니다. 안철수 의원이 6.15 선언, 10.4 선언을 신당의 정강·정책에서 빼자고 제안한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로 인해 안 의원에겐 '역사 의식의 부재'라는 비난이 쏟아졌는데요, 민주화를 지워야 산업화가 존중되는 게 아니듯이, '우향우'를 위한 산업화 우대는 또 다른 오류로 귀결될 가능성이 큽니다. 단층과 경계에서 빚어진 파열을 치유하려는 적극적인 진정성이 보이지 않으면, 말로써 아무리 산업화 세력을 좇아도 박정희-박근혜 부녀가 구축한 감정의 일체화를 극복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다행히, 새정치민주연합의 첫 회의에서 나온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의 발언은 방향을 잘 잡은 것 같습니다. 김한길 대표는 "국민이 먹고 사는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 정치가 새 정치"라고 했고, 안철수 대표는 "그 어떤 정치 의제도 민생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신당의 첫 법안으로 복지 3법 개정을 시사한 '송파 3모녀 법'을 추진하겠다고 한 것도 오랜 고심의 흔적일 겁니다. 이렇게 협소한 세대 전략에서 벗어나 포괄적인 서민 전략으로 소구해야 야당이 야당다워집니다.

가뜩이나 복지 사각지대에는 힘없고 무시당하는 노인들이 가장 많습니다. 베이비부머들 중에서도 실직과 자영업의 늪을 헤매며, 불안한 노후를 걱정하는 분들은 500만 명의 중하위 계층입니다. 이들을 위한 복지 정책, 이들을 위한 일자리와 노동 정책, 이들을 위한 주택 정책이 젊은 세대의 그것과 상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세대론으로는 통 큰 확장 전략으로 경계와 구분 자체를 없애고, 노선으로는 '좌'든 '아래'든 서민들의 민생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대다수 어르신들에게 허울뿐인 '과거의 훈장' 하나 달아주고, 산업화 시대의 노른자위를 차지한 '상위 동맹'의 통치 전략에 맞선 야당의 유일한 길일 겁니다. 야당은 야당의 방식으로 그분들의 설움을 위로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니까요. 기왕에 새로 출범한 야당인 만큼, 신당의 실력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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