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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벗이자 아내의 전 남편, 나를 죽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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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벗이자 아내의 전 남편, 나를 죽이려 한다!

[프레시안 books] 수잔 최의 <요주의 인물>

리(Lee)는 미국 내륙(I 주라고만 표기된다)의 작은 대학교의 수학과 종신 교수다. 수십 년 전 아시아에서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과거와 완전히 절연한 채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살아왔다. 두 번의 결혼 모두 실패로 끝났고, 유일한 혈육인 딸 에스더는 10대 시절 이후 내내 밖으로만 돌았다. 리는 딸이 지금 정확히 어디 살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의 고독하고 단조로운 삶은 어느 날 오후 폭탄의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난다. 그가 사용하는 교수실 바로 옆방, 젊고 자신만만한 동료 교수 헨들리의 방에서 폭탄이 터졌다. 병원에 실려 간 헨들리는 곧 숨을 거두었다. 리는 폭탄이 터지는 순간, 그리고 옆방의 헨들리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순간, 헨들리에게 오랫동안 품었던 질투와 혐오와 열등감의 정체를 깨닫고는 엄청난 충격과 자기혐오에 빠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에게 영영 잊고 싶었던 과거 속 남자의 편지가 도착한다. 리는 이 편지를 보낸 익명의 발신자가, 오래 전 숨을 거둔 자신의 첫 아내 아일린의 전 남편 게이더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는 과에서 유일한 친구(에 가까웠던 존재)인 게이더의 아내 아일린과 불륜을 저질렀고, 결국 아일린을 그로부터 빼앗고 말았었다. 동시에 리는 자신이 폭탄 사건의 유력한 조사 대상자, 즉 '요주의 인물(A Person of Interest :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흥미로울 수 있는 정보나 사실 등을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로 분류되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 <요주의 인물>(수잔 최 지음, 박현주 옮김, 예담 펴냄). ©예담
이상은 수잔 최의 소설 <요주의 인물>(박현주 옮김, 예담 펴냄)에서 약 4분의 1 정도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한국어 판본으로 600여 쪽에 달하는 이 두툼한 소설은, 폭탄테러범이거나 적어도 그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인물로 감시받는 리가, 그 폭탄테러와 동시에 도착한 편지 때문에 과거 속 자신의 모습을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관찰하고 그때는 알지 못했던 진실들을 조금씩 기억해 내면서 그 과거의 핵심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이야기다. 자기기만과 오만과 인정 욕구와 두려움과 허위의식이 뒤섞였던, 그리하여 어느 정도는 눈이 멀어 있었고 아무 곳에도 속할 수 없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역추적하는, 매우 느린 탐사의 과정이다.

'심리 스릴러'라기에는 그의 망설임과 어리석음은 너무 느리다. 오히려 한없이 지연되는 외디푸스적 탐사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늙고 지친 동양인 외디푸스는 자기기만의 비늘을 눈에서 떼어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의 쇠진한 육신과 영혼은 명백한 진실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1/3 정도에 해당하는, 마침내 진실에 도달하는 3부에 이르면 갑작스럽게 사건이 빨라진다. 잔인하리만치 세심하게 묘사되던 그의 심리는 다소 급박하게 진행된다. 노인의 리듬이 급작스럽게 변형되는 절정-결말 부분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쉬운 지점이다.

수잔 최는 '리'라는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 최창(과 어쩌면 할아버지)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끌어왔다. 먼저 수잔 최의 할아버지이자 최창의 아버지 최재서(崔載瑞)는 1908년생이다. 런던대학교에서 유학까지 마쳤던 그는 식민지 시대부터 광복 이후를 지나 1970년대까지 독보적인 문학평론가이자 영문학자로 명성을 날렸지만, '이시다 고조'라는 일본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을 쓰기도 했던 친일 행각은 그에게 결코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광복 이후 그는 투옥되었고, 풀려난 다음 아들 최창을 한국에서 키우지 않겠노라며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최창은 1955년 미국에 와 미시건 대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그는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 출신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과 결혼했고, 딸 수잔이 9살이 되던 해 이혼했다. 이후 그는 인디애나 대학교 사우스 벤드 캠퍼스에서 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창의 젊은 시절은 수잔 최의 첫 소설 <외국인 학생>(최인자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에 상세하게 묘사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제 그의 또 다른 삶의 일부가 <요주의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무엇보다 최창은 테드 카잔스키, 통칭 '유나바머'로 알려진 폭탄테러범의 동창이었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기사 바로 보기)에 따르면 수잔 최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유나바머 사건에 강한 흥미를 보였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체포된 범인이 그의 동창, 즉 미시건 대학교 박사 과정 도중 노트를 교환해서 필기하고 같은 책상에서 공부한 적도 있었던 '반사회적인 천재' 동창이라는 사실 앞에 아연실색했던 것도 기억했다. 그녀의 소설 <요주의 인물>은 아버지 최창의 그런 과거 속 일부로부터 시작되지만, 물론 <외국인 학생>과 달리 일종의 '전기(傳記)'처럼 진행하진 않는다. 그보다는 수잔 최의 두 번째 소설 <미국 여자>(유정화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와 좀 더 닮아있다.

▲ <미국 여자>(수잔 최 지음, 유정화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 ©문학세계사
그러니까 <미국 여자>가 70년대 미국인들을 경악시켰던 패티 허스트 납치 사건(1974년 미국 언론 재벌 허스트 가문의 19세 상속녀 패트리셔 허스트가 극좌 단체 공생해방군(SLA)에 납치된 뒤 그들과 함께 은행 강도 행각에 가담하는 등 이상 행동을 보였다)을 소재로 삼되 패트리셔 허스트가 아니라, 허스트와 다른 SLA 멤버들의 도피 행각을 도왔던 일본계 미국인 여성 웬디 요시무라(소설에선 제니 시마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것, <요주의 인물>이 유나바머 사건을 다소 희화화하는 듯 스쳐 보내며 오히려 그 사건의 끄트머리쯤에 위치해 있던 동양인 리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에는 어느 정도 유사한 작가적 시선이 개입되어 있다고 하겠다.

두 작품 모두, 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관계국이었던 일본과 한국(사실 <요주의 인물>에선 리의 출신국을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다만 몇몇 구절에서 한국으로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전쟁, 군인, 폭탄, 고문의 기억이 당시 비단 한국뿐이 아니었기 때문에 리의 출신 국가가 모호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새삼스러웠다)에서 미국으로 불시착한 이방인들을 다룬다. 제니 시마다와 리 모두 피부색이나 출신 국가로 자신을 규정하길 원치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미국인의 정체성을 선택했고 미국인으로서의 삶에 더 익숙하다. 그러나 불현듯 '테러'라는 외부의 충격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니 시마다와 리는 자신의 과거와 뿌리를 돌이켜보고 (그들이 새삼스럽게 고국에 대한 애정을 느낀다는 식의 결론은 절대 아니다) 자신들이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돌이켜본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을 새롭게 발견한다. 그들은 어쩌면 그제서야 미국인, 아니 정확하게는 미국 땅에 뿌리내린 일원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 여자>와 <요주의 인물> 모두 일종의 후일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니 시마다는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을 생생히 간직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고, 그녀 자신이 베트남전에 항의하는 의미로 징집사무소를 폭파한 뒤 쫓겨 다니는 신세였다. 리는 고국의 전쟁과 폐허를 떠나온 다음 기술 문명의 어리석음을 과격하게 제거해 버리려는 폭탄 테러범의 손길을 스쳐 지나갔다. 그 격렬한 혼돈을 지나고 난 뒤 그들은 더 이상 가면 뒤로 숨거나 내면으로 침잠해버리지 않는다. 수잔 최는 결코 서두르지 않은 채, 리와 제니 시마다의 과거를 천천히 복원해 냈고 그들을 둘러싼 이들의 과거도 정교하게 구축했다. 그 수많은 잔가지 하나하나는 '미국인'의 부서진 영혼의 모자이크를 형성한다. 개인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느새 전체의 유효한 조각으로서의 개인이며, 전체를 이야기하는가 싶으면 개인에게 스며들어 있는 전체가 된다. 리는 비로소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기묘한 주인 의식", "그의 삶을 향한 감각"을 되찾았다. 그는 더 이상 "자기 방어의 그물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고, 당연하다 믿었던 세계의 허위를 직시하게 된다. <미국 여자>에서 제니 시마다가 마침내 체포된 뒤 "현명해진 게 아니라 그저 용기를 잃은 것뿐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청춘이 끝났다는 걸 알"게 된 것처럼.

두 작품 모두, 자신의 있을 곳을 찾아 그토록 오래 투쟁했던 이방인들의 작은 승리, "내가 여기서 살았다"라고 자부심에 차 말할 수 있는 작은 승리를 건넨다. 허위로 이뤄진 자족적인 인공 낙원에서 끌려나와 수치와 고통을 겪은 다음 '나'로 살아간다는 것의 무거움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삶을 향해 다시금 나아갈 준비를 하는, '실낙원'을 거꾸로 되감는 이야기다.

처음 <미국 여자>를 읽은 다음 <외국인 학생>을 찾아 읽었고, <요주의 인물>이 출간되자 기꺼이 집어 들었듯, 이제는 2013년 미국에서 출간된 수잔 최의 새 장편 소설 <나의 교육(My Education)>을 어서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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