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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가 돼야 나라가 망할까?

[박동천 칼럼] 아! 대한민국

말레이시아 항공사의 비행기 하나가 베이징을 향해 쿠알라룸푸르 공항을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되었는데 일주일이 넘도록 어떻게 된 일인지는 고사하고 흔적도 못 찾고 있다. 마지막 교신 지점이라고 여겨진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펼쳐진 수색작업이 아무 성과도 못 얻고 있을 때, 미국 쪽에서 새로운 가능성에 관한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15일)에는 마침내 말레이시아 수상이 남중국해를 초점으로 삼았던 수색작업을 확대해서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에서 남쪽으로는 남인도양에 이르는 지역을 수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239명이 탑승한 비행기가 실종되었어도 말레이시아라는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 비행기가 실종된 지 일주일이 넘도록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 비행기가 어디로 갔는지에 관해 아무 단서도 찾지 못하더라도 말레이시아라는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 것이 분명하다.

말레이시아 수상은 이 비행기가 항로를 이탈하는 과정에 누군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의도적인 손길”이 개입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고 발표했다. 말레이시아 수상은 이것이 납치를 뜻하는지 아니면 우발적인 소동을 뜻하는지 등, “의도적인 손길”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 밝혀진 바가 무엇인지에 관해 아무런 암시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의 언론은 말레이시아 수사 ‘관계자’를 인용하면서 “납치가 확실”하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관련 기사 : “말레이 여객기 ‘납치’ 결론”). 한국의 언론이 이런 식으로 불확실한 일을 단정해서 보도하더라도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말레이시아도 망하지 않고 대한민국도 망하지 않는다.

여객기 한 대 정도 실종된 것이야 세월이 지나면 결국 찾아낼 것이다. 설사 100년이 지나도록 못 찾는다 해도 말레이시아라는 나라가 그 때문에 망할 리는 없다. 많은 한국인들은 내가 지금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한가롭게 느낄 것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야말로 멀쩡한 대낮에 (또는 해거름에) 해군 함정 하나가 침몰해서 승무원 46명이 사망했는데도 끄떡 없이 살아남았다. 북한이 “1번 어뢰”를 쏴서 침몰시켰다는 보고서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는 과학자들의 지적을 뭉개버리고도 망하지 않았고, 만약 그 보고서 내용이 그대로 맞는다면 장차 북한이 그런 짓을 또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벽하게 열려 있는데도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생긴 다음에 무척 많은 일들을 겪었는데도 아직 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망할 날을 예상해 볼 방법도 전혀 없다. 뚱뚱하고 시력도 약한 병사 하나가 징집되었다가 석 달 만에 20kg을 강제 감량하고, 명백한 구타의 흔적마저 남긴 채 사망한 병사가 있는데, 가해자 색출은 고사하고 순직으로 처리조차 하지 않아도 나라는 튼튼하기만 하다. (관련 기사 : “군 입대 석 달 만에 20kg 강제 감량”) 민주 정부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신성한 절차인 대통령 선거에서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증거들이 터져 나왔는데도 나라는 안 망한다. 이걸 수사하던 검찰총장과 수사검사가 오히려 직위에서 쫓겨나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나라는 안 망한다.

이런 정도는 약과다. 청와대와 경제 관료들이 정신 놓고 있다가 외환위기를 불러왔어도 나라는 안 망했다. 군인들이 백주 대로에서 시민들을 살상했어도 나라는 안 망했다. 군인들이 자기들끼리 정권 차지해 보겠다고 육군본부에서 서로 총질을 했어도 나라는 안 망했다. 중앙정보부장이 함께 술 마시다가 대통령을 살해했어도 나라는 안 망했고, 그 때 죽은 그 대통령이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사실상 종신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어도 나라는 안 망했다.

죄 없는 사람들을 “간첩”이라고 몰아서 억지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하루 만에 처형했어도 나라는 안 망했고, 그 사람들에게 수 십 년 지나 무죄판결이 내려졌어도 나라는 안 망했다.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처형까지 한 당사자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는데도 나라는 다행스럽게도 도무지 망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빨갱이’로 몰려 죽을 뻔하다가 동무들 명단 고자질하고 겨우 목숨만 건지고 군복을 벗었던 사람이 나중에 장군이 되어 민주정부를 뒤엎었어도 나라는 안 망했다. 그랬던 인간이 대통령 자리에 앉은 다음에는 엉뚱한 사람까지 ‘빨갱이’로 몰아서 죽였는데도 나라는 안 망했다.

그리고 그랬던 사람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어도 나라는 안 망했고, 그 딸이 대통령으로 행세하는 사이에 정보기관과 검찰이 또 다시 간첩을 창조해내는데도 나라는 망할 것 같지가 않다. 탈북자 중에 어떤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는 마당에 어떤 사람은 조작된 서류 때문에 간첩 혐의를 써야 하는데도 나라는 안 망한다. 서류 조작이 의혹 수준일 때는 “그런 일 없다”고 잡아떼던 자들이 조작이 명백하게 드러나자 “그깟 서류 한 장” 또는 “간첩은 맞다”는 식으로 언어도단의 생떼를 부리는데도 나라는 안 망한다.

이런 모든 일들이 또한 모두 약과다. 북한과 전쟁하느라 미국과 소련과 중국과 유엔군이 한반도에 모여서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살육전을 3년 이상 벌였지만 나라는 안 망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북한은 남한을 핑계로 남한은 북한을 핑계로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전체주의 체제를 만들었는데도 나라는 안 망하고 잘만 버티고 있다. 우리 대통령이 “통일 대박”을 선포해서 혹시 북한이라는 나라는 망할 날이 가까워졌을지 모르겠지만, 설사 그 날이 오더라도 남한이라는 나라는 더욱 번성할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얼마나 끈질긴 생명력인가! 정치학을 30년 넘게 공부한답시고 지내왔지만, 이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보다 눈이 밝은 사람들이야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 놀라운 발견을 이웃들과 공유하면 좋겠다.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도 아마 여간한 일로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 열 개가 망할 만한 일을 겪어도 굳세게 살아남을 것이다. 내일부터 이 나라의 기성세대들은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이 축복스러운 사실을 일깨워줘야 한다.

개그우먼이 민방위 훈련을 불평해도, 혹시 그 때문에 방송에서 잘릴지는 모르지만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알려줘야 한다. 몸무게 103kg, 시력 0.1 이하, 게다가 수전증까지 있는 젊은이는 징집을 거부해도, 혹시 그 때문에 딱 의무복무기간 만큼 감옥에 가야 할지는 모르지만, 나라는 망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앞으로 징집영장을 받게 될 모든 젊은이들에게 말해 줘야 한다. 

정보기관이 간첩을 창조해도, 정보원이 조작한 가짜 서류에 검사가 속아도, 또는 검사가 가짜 서류인 줄 알면서 기소를 강행해도, 당사자들에게는 혹시나 무슨 조치가 내려질지 두고봐야 알 일이지만, 어쨌든 나라는 안 망한다는 점을 우리 모두 확인하고 살아야 한다. 선거에서 부정이 횡행해도, 안 걸리면 넘어갈 것이고 설령 걸린다고 해도 버티고 잡아뗄 길이 없지만은 않으며, 정말 재수가 없어서 그 때문에 누군가 처벌을 받더라도, 어쨌든 나라의 건강에는 별로 손상이 가지 않는다는 경이로운 이치를 우리 모두 공유해야 한다. 남자건 여자건, 나이가 몇 살이건, 직업이 무엇이건, 체중이나 신장이 얼마나 되건, 가진 돈이 얼마건, 한 개인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 때문에 (재수가 없는 순서로) 스스로 형벌을 받게 될지언정 개인의 행동 때문에 나라가 망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확실한 진실을 우리 모두 신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분명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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