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국정원)이 10일 압수수색을 당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사건에 대해 "매우 유감"이라며 철저한 수사를 당부한 지 6시간 만이다.
남재준 국정원장도 궁지에 몰렸다. 구석에 몰아넣은 건 대통령의 한마디만이 아니다. 그간 이 사건 수사에 힘을 실어주던 <조선일보>는 남 원장이 책임져야 한다고 태도를 바꿨다.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에서도 남 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남 원장을 물러나게 할 것인지, 해임한다면 그 시기가 언제일지는 더 지켜볼 일이다. 박 대통령은 "증거 자료의 위조 논란"에 대해 유감을 표했을 뿐 국정원장을 공개 질타하지도, 국민에게 사과하지도 않았다.
남 원장 사퇴를 거론한 여당 의원들(이재오, 김용태)도 친박 주류와 거리가 멀다. 국정원이 위조했을 리가 없다며 중국 정부 책임론까지 거론했던 친박 주류는 조작을 더는 부인하기 어려운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자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며 발을 빼는 분위기다.
법치 국가의 근간을 뒤흔든 사건이 터졌는데도 국정원의 수장이 멀쩡한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국정원장을 교체하고 몇몇 실무진에게 책임을 묻는 선에서 사건을 덮으려 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남 원장을 끝까지 비호하다가 선거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정권이 너무도 큰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은 피할 가능성이 있다는 진단이다.
가능한 그림이다. 이 대목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남 원장이 물러난다고 해서 국정원이 정상화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국정원의 체질을 뜯어고치는 작업이 절실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피 같은 세금으로 불법 대선 개입을 일삼고, 자기 조직의 이익을 위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만천하에 누설하고, 거짓 증거로 국민을 우롱하는 것 같은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수장만 제2의 남재준으로 바뀌고 체질은 그대로인 국정원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수장만 바뀐 국정원? 체질을 뜯어고쳐야
주인인 국민을 못 알아보고 오히려 물어뜯는 권력 기관. 서글프게도 현대사에서 낯익은 풍경이다. 국정원은 탄생 때부터 그러했다. 1961년 5.16쿠데타 세력이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제1호 안건이 정보부 설치안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중앙정보부는 국민이 아니라 최고 권력자를 주인으로 삼았다. 그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도 전두환 정권 때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각하의 분신 기관"(장세동 안기부장)을 자임하며 국민을 짓밟았다.
개과천선할 기회도 있었다. 노무현 정권 시절 국정원 과거사위를 통해 피 묻은 손을 스스로 씻고 거듭날 수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과거사 반성은 필요한 일이었지만, 국정원의 체질을 바꾸지는 못했다.
'이명박근혜' 정권 들어 국정원은 중앙정보부와 안기부 시절의 못된 버릇을 바로 드러냈다. 불법 정치 개입을 폭넓게 주문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강조 말씀’은 "대통령 각하의 분신 기관"이라는 전두환 정권 시절 안기부장의 말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관련 기사 : <"'이명박근혜' 국정원, 박정희 때로 회귀한 까닭은…"> <"우린 전두환 각하 분신"…국정원 DNA 안 변했다>)
국정원은 스스로 개혁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지난해 7월, 박 대통령은 국정원에 '셀프 개혁'을 주문했다. 그 후 증거 조작 사건이 터졌다. 드러난 모습만 놓고 보면, 국정원이 국민은 물론 대통령까지 시쳇말로 물 먹인 셈이다.
수사권 폐지를 비롯해 국정원의 체질 개선에 필요한 방안은 이미 제시돼 있다. 그러나 배짱을 부리는 국정원, 그런 국정원을 비호하는 여당, 무기력한 야당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박 대통령의 책임도 크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 개혁에 힘을 싣는 것과는 정반대 모습을 보였다. 불법 대선 개입 문제가 불거졌을 때 대통령은 침묵, '나와는 무관하다', 다시 침묵 후 '셀프 개혁'을 주문하며 국정원에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그 후엔,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 있으면 묻겠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다. 증거 조작 사건에 대한 태도만큼이나 애매모호한 이야기였다. 국정원의 댓글 공작과 관련해 2012년 대선 직전 TV 토론에서 '여성 인권 침해'를 주장하며 야당을 대차게 공격할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불법 대선 개입은 지난 정권 때 벌어진 일이어서 그런 것일까?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국정원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건 박근혜 정권 때다. 새누리당 의원들까지 엮인 이 파문 후 대통령이 내린 처방이 '셀프 개혁'이라는 허망한 방안이었다. 증거 조작 사건도 박근혜 정권 출범 후 터진 일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증거 조작 문제가 의혹 수준이 아님이 드러나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말이 없었다. 민주주의를 뿌리부터 뒤흔든 권력 기관을 바로잡을 의지가 대통령에게 있는 것인지 많은 이가 의문을 품는 이유다.
성찰 없는 검찰, 국정원에 책임 떠넘길 처지 아니다
체질 개선이 필요한 건 국정원만이 아니다. 검찰 역시 이번 사건의 책임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 2월, 증거 조작 의혹이 제기됐을 때 검찰은 "위조일 리 없다"고 강변했다. 지난해 유우성 씨에 대한 1심 재판에서 국정원의 거짓 사진 자료를 냈다가 패소한 검찰은 그 후에도 국정원 자료의 진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국정원에 모든 책임을 떠넘길 처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사건에서 국정원 자료를 바탕으로 기소하고 공소를 유지한 건 검찰이다.
증거 조작 의혹 진상 조사에 나선 후에도 검찰은 굼뜨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국정원 조력자 김 씨의 자살 시도 파문 후에야 수사 체제로 전환했다. 그러던 검찰은 대통령의 한마디 후 국정원을 압수수색하는 익숙한 풍경을 연출했다. 검찰이 최고 권력자와 국정원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 수사 과정에서 마찰이 생긴 후 낙마한 게 오래전 일이 아니다.
이번 수사선상에 있는 검사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몇몇 검사를 징계하는 것에 그쳐선 곤란하다. 이번 사건은 검찰 조직 전반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소 독점주의의 폐해, 피의자 인권보다는 최고 권력자 등의 심기를 우선하는 것 아니냐는 오랜 지적 등 짚어봐야 할 대목은 많다.
검찰은 단 한 번도 조직 차원에서 과거를 성찰한 적이 없다. 경찰과 군은 물론 국정원조차 과거사위를 만들어 인권 침해를 반성할 때도, 검찰은 거부했다. 유서 대필 사건을 비롯한 여러 과거사 사건에서 검찰이 판결에 불복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기소권 독점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쥔 검찰이 국민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인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나온 이유다. 기소 독점주의 폐지를 비롯한 검찰 개혁에 다시 시동을 걸어야 할 때다. (관련 기사 : <"반성 없는 검찰, 마피아와 다를 게 없다"> <"'유체 이탈' 대통령, '찌라시' 김무성…비정상 판친다">)
독이 든 떡을 권하는 세력과 사랑의 매를 든 국민
증거 조작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책임을 추궁하면 공안 기관 전체가 약화돼 안보에 구멍이 뚫릴 수 있다고 걱정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걱정이다. 실상은 그와 정반대다. 집을 지켜야 할 무사가 주인을 몰라보고 주인 목에 칼을 겨누는 것만큼 위험한 상황이 또 있을까.
각국이 무한 경쟁하는 시대인 만큼, 쓸 만한 정보 기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국정원의 오늘을 감싸줄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반대다. 음습하게 댓글 공작이나 하고 거짓 증거를 만드는 데 힘을 빼지 않도록 단속해야, 정보 기관이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지 않겠나.
체질 개선은 두 조직의 구성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국정원과 검찰에도 국민과 법이 부여한 임무에 헌신하려는 이들이 일부 있을 터. 그런 이들이 제 역량을 발휘하게 하려면, 증거 조작 사건 같은 것을 꿈도 꿀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미운 놈은 떡 하나 더 주고, 귀한 자식일수록 매로 다스리라는 말이 있다. 그간 국정원과 검찰에 너무 매를 아끼고 그 입에 떡만 넣어준 게 사실이다. 그 결과가 주인을 몰라보는 권력 기관의 오늘이다. 떡은 충분했다. 사랑의 매가 필요한 시간이다. 그게 국정원과 검찰을 진정 소중히 여기는 길이다.
증거 조작 사건 등의 진실을 규명하고, 국정원과 검찰의 체질 개선을 추진할 때다. 이 과정에서 어떤 세력이 궤변을 늘어놓으며 독이 든 떡을 두 기관에 계속 먹이려 하는지 똑똑히 지켜보고 철저히 심판해야 한다. 제대로 뜯어고치지 않으면 국민은 또 물린다.
지난 편집국에서
▲ 이석기는 박정희 체제의 사생아인가
▲ 뉴라이트 '괴담 교과서', 방사능만큼 위험하다
▲ 국회 심장부에 14년째 '이승만 거짓말 동상'
▲ 박근혜, 아버지 뒤이어 교사에게 칼 겨눈 속내
▲ 주범 일본, 공범 박정희, 대못 박는 뉴라이트
▲ 겉도 박정희, 속도 박정희? 창조 경제 '죽이는' 박근혜
▲ 미스코리아 파동, 진짜 피해자는 따로 있다
▲ '206개 우주' 사라진 KT…문제는 이석채 이후다
▲ '각하 심기 경호' 위해 헌법 짓밟는 나라 부활하나
▲ '기춘대원군'? 흥선대원군에 비하면 멀었다
▲ '제2 새마을운동' 찬가 속 '이등 국민'들의 절규
▲ '민주 대 반민주' 문재인 구도, 걱정된다
▲ 박정희의 '꿈', 박근혜에게 짓밟히나
▲ 박용성 '돈 주먹'의 쓰디쓴 교훈, 헌법 위 재벌
▲ 박근혜 정부, '야스쿠니' 아베 욕할 자격 있나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