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교과서 진화론 개정추진위원회'는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에 진화론의 근거로 소개되고 있는 시조새에 관한 내용을 교과부에 삭제해 달라고 요구해 진화론-반 진화론 진영 간에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후에도 일부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이 근거 없는 이념'이라며 공격에 열을 올렸다.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에 따르면, 두 세기에 걸쳐 과학의 통설로 자리 잡은 진화론과 진화론의 증거들이 위협받는 풍경은 한국과 미국 몇 개 주에서만 가능한,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과학자이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함께 가르치면 안 되느냐'는 일각의 요구에 대해 "화학시간에 연금술을, 물리시간에 마술을 같이 가르치는 경우가 있냐"고 물으며 반박한다. 두 가지는 아예 층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은 최근 사회 전반에서 요구되고 있는 '융합', '통섭'이라는 가치와 실행을 생각할 때도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그저 이질적인 것을, 층위가 다른 것을 섞어 놓는 것이 융합이 아니라, 공통의 관심 대상인 인간을 바라보는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3월 5일 저녁 숭실대학교 형남공학관에서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이정모 관장의 특강이 열렸다. 프레시안과 김영사on, 숭실대학교 교육개발센터가 함께 하는 '인문학의 생각읽기' 시리즈 출간 기념 강연 네 번째 시간이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의 이정모 관장이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펼쳤다. 시종일관 웃음이 함께 했던 강연의 주요 내용을 지면에 옮긴다. <편집자>
'인문학의 생각읽기'는 앨빈 토플러를 포함해 노암 촘스키, 토마스 만 편이 출간되었고 향후 피터 드러커, 제레미 리프킨 등으로 이어지는 인문학 해설서 시리즈로,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 문명의 정신사에 큰 영향을 미친 현대 명사들의 저작을 중심으로 그 생애와 사상을 다룬다. 출판사 김영사on과 <프레시안>, 숭실대학교 교육개발센터는 본 시리즈와 함께 기획된 5회의 특별 강연을 진행 중이며, 그 주요 내용을 간추려 <프레시안> 지면에 싣는다.
☞13화로 완결된 <앨빈 토플러의 생각을 읽자> 만화 보기
☞김영사on의 '인문학의 생각읽기' 시리즈 서평 보기
☞지난 강연 '토마스 만 편' 기사 보기
과학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저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 이정모라고 합니다. 공무원이 된 지는 2년이 되었고요. 우리나라에 국립 자연사박물관은 모두 여섯 개인데, 그 가운데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이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2024년에 세종시에 국립 자연사박물관이 생기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국립 '종합' 자연사박물관이고요. 매일 세 쌍 씩은 데이트를 하러 오는 좋은 곳이니, 여러분도 언젠가 한 번 들러주세요.
인문학과 과학의 만남이라, 과연 저한테 과연 맞는 주제인가 싶은데요. 옛날 강의 파일을 보니 이 주제로 많이 떠들었더라고요. 그 내용을 죽 봤더니 주로 과학자 입장에서 인문학자들에게 과학을 알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질량은 알아? 속도는 알아? 세상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과학을 해야 해!' 이런 거였죠. 대체 제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나 싶은데요. 오늘은 정 반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과학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과학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죠. 일단 누구나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험을 떠올리시는데, 실제로는 실험 안 하는 과학자들 정말 많습니다. 작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힉스도 아마 학부 졸업 후 실험을 한 적이 거의 없을 겁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를 떠올리는 분들도 많을 텐데, 그런 천재도 거의 없습니다. 과학자들의 작업은 대부분, 무수히 많은 과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아주 작은 데이터들을 가지고 전혀 다른 차원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거든요. 왓슨과 크릭이 실험을 통해 DNA의 구조를 밝힌 게 아니었잖아요? 그들이 쓴 한 페이지짜리 논문은 다른 여러 논문을 레퍼런스 삼고 조합하여 새로운 사실을 밝혀낸 것이었거든요. 이 세상에 필요한 과학자들이란 바로 그런 작은 데이터들을 쌓아올리는 사람들입니다. 아인슈타인 한 명이 나오기 위해 수천 명의 과학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사람들이 과학자에게 많이 묻는 것 중 하나가 UFO나 외계인인데, 저 이거 모릅니다. 과학자의 연구 대상도 아니고요. 또 하나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라는 유명한 광고 카피 덕분에, 침대를 떠올리는 분도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적표. "과학, 수학만 아니었으면 내가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데"라 생각하는 분들 정말 많아요. 반면 어릴 때부터 '과학 오타쿠'였던 분들이 생각하는 건 이래요. 철인28호나 태권V 조종석에 탄다면 어떻게 될까? 음 아마, 계속 토하고 있을 겁니다.
다윈과 <종의 기원>
저는 재수를 해서 대학에 갔는데, 재수하는 동안 우리나라의 농촌 현실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서 농대를 지망했어요. 그런데 독실한 신자이신 저희 할머니께서 "예수님이 세운 학교에 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셔서 찾아보니, 그 '예수님이 세우셨다는' 학교에는 농대가 없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예수님이 세운 것도 아니었지만요.
하여튼 고3 때 선생님이 고민하는 저를 보고 생화학과를 추천했어요. 이게 농대 비슷하지 않겠느냐고요. 생화학을 생화(生花)로 보고 원예과 비슷한 걸 생각하신 거죠. 한 달쯤 뒤에 생화학이 바이오케미스트리(biochemistry)란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 공부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2학년 때는 경제학과에서, 3학년 때엔 철학과에서 살았어요. 대학원은 철학과로 가려다가 포기하고, 신학과를 가려다 망설였고, 결국 또 생화학과에 갔습니다. 대학원에 가서 만난 이가 이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 입니다.
대학원 실험실에 미국에서 온 교수님이 계셨는데, <종의 기원>을 어떻게 읽었냐고 물어보셔서 안 봤다고 했더니 그것도 안 봤냐며 놀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보기는 봤는데 너무 재미가 없어서 읽다 말았습니다. 그러다 독일로 유학을 갔는데, 역시 교수님 입에서 <종의 기원> 이야기가 나와서 안 읽었다고 했더니 그분도 한심하게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독일어로 읽기 시작합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찾아보니 '비둘기'래요. 다음번에 또 찾아보니 이번에도 비둘기, 비둘기, 비둘기… 비둘기만 다른 단어로 40개가 나옵니다. 결국 <종의 기원>을 접한 지 20년이 다 되어서야 읽게 되었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이걸 통해 과학이, 또 과학책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종의 기원>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종의 기원>을 만화로 설명한 책입니다. "과학은 의심으로 출발해. 의심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과학이고, 결과는 잠정적인 결론이지"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아주 정확한 이야깁니다. 가령 '달에 토끼가 살아요?'라는 것은, 아주 과학적인 질문입니다. 참인지 아닌지를 증명할 수 있잖아요. '목성에는 달이 없다'라는 명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성에서 달 하나만 발견해도 이 명제가 거짓이라는 점을 증명할 수 있으니까요.
즉, 반증할 수 있는 것이 과학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과학적 사실'은 '틀렸다고 증명되기 전까지 잠정적으로 일단 그것을 사실이라 하자'라 합의된 사실이고요. 그리고 그 잠정적 결론을 가지고 이론을 만들죠. <종의 기원>도 진화에 대한 이론을 담고 있는 거고요.
과학 발전과 인류 역사에 있어 정말 중요한 과학책들이 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 갈릴레오의 <신과학 대화>, 뉴턴의 <프린키피아>,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 그런데 이 책을 모두 읽은 사람, 여기에 없을 겁니다. 저도 그렇고요.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거고,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책이 나온 그 시대에 의미가 있었던 거지요. 가령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획기적인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 지금 보면 해석들은 엉터리거든요. 이 책들의 주장과 가치를 아는 데 위키피디아에 나오는 한 줄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런데 <종의 기원>은 아직도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나온 지 벌써 155년이나 되었지만요.
진화론의 진화
진화론은 다윈을 기점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닙니다. 이게 나오기 전까지 뭔가 축적된 게 있었겠지요. 먼저 자연신학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과학 혁명 이후, 신학자들이 자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요. 지금까지는 성경을 통해서만 신에 접근했는데, 가만히 보니 자연 역시 하느님의 작품인 겁니다.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의 추론이 유명하지요. "우리가 실제 발견하는 바로 그 목적으로 시계의 구조를 이해해 그것의 용도를 설계한 고안자들이 어떤 시기, 어떤 장소에 있었음이 틀림없다." 만일 황야에서 시계를 발견한다면, 누군가 반드시 설계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시계보다 더 복잡한 딱정벌레에 설계자가 없을 리 없다는 거죠.
그리고 분류학입니다. 뷔퐁(Georger Louis Leclerc Buffon, 1707~1788)과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라는 사람이 대표적이지요. 유럽에만 살았던 유럽인들이 전 세계를 다닐 수 있게 되면서 이전엔 알 수 없었던 엄청나게 많은 생물체를 발견했고, 분류의 필요성을 느껴 '종속과목강문계'라는 분류 체계를 만들게 됩니다.
분류를 해놓고 나서, 뷔퐁은 종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간에 따라 변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보통 저등한 것에서 고등한 것으로 변화해갔다고 생각하는데, 뷔퐁은 반대로 고등한 것에서 저등한 것으로 변해갔다고 생각했어요. 하느님께서 원래는 생물종을 완벽하게 고안해 놨는데, 죄를 짓다 보니까 조금씩 작아지고 볼품없어졌다는 겁니다. 지금 보면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중요한 것은 '종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했다'라는 아이디어의 발현이지요.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 1744~1829)라는 사람은 생물이 살아있는 동안 환경에 적응하고자 획득한 형질이 다음 세대에 유전되어 진화가 일어난다는 '용불용설'이라는 설을 내놓았는데, 이 역시 진화 이론의 씨앗을 품고 있었지요. 또 지질학이 발전하면서 지구의 역사가 굉장히 길고, 그 안에 다양한 격변이 있었으며 반복해서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진화가 왜,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알 수가 없었어요. 가령 종이 분화하면 성질이 많아야 하잖아요. 가령 엄마는 파란색이고 아빠는 노란색이면 자식은 초록색이 나올 것 아니에요? 그는 이 문제를 놓고 죽을 때까지 고민했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멘델(Gregor Mendel, 1822~1884)의 유전법칙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다윈은 이미 그 당시 가장 유명한 과학자였는데, 멘델은 지금 우리나라로 치면 정읍 중학교 선생님쯤 되는 분이었거든요. 멘델은 자신의 유전법칙을 마을 교사 잡지에 실었다가 다윈한테 보냅니다. 다윈은 원래 자기에게 온 논문은 죄다 밑줄 치며 열심히 읽던 사람이었는데 멘델의 논문만 건너뛰었다고 해요. 숫자를 엄청 싫어했다고 하거든요. 때문에 다윈은 죽을 때까지 고민을 해결하지 못했고 멘델의 유전법칙도 수 십 년간 땅에 묻혔다가 1900년 이후에야 재발견됩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예전에 <바이블 사이언스>(휘슬러 펴냄, 2003)라는 책을 써서 그런지, 창조과학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습니다. 그 책을 읽었으면 그런 요청을 안 했을 텐데, 제목만 보고 잘못 안 거지요. 덕분에 저도 강연을 하다가 중간에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약간의 열등감을 갖고 있습니다. 과학자라면 접어두고 가는 부분이 있다고 할까요? 이것이 종교 쪽에서는, 성서를 과학책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로 표출되곤 합니다. 신학자들이 과학자를 불러서 <창세기>를 해석해달라고 하는 거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충 때려 맞추면, 신도들은 "아멘" 합니다. 어쨌든 종교에서는 성서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절대로 과학책이 될 수 없습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을 같이 가르치면 안 되냐고도 묻습니다. 그런데 화학시간에 연금술을 같이 가르치자는 사람이 있나요? 물리시간에 마술을, 신경과학시간에 골상학을, 천문학시간에 점성술을 가르치는 경우도 없죠. 그런데 왜 진화론과 창조론을 같이 가르쳐달라고 할까요? 두 개는 층위가 전혀 다릅니다. 요즘 '융합', '통섭' 이런 말이 유행하면서 창조론과 과학을 함께 다루자고 하는데 안 되는 말이죠. 통섭은 같은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과학과 인문학의 공통 대상은?
과학과 인문학의 공통 분야가 있다면 단 하나, 바로 인간입니다. 어느 쪽이든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했고, 결국 인간을 위해 무언가를 하자는 거니까요. 그게 아니면 우리가 굳이 학문을 할 이유도 없죠.
인간도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수백만 년에 걸친 역사가 있습니다. 지구의 역사는 46억 년이고 생물이 만들어진 것은 36억 5000년 전입니다. 참 아름다운 숫자인 게, 1000만으로 약문하면 딱 1년 365일에 들어가요.
그래서 생물의 역사를 1년이라 한다면, 12월 5일에 고생대가 시작되었습니다. 12월 4일까지는 그저 세균들만 있었던 거고요. 12월 10일쯤 중생대가, 12월 24일쯤 신생대, 즉 포유류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호모사피엔스는 12월 31일 밤 12시 50분에 아프리카를 탈출합니다. 이미 전 세계에 다른 인류들이 살고 있었지만 단 5분 만에 나머지 인류들을 싹 없애버립니다. 그러니 호모사피엔스가 지금처럼 단 하나의 인류로 산 것은 현재까지 약 5분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12월 31일 하루만 생각하면, 그날 오전 10시가 700만 년 전에 해당합니다. 인류가 침팬지 계통을 벗어난 시간이지요. 오후 4시가 되면 직립을 합니다. 밤 11시 반이 되면 더 이상 뇌가 커지지 않아요. 즉, 우리의 뇌는 20만 년 전과 동일하다는 얘깁니다.
침팬지 계통에서 갈라서 나온 700만 년을 1년이라 한다면, 12월 31일 새벽 여섯 시까지 수렵·채취만 하다가 그때부터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는 겁니다. 오후 세시쯤에 도시를 만들었고 밤 11시 40분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지요. 그 혁명 이후 고작 20분밖에 안 된 겁니다. 변화는 이처럼 아주 급속하게 일어납니다.
너 인간, 지금의 모습을 만든 것은…
그런데 인간은 아주 허약한 존재입니다. 조그맣고,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변변한 뿔도 없고, 추위를 피할 털도 없고, 느려 터졌어요. 어떡하죠? 그런 인류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집단생활도 합니다. 강의도 이렇게 모여서 하고, 술도 모여서 마시고요. 또 언어를 사용하지요. 말을 정말 많이 해요. 노홍철 같은 사람도 이렇게 인기를 얻고, 말을 못 하는 상황에서는 채팅이나 트위터를 하니까요.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되기까지 중요한 계기가 두 가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똑바로 서는 것이었습니다. 뇌와 척추를 연결하는 대후두공이라는 구멍이 있습니다. 개의 경우 주둥이 제일 끄트머리에 대후두공이 있어요. 머리가 척추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거죠. 그래서 뇌가 커질 수 없습니다. 커지면 목이 부러지게 되거든요. 그런데 침팬지의 경우 약간 안쪽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더 안쪽에 있고 직립했던 호모에렉투스는 거의 가운데에, 호모사피엔스는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니 척추 위에 머리가 단단하게 올라갈 수 있었고, 그게 머리가 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거죠. 즉 직립하지 않았더라면 손도 자유롭지 않을뿐더러 뇌가 커질 기회도 없었던 겁니다.
두 번째는 불의 사용입니다. 제가 2년 전 여름 마다가스카르로 탐험을 갔는데, 현지 짐꾼이 남산만한 이불보따리를 가져온 거예요. 그곳은 저녁 7시만 되면 어둡고 할 일이 없어져서 그냥 자야 합니다. 12시쯤 너무 추워서 깼어요. 이불 없으니 못 자겠더라고요. 마다가스카르 사람의 이불을 당겼더니 "야, 너넨 눈 오는 나라에서 왔잖아. 이 정도는 참아야지" 하더군요. 새벽 3시쯤 되면, 누워 있지도 못해요. 그냥 서 있어야 합니다. 동쪽을 바라보면서 빨리 해가 뜨기만을 바라는 거죠. 그래서 태양 숭배 사상이 생겼나 싶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불을 썼기 때문에 인간이 예전에 살 수 없던 곳에서 살게 되었고, 예전에 쓸 수 없던 시간을 쓰게 되었다는 겁니다. 지혜의 전수도 가능해졌고, 무엇보다 음식을 조리해서 먹을 수 있게 되었죠. 침팬지는 먹을 것을 하루 12시간 이상 씹어야 겨우 자기 체온 유지가 가능한데, 우리는 한 시간만 씹어도 체온을 유지할 수 있지요.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은 많지만, 불을 사용하는 동물은 -아직까지- 우리 인간밖에 없습니다.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인간의 특징 : OO하는 인간
이렇게 진화한 인간들에 대해 특징들이 있지요. 간단하게 정리를 해봅시다. 첫 번째로 "탐구하는 인간"입니다. 탐구가 뭐죠? 가설,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질문을 제기하고 이론을 검토하는 작업이지요. 실제로 탐구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어요. 인간이 인간 될 수 있는 결정적 요소입니다.
특징 두 번째, '모방하는 인간'입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모방을 하기는 합니다. 일본에서는 한 원숭이가 고구마를 씻어 먹자 다른 애들도 다 따라 씻어 먹었고, 호주에서는 야생으로 방사된 돌고래 쇼의 돌고래가 꼬리 헤엄을 치자 그 동네 야생 돌고래들이 다 따라 하더랍니다. 사육사 없이도 그 정도는 다 하는 거죠. 하지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진짜 모방은 어떤 행위를 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까지 만들어내는 겁니다. 돌고래의 그 포즈를 보고 다른 포즈를 했다면 그게 바로 인간의 모방이지요. 동물은 '무엇을', '왜'까지 갈 수 있다면, 인간은 나아가 '어떻게'까지 가는 겁니다.
특징 세 번째, '공감하는 인간'이에요. 김연아가 금메달을 못 따니까 제 딸이 마치 자기 일처럼 울고, 김진숙이라는 노동자가 85호 크레인 위에 몇 달 있으니 수 천 명이 그 앞에 갔죠. 벌금을 수십만 원 떼는데도 이 사람이 웃어주면 좋아해요.
이건 인간이 고통을 당할 때의 뇌 사진과 그걸 보고 있는 사람의 뇌 사진입니다. 같은 부위에서 반응이 나타나요. 가령 쥐를 고문해도, 쥐에게서는 절대 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사람뿐 아니라 고양이하고도 공감을 하잖아요. 공감을 하면 선행도 베풀게 되고요. 물론 원숭이들끼리도 이를 잡아주죠. 하지만 잡아주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도 바라기 때문이에요. 다른 영장류들도 남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상대와 진짜 똑같은 감정을 갖는 건 사람밖에 없다고 과학은 말합니다.
네 번째 특징, '신앙하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정말 많은 종교를 갖고 있죠. 저 역시 종교가 있는데,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의심 못 하는 환경에서 자라서 헌법이 보장한 종교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자랐어요.(웃음) 저희 딸까지, 5대째 독실한 기독교 집안입니다. 종교 때문에 순교하는 사람들도 있죠. '안 믿을게'라고 부인만 하면 되는데 그러지 않아요. 친구들 중에 주사파도 있는데, 이것도 거의 신앙에 가까운 경우가 있어요.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편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뭔가 절대자가 필요했던 거겠죠. 인간의 여러 가지 이해 못 할 행동이 이 신앙과 관련이 있어요. 이를테면 메카로의 성지 순례, 뉴스에서 보신 적 있죠. 매년 수백 명씩 죽는다고 하지만, 이슬람교도들의 꿈이잖아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이라고 수천, 수만 명이 모여 예배드리는 건 또 어떤가요? 외계인이 보면 정말 이해 못 할 거예요. 이런 동물은 인간 외에 없고요. 먹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모여서 신앙을 표출하는 것은 인간의 유일하고 중요한 특질 중 하나죠. 그러다보니 종교가 어떤 선을 넘어서기도 해요.
창조론은 과학인가?!
요즘 이상하게 한국이 <네이처>에 자주 나옵니다. 2년 전 제가 마다가스카르에 간 사이, <네이처>에 "한국의 과학자들이 창조론자들에게 항복했다"는 기사가 뜬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에 시조새에 관한 서술 문제로 뜨거웠던 거 기억나시죠? 창조론자들이 교육과학기술부에 진화론의 근거로 교과서에 실려 있는 시조새 내용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랬더니 교과서 출판사에서 저자들한테 '이걸 어떻게 하죠?'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명색이 과학자란 사람들이 '그럼 그냥 빼지 뭐' 이렇게 된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거죠. 다른 나라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한국과 미국에서는 일어납니다.
종교에 대한 동상이몽을 봅시다. 종교에 대한 과학자들의 입장을 보면 크게 세 부류쯤 돼요.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를 망상이라 하면서 박멸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은 '종교인들도 착한 사람이고, 과학자도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니, 힘을 합치면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입장에 가까웠지요. 환경 문제의 해결 같은 것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스티븐 제이 굴드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 다른 것이라며 중첩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무 상관없으니,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잘 살고 피곤하게 굴지 말자는 거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굴드 쪽에 가깝습니다.
저도 참 이 두 세계 사이에서 난감한 일이 많았습니다. 한국 과학계에서 누가 "이정모, 참 괜찮은데 교회를 다닌데!"라고 그랬대요. 또 제가 독일에 있을 때는, 어느 교수님이 그야말로 '뚜껑 열린' 적도 있었지요. 일요일에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설교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더니, '네가 어쩌면 그럴 수 있어?'라고 패닉에 빠지신 거죠. 한편 우리 교회 장로님과 이 문제를 상담하면 "이정모 선생처럼 좋은 사람이 과학을 하려니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겠어" 이러십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교회 채널, 집 채널, 실험실 채널, 이렇게 세 개의 채널을 써야 했죠. 그러다 2004년 교회 목사님의 요청으로 창조과학에 대한 강연을 하다가 그것은 잘못 된 것이라고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그래도 나이 든 분들은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고 제가 좋다고 막 좋아하는데, 2~30대 신도들이 저 사람이 미쳤나, 이런 눈으로 격노했지요. 깜짝 놀랐어요.
이 갈등에 해결법이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갈등이란 것은, 있으면 헤어져야 합니다. 고부 간 갈등이 심하면 헤어져 살아야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종교 혹은 인문학과 과학에 갈등이 있으면 헤어져 있어야 해요. 그 '분리' 다음에는 다시 접촉합니다. 헤어졌다 다시 만나면 지지할 수 있는 고리를 찾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한국에서 요즘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접촉)을 말하는데, 사실 그 전에 갈등-분리가 있지도 않았거든요. 요즘은 융합한다고 억지로 만나게 하는 듯하지만, 결국엔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겠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지할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도 있겠고요.
융합하는 인간
인간의 특징으로 탐구, 모방, 공감, 신앙을 말했지요.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추가하겠습니다. 바로 '융합하는 인간'입니다.
만약 한국에서 로봇을 만든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이 모일까요? 재료공학자, 전자공학자, 기계공학자, 생물학자 또는 의학자 등을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 MIT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입니다. 기계공학자도 물론 있지만, 그 외에 언어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미술가들도 모인대요.
노암 촘스키 같은 언어학자는 이런 데 와서 '웃기지 마. 인공지능이란 건 있을 수 없어!' 라며 초를 치고 가요. 하지만 이렇게 만나는 게 융합이라고 생각해요. 다 수학적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뭐가 나오겠어요. 완전히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만나야 있어도 뭐가 있겠지요.
융합은 바로 그러한, 서로 이질적인 것을 섞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려요. 하지만 언제나 1~2년 안에 뭘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고요. 서로 이해하기도 전에 뭘 한답니까?
과학자들이여, 세상을 보아라!
어쨌든 과학은 굉장히 겸손한 지식이고, 종교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가장 신빙성 있는 지식이며, 자연을 파괴하기도 하지만 복원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요. 사용 방법에 따라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지식. 하지만 그 의미와 가치가 바로 나오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좋은 방향으로 쓰기 위해 꼭 필요한 게 있어요. 다른 누구보다 과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바로 인문적 가치입니다.
최근에 신문을 보니, '로봇의 습격'이 와서 20년 내에 현재 직업의 47%가 없어진다고 하더군요. 가장 상위에 랭크된 것이 텔레마케터, 회계사, 전문작가 등이었어요. 성직자, 치과의사 정도만 남는다고 해요.
과연 과학이 좋기만 한 건가, 고민이 많이 되죠. 특히 생물학 쪽에서 그렇습니다. 2002년에 귀국하자마자 젊은이 300여 명이 모인 강연에서 "여러분은 백 살까지 삽니다"라고 말했다가 후배 교수한테 욕을 먹었는데요. 10년 하고 조금 지나니 다 백세 시대 이야기하잖아요? 서른 살쯤 되어야 정규직이 되고 쉰 되면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는데, 100살까지 50년간 대체 뭘 해먹고 살아야 하는지, 정말 큰 문젭니다. 사회안전망은 하나도 없는데 이렇게 발전만 해서 되겠는가, 고민을 해야 할 때라는 거죠.
홍승우 씨 만화를 보니 이런 내용이 나와요. 미래가 되어서 무인 공장, 무인 자동차, 다 무인·무인·무인이에요. 아이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로봇을 만들었는데, 그러면 택시 운전사인 우리 아빠는 뭐 하지? 간호사인 우리 엄마는 간병로봇 나오면 어떻게 되지?" 바로 이런 게 과학자들에게 필요한 겁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일인지 고민하고, 세상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해요.
중세 대학에서 처음 1년간 배우는 과목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 음악이었답니다. 결국 글쓰기를 배운 건데요. 그 다음에 산수와 기하학, 천문학을 배웠지요.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양쪽을 완전히 나누어서, 이쪽에 있는 사람은 저쪽을, 저쪽에 있는 사람은 이쪽을 못 배우고 있어요. 그나마 최근에는 이과생들도 글쓰기를 배운다고 해요. 저는 한 번도 글쓰기를 배워본 적이 없어서 참 슬픈데, 요즘 대학에 다녔으면 참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말이죠.
스템(STEM)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ematics)의 머리글자를 딴 거지요. 그런데 요즘 융합이다 뭐다 해서, 여기에 A(Arts)를 합친 스템(STEAM)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놨어요. 그런데 요즘 이게 학교 선생님들을 힘들게 한답니다. 스팀 교육은 어떻게 하겠는데, 여기에 Arts를 넣으니 헷갈리는 거죠. 보통 미술이나 음악을 생각하는데, 거기에 기본적인 재능이 있어야만 할 수 있으니까요.
런던 자연사박물관 관장과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게 왜 힘드냐고 묻더군요. 그가 말하길, Arts는 음악과 미술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Arts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즉 인문, 역사, 철학 등을 말하는 거래요. 그런데 음악과 미술에 한정 지으니까 힘든 거고요. 조금이라도 인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스템 수업을 무리 없이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스티븐 잡스가 생전에 가장 많이 보여준 키노트 화면은 테크놀로지와 리버럴 아츠가 교차하는 모습이었어요. 우리는 창의적 제품을 만들고 있는데, 그것은 늘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있으려 했던 덕분이라는 거죠. 이 사람은 기술자이지만, 항상 인문학 쪽에 접근해서 봤습니다.
사실 인문학자가 과학적인 접근을 하기는 쉽지가 않아요. 언어가 아예 다르니까요. 과학-인문학이 만나려면 과학자들이 먼저 접근해야 할 텐데, 늘 '너희는 잘 모르니 내가 가르쳐 줄게'라는 식으로 대해 왔거든요. 이른바 과학 대중화 운동도 그런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될 겁니다.
칼 세이건, 에드워드 윌슨, 최재천, 정재승 같은 사람들은 과학자이면서 인문학적 베이스가 매우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위 '문사철' 책을 어마어마하게 읽었던 사람들이죠.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이 과학자들처럼, 더 많은 과학자들이 정말로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세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성찰하는 자세를 가졌으면 합니다. 네, 저도 그렇고요.
단 1회 남은 본 시리즈 강연, 강신주의 마지막 강연 신청을 받습니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조합원 및 프레시앙(후원 회원)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강연이며 성함과 연락처, 동반 인원을 적어 담당자 이메일(ezhyun@gimmyoung.com)로 보내주십시오.
시간 : 3월 12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장소 : 숭실대학교 형남공학관 115호 (☞형남공학관 지도)
5강 3월12일 수요일 '우리 삶에서 인문학적 소통이 왜 필요한가' 강신주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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