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주위에는 민중의 집이나 협동조합(대개 소비자협동조합)을 만들고 일구는 데 뛰어드는 이들이 많이 있다. 나는 여기에서 미래의 희망을 본다. 그런데 진보 좌파 안에는 이런 흐름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 협동조합 등을 사회 변화와는 무관한 중산층 웰빙 문화 정도로 치부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운동을 순치시키거나 흡수하려는 수단이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무시할 수 없는 비판이다. 최근의 협동조합 붐에는 분명 경계해야 할 구석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관공서가 나서서 협동조합을 육성한다며 '제2의 새마을운동'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게 그렇다. 이미 '사회적 기업' 논의에서 나타났던 양상의 반복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모처럼의 협동조합 르네상스 역시 관 주도의 한 철 이벤트로 전락해버릴 위험이 높다.
또한 협동조합이나 지역 공동체를 사회 변화의 유일한 대안으로까지 내세우는 것 역시 의심해볼 일이다. 협동조합이 몇 천, 몇 만 개가 되고 인구 중 조합원이 몇 십 % 이상이 된다고 해서 자본주의 아닌 다른 사회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혹은 그렇게만 되면 정치 사회 전반이 자동으로 북유럽 수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당이나 노동조합이 맡아야 할 중요한 과제가 여전히 있고, 그것은 다른 조직이나 활동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협동조합이나 민중의 집 운동이 무의미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좌파 정당이나 노동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이들만의 중대한 역할이 있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사회'라는 말부터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곳저곳에 무심코 '사회'를 갖다 붙이지만, 거기에는 서로 다른 여러 층위가 있다. 가령 "한국 사회"라고 할 때의 '사회'는 규모도 무척 크고 구조도 엄청나게 복잡한 인간 집단이다. "사회 변혁"을 말하면서 염두에 두는 것도 이런 층위의 '사회'다.
그런데 이런 '사회'가 존립하기 위해서도 또 다른 층위의 '사회'들이 있어야 한다. 그 가장 밑뿌리에는 개인들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며 협력하고 반목하며 함께 삶을 이어가는 관계들이 있다. 우리가 실제 얼굴을 맞대며 대화를 나누고 애증의 감정을 갖는 것이 바로 이 층위의 '사회'다.
경제학의 용어법을 그대로 따온다면, 앞에서 말한 '사회'는 '거시 사회'쯤 될 테고, 뒤의 '사회'는 '미시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썩 좋은 표현은 아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학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구분법을 제시한다. 대표적으로 폴란드 출신의 거장 지그문트 바우만이 있다.
바우만은 인류학자 빅터 터너로부터 '소시에타스(societas)'와 '코뮤니타스(communitas)'의 구분법을 빌려온다. 소시에타스는 여러 제도들을 통해 틀이 짜여 있는 '사회'다. 우리가 '사회'라고 하면서 흔히 떠올리는 것이고, '미시'보다는 '거시 사회' 쪽에 해당한다. 한데 이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코뮤니타스라는 또 다른 영역이 있다.
"인간이 함께하는 방식은 각양각색이지만 어느 것도 완벽하게 구조화되지는 않으며 (…) 어떠한 위계도 총체적이고 고착된 것일 수 없다 (…) 완벽히 구조화하려는 시도는 모두 수많은 '풀린 끈'과 논쟁적인 의미를 남겨 놓는다. 매번 빈 점, 규정이 명료하지 않은 영역, 모호성들 또는 공식적인 육지 측량부의 지도상에는 나오지 않는 '무인' 지대들을 만들어낸다.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들이 남겨 두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곳들(즉, 코뮤니타스 : 인용자)이 바로 인간의 자발성과 실험 정신과 자기-헌법화의 영역을 구성한다.
코뮤니타스는 좋든 나쁘든 소시에타스라는 구름의 안감이다. 만약 코뮤니타스가 없다면(그러한 부재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러한 구름은 사라질 것이다. 소시에타스는 이음매가 풀어지면서 흩어져 버릴 것이다. 통상적인 순서와 방법을 따르는 소시에타스와 무정부적인 코뮤니타스가 마지못해 그리고 갈등에 시달리면서도 함께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질서와 무질서는 구분될 수 있다." (<리퀴드 러브>(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권태우·조형준 옮김, 새물결 펴냄), 177쪽)
바우만이 이런 낯선 용어들을 동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과학자들이 작성한 대부분의 지도에서 흔히 생략되는 코뮤니타스의 영역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서로 돕고 보살피며, 타자를 위해 살고, 상호 헌신의 조직을 짜내며, 인간들 간의 유대를 단단히 하고 수리하며, 권리를 의무로 해석하고 모두의 운명과 행복에 대한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178쪽), 즉 '도덕 경제'는 코뮤니타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법령도, 어떤 경제학 법칙도 그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소시에타스는 단지 그렇게 만들어진 '도덕 경제'에 발을 디디거나 아니면 그것을 파괴할 수 있을 뿐이다.
바우만이 '도덕 경제'라고 칭한 것을 또 다른 사회학 거장 리처드 세넷은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라 일컫는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인 것'이 개인의 능력으로 구현되는 것을 '사회성(sociability, 본래는 '사교성'이라는 뜻)'이라 부른다. 세넷은 사회성을 함양하지 않고 단지 제도 변화만으로 좋은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그의 최근작 <투게더>(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의 주제다.
이 책에서 세넷은 더 나아가 좌파를, 제도 변화만을 강조하는 '정치적 좌파'와 사회성을 키우는 데 주목하는 '사회적 좌파'로 나눈다. 그는 정치적 좌파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사회적 좌파라고 주장한다. 정치적 좌파에 속하는 것은 좌파의 두 주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이고, 사회적 좌파의 대표 사례는 로버트 오언의 초기 사회주의,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 그리고 미국판 민중의 집인 사회복지관 운동 등이다.
너무 나갔다는 느낌은 있다. 하지만 세넷이 왜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지는 이해가 간다. 세넷과 바우만 모두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복지 국가를 지키는 데 앞장서온 인물들이다. 제도 변화나 정책 대안을 무시할 이들은 아니다. 한데 이들이 보기에 신자유주의 질서는 이제 단순히 복지 국가의 제도적 틀을 훼손하는 것을 넘어 그 토대인 대중의 사회성(혹은 도덕 경제)까지 해체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거시 사회 수준의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이에 맞설 수 없다. 19세기에 산업 자본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 초기 사회주의자와 노동 운동가, 협동조합 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시 사회에서부터 사회성 자체를 되살려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복지 국가를 재건하고 강화하는 일도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두 거장이 생애 말년에 우리에게 전하려는 간절한 메시지다.
바로 여기에 오늘날 협동조합 혹은 민중의 집 운동의 절실한 의의가 있다. 평소 고립과 경쟁, 질시에만 익숙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혁명 대중으로 돌변한다는 신화를 우리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이 돌연 뛰어난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에게 표를 던져 세상이 바뀐다는 신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는 혹여 체제 쪽의 실책으로 예외적인 정치 격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게 진지한 사회 변화로까지 이어질 수는 없다.
일상에서 새로운 삶을 훈련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사회로 도약할 수도 없다. 협동조합이나 민중의 집 운동은 우리 스스로 그런 훈련장을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그러니 이제 논란과 우려를 넘어 '우리의' 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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