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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봉제사가 아니다, 난 일류 재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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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봉제사가 아니다, 난 일류 재봉사다"

[전순옥·권은정의 D-프로젝트] 김욱련 재봉사

동대문구 신설동 지하철역에서 만나 작업실로 걸어가면서 김욱련 씨는 요즘이 1년 중에 제일 한가한 때라고 말했다. 12월부터 2월 즈음까지 별로 일감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드문드문 거래처에서 맞춤옷을 의뢰해오고 있어 재봉틀은 계속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의 작업실은 건물의 이층이었다. 실내는 재단대와 재봉틀, 옷감을 넣어놓은 선반으로 꽉 차있었다. 그는 작업실이 누추하다고 했지만, 그간 다녀본 중에 아주 좋은 환경에 속하는 작업장이라고 말해 줬다. 다만 좀 추웠다. 난방이 안 되는 건물이라 작년에는 그냥 지내다가 올해부터는 조그만 석유난로를 피우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충분히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 김욱련 재봉사. ⓒ프레시안(손문상)
차를 한 잔씩 내주더니, 그는 바로 일을 해야 한다며 재단대 앞에 섰다. 여성용 패딩 겨울 코트였다. 재단대 가까이, 그러나 일에 방해는 안 되게 옆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위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다.

"이게 천연염색 옷감에다가 솜을 넣어서 만드는 거예요."

그는 쓱쓱 삭삭 패턴 본에 맞춰 옷감을 잘라냈다.

김욱련 씨는 올해로 재봉 경력 40년째인 재봉 기술자이다.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바로 이쪽으로 들어와 50대 중반인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그러다가 3년 전 이맘때, 추운 겨울날 당시 장충동에 있던 '참여성 복지터' 공방을 찾아갔다. 당시 복지터를 만들어 운영하던 전순옥 대표를 만나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도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말씀 좀 해주세요!"

그는 평생 봉제 일을 해오면서, '내가 하는 일은 왜 이리 대우를 못 받나?' 하는 생각에 늘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서 해마다 일거리가 뜸해지는 겨울이 되면 뭔가 좀 더 나은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 나서는 버릇이 있단다. 그때 우연히 전순옥 대표가 하는 봉제아카데미 기사를 본 것이다.

"그분 마인드가 늘 내가 생각하고 꿈꾸던 것이었어요. 내가 해온 일로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당시 아카데미에서 교육생을 가르칠 경력자를 구하고 있던 전 대표는 김욱련 씨에게 봉제기술을 가르치는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것에 앞서 강사 프로그램을 이수하라고 권유했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 있어도 가르치는 법은 또 다른 것이니, 교수 방법이나 이론을 배워야 했다. 그는 6개월간에 걸쳐 교육 프로그램을 마치고, 강사로 참여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3년이 넘도록 아카데미에서 교육생을 가르치고 있다. 개강하면 1주일에 2~3일 정도 수업이 있는데, 방학인 요즘은 이주여성들을 위한 센터 ‘디딤터’에서도 재봉 교육을 하고 있다.

"지금은 보람을 많이 느끼지요. 요즘 다들 고등교육 받은 이들이 봉제기술을 배우러 오는 것을 보면서 이 기술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싶어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그러나 약간 머뭇거리면서 말을 덧붙인다.

"그전에는 어디 나가서 봉제일 한다고 말을 쉽게 꺼내 놓을 수 없었어요. 창피했으니까요. 다들 폄하하는 게 있었으니까. 공순이라는 말 듣는 게 상처였어요. 사람들은 제품하고 인쇄 쪽 일을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랬지요. 대우를 못 받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친구들도 부러워해요. 이 나이에 내 일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 일은 내가 건강하기만 하면 언제까지나 할 수 있는 거죠.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게 여간 고맙게 생각되지 않아요."

ⓒ프레시안(손문상)

봉제일은 시다(보조) 생활에서부터 시작한다. 미싱사 옆에서 박음질하기 직전 과정을 도맡아 보조 일을 하다가 인정받으면, 미싱을 타게 된다(재봉 기술자들은 재봉틀 앞에서 바느질을 맡는 경우, '미싱을 탄다'라고 말한다. 편집자 주). 미싱에 앉기까지 시다의 길이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선배 미싱사들이 안 가르쳐 주려고 했어요. 우리 같이 처음 일 배우는 입장에서야 점심시간에라도 잠깐 앉아보려 애써보지만, 허락을 안했지요. 시다로 5,6년 고생했어요. 일 배우는 것보다 고생을 더 많이 한 것 같아요. 요즘이야 일부러 기술 가르쳐 주려고 하지만, 그때는 밥만 먹여주면 아무 일이나 하고 그랬던 시절이었지요. 그렇게 배운 기술이 몸에 익어서 그런지 이젠 다른 일들이 두렵지 않아요. 미싱만 바로 배운 사람들은 다른 일 못해요. 우리는 뭘 줘도 다 하거든요. 속도나 품질 면에서 머뭇거리는 게 없어요. 우리는 다 해낼 수 있다고요!"

김욱련 씨는 요즘 교육생들을 가르치면서 옛날과는 많이 다르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기술은 그저 ‘배우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참고 견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아카데미에 봉제기술 배우러 오는 분들이 주로 3,40대인데요, 나이 어린 젊은이들은 없어요. 기술은 배우는데 나이 제한이 없고, 또 기술을 배워 취직하기도 까다롭지 않으니 좋지요. 그런데 저희 쪽에는 오히려 외국인이 많아요. 한국인들은 거의 없죠. 직장에 취직을 해도 버텨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봐요. 기술만 익히면 수입이 어느 정도 되는 데도, 사실 사람 찾기가 어려워요. 취업을 목적으로 배워서 작업장으로 나가는데, 대우 면에서 못 견디겠다고 그만두더라고요. 교육할 때 늘 그 정도는 견뎌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못하더라고요."

그가 안타까운 듯이 계속 말을 한다.

"거래처에서 원하는 수량을 맞춰 줘야 하는데, 우리는 시장과 연관되어 있으니 그렇게 해야 하잖아요. 바쁘면 밤 12시 넘어서까지도 일해야 하거든요. 솔직히 장사라는 것이 팔리는 시기라는 게 있잖아요. 그때를 맞춰줘야 하는 게 우리의 일이거든요. 그런 데서 입장 차이가 생기는 거죠. 기술 배우면서 내 권리 찾겠다고 6시 칼퇴근을 꿈꾸고 오는데, 사실 생산라인이 그렇게 해서는 되질 않거든요."

봉제라인에서 일하는 이들이 좀 더 현실적인 감각을 가지는 게 현명하다는 선배의 충고다. 그러나 그도 작업장 환경이 열악하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한다.

"우선 작업장이 개선되면 새로운 세대들이 유입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을 거 같아요. 인격적인 대우, 그것도 문제인데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요. 물론 아직 적응이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겁니다. 또 너무 높은 꿈을 갖고 오는 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봉제 일을 하는 현장에서 '저 사람은 꿈꾸고 있나' 하는 생각 들게 만드는 이들도 있거든요."

ⓒ프레시안(손문상)
김욱련 재봉사는 긴 세월 봉제 쪽에서 단련된 이다. 자타공인 고급 숙련 재봉사이다. 그에게 요즘 봉제와 관련해서 '진짜 좋은 기술을 가진 재봉사들이 많이 모자란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사실 돈으로만 생각하고 품질보다는 수량 위주로 일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 인정해요. 그러나 모순이 있어요! 품질은 좋게 해달라면서 단가는 싸게 하자고 하니 그게 문제라는 거죠. 저한테 오는 디자이너들만 해도 그래요. 많이들 오는데, 결국 얘기하다 보면 가격을 싸게 해주는 이들을 찾아가더라고요. 우리가 옷을 정성껏 만들어 준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을 더 투자한다는 것 아닌가요? 좋은 품질의 옷을 만들고 싶으면 공임에 투자해야 하는데, 그렇게는 안하려고 해요. 정성을 들이는 걸 따지면 판매가의 절반을 우리에게 줘야 하는데, 예전부터 왜 생산라인에서만 가격을 낮추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김 재봉사는 만들고 있던 옷을 들어 보이며 설명한다.

"지금 이 옷만 보더라도 겉감·솜·우라(안감)까지 재단을 세 번하는데, 이렇게 해서 10여만 원 정도 받는 거 결코 비싼 거 아니거든요. 객공(客工, 임시로 고용한 직공)으로 일하는 분들은 단가를 훨씬 더 싸게 받아요. 그날 일한 수량에 따라 돈을 받는 객공은 정말 기계처럼 일해야 해요. 어떻게 그렇게 싸게 받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재킷 하나에 봉제공임을 8000원에서 1만 원 정도 받아요. 남자 코트 하나에 2만 원 정도일 걸요. 참, 어이없는 일이 많지요. 그러나 일이 없을 때는 이렇게 단가가 낮아도 서로 하겠다고 나서니까, 문제죠. 우리가 단합해서 이 가격에는 안 하겠다 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그런 형편이 안 됩니다. 이쪽에서 안 하겠다고 하면 저쪽에서 누군가 그럼 그 가격이라도 맡겠다고 하는 식이니, 공임이 낮아질 수밖에요."

그는 우리나라 봉제업이 참 대단한 산업인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창신동, 신당동, 미아리 주변에 사는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이 이일에 종사하면서 아이 키우고 먹고 사는걸 보면 엄청난 규모의 산업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봉제업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된단다.

"재단이나 재봉 등 옷 만드는 일은 늘 손이 필요한 산업이지요. 저도 100장 단위로 대량 주문이 들어오면, 다른 사람을 써야 하거든요. 주로 베트남 분들을 쓰는데요. 이분들이 참 잘해요. 감각도 있고, 다른 외국인들 중에 손재주가 제일 나은 것 같아요. 도움을 많이 받아요. 그분들은 평일에 다른 직장 다니고 주말에 아르바이트하러 와요. 참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예요. 이번 설에 다들 돌아가서 앞으로 어떻게 하나 싶어요."

그가 살짝 웃으며 덧붙인다.

"요즘은 한국 사람들 안 쓰려고 한다는 말도 있어요. 임금도 높고 이것저것 따지는 게 많다고. 거기다가 요즘 대량으로 옷 만들어 파는 H&M 같은데 가보면, 디자인도 예쁘고 가격도 싸고 그렇잖아요. 외국에서 만들어 온다고 하는데, 우리로서는 그 가격에 어떻게 만들어 오는지 모르겠어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에요. 이런 옷들하고 경쟁해야 하는데, 우리 봉제 산업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 건지 참 안타깝지요."

ⓒ프레시안(손문상)

김 재봉사는 패딩 처리된 천 조각을 들고 미싱 앞에 옮겨 앉는다. 이제 재단이 끝났으니, 재봉을 할 차례인 것이다. 오려 놓은 옷감을 이리저리 맞추더니, 바로 박음질에 들어간다. 다르르, 다르르….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부드럽게 깔린다.

"어떨 때는 이 미싱 돌아가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 때가 있어요. 고통스럽고 힘들고 피곤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이 소리가 편하게 느껴지거든요. 도 통한 건가요? 하하하. 사실 지금은 미싱할 때 마음이 제일 편해요. 전에 잠깐 보험회사도 다녀 봤는데, 그때는 그쪽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잘나 보이던지. 나도 저런 거나 해봐야겠다 싶어서 가봤죠. 그런데 저와는 잘 안 맞는 일인 것 같아서 그만뒀습니다. 마음이 안 편했어요. 미싱할 때야 고작 머리 쓴다는 게 하루에 몇 장을 더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런 건데, 그쪽은 전혀 다른 세상 같아 보였어요."

그의 손놀림은 눈으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박음질을 시작했나 하는 순간, 어느덧 옷은 형태를 갖추며 미싱대에서 살포시 내려앉는다. 나는 박음질이 끝난 밑단 부분이 걸리지 않게, 작업대 아래쪽으로 옷감을 살짝 잡아 내려놓았다. 시다가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거 아닌가 하고 물었더니, 그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옛날에는 다들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 일을 했어요. 그래서 무릎이 성할 수가 없었지요. 지금처럼 미싱이 이렇게 높지 않았고 중간 높이 밖에 안 되었으니, 시다들은 그 앞에 꿇어앉아 일을 해야 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참…."

ⓒ프레시안(손문상)
그가 손놀림을 멈추며, 잠깐 머뭇거린다.

"그전에 모르고 할 때는 빨리빨리 하는 게 잘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요즘은 속도 하나에도 품질과 연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는 자신이 옷 만드는데 들이는 시간이 놀랍도록 '느린 것'이라고 설명하고자 한다.

"지금 제가 일하는 것은 신선 놀음이라고 보시면 되요. 객공들 하는데 가면, 정신이 없어요. 팀을 만들어서 일하는 걸 보고 있으면, 무슨 자동 기계처럼 일한다니까요! 남성복 만드는데 가보면 미싱사와 시다가 한 팀을 이뤄서 하는데, 마치 기계가 돌아가는 것 같아요. 그전에는 둘의 임금 차이가 크게 났는데 요즘은 반반이지요. 시다가 전반적으로 기술을 완전히 다 알아야 하니까요. 미싱사는 박기만 하면 될 정도에요. 세상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전에는 재단사가 직장에서 최고였지요. 그의 말이 법이었는데, 요즘은 달라졌어요."

한 벌의 옷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디자이너와 봉제사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종종 서로 의견이 달라서 어려움을 겪을 때 어떻게 하는지 그의 경험을 물어보았다.

"도저히 바느질이 될 가능성이 없는 디자인을 들고 오는 경우가 있지요. 옷을 해서 실루엣이 잘 나와야 하는데, 그림대로 하면 안 되니까. 재단사나 우리 입장에서는 변형을 하자, 그래야 옷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하죠. 그러면 디자이너들은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하니, 이해 관계에 마찰이 생기는 것이지요."

디자인 쪽에서는 봉제 기술이 못 따라줘서 새로운 옷을 만들어 내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는 의견들이 있다.

"물론 미싱하는 이들도 책임이 있지요. 모든 것을 돈으로만 계산하지요. 샘플 하나를 뽑는데 얼마 달라, 또 바느질이 까다로우면 안하려고 하고. 돈이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 것을 보고 있으면 저렇게밖에 못하나 싶어서 안타깝죠. 바느질을 나의 자존심으로 보고 할 텐데…. 물론 하이패션 생산라인에 있는 분들은 아닌 것 같아요. 나름대로 자존감을 갖고 일하는 것을 볼 수 있죠. 각자가 각성하면 좋겠는데, 아직 안 되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와 봉제하는 분이 서로 잘 만나야 하는 것 같아요. 의견을 나누고 조금씩 양보하면 될 텐데, 하지만 서로 잘 맞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어요!"

그러나 내친김에 약간 서운한 말도 하겠다고 나선다.

"요즘 디자이너들이 하는 일이라고 해야 옛날에 우리 때 뒷일 정도 일을 하는 경우도 종종 보거든요. 그런데 그들 역시 우리 봉제하는 이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희한하게 말이지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패턴이 잘되고 디자인이 좋아도 바느질에서 엉망이 되어 버리면 옷의 질이 높아지지 않아요. 그런데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일단 우리를 무시하고 본다니까요."

그는 진짜 실력자는 어쩌면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짜 기술 좋은 분들이 많아요. 기계나 사람이나 똑같다니까요. 일하는 것을 보면, 그분들이 옛날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겠어요. 하루 종일 몇 백 장, 몇 천 장을 그냥 앉아서 미싱 일을 했으니까요. 그러니 기계나 사람이나 똑같지요. 몸이 머리보다 먼저 알아서 저절로 돌아가요. 그 정도 돼야 진정한 기술자라고 얘기할 수 있다고 봐요. 저희 세대는 어디 내놔도 막히지 않아요. 바쁘면 바쁜 대로 기계도 다 다를 줄 알고, 요즘은 토탈(total)로 할 줄 아는 이들을 찾기 힘들죠."

ⓒ프레시안(손문상)

그런데 그런 이들은 세상을 둘러볼 여유나 시간이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자신이 가진 기술을 어떻게 더 나눌 수 있는지, 그들이 가진 기술이 우리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좀 알리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게 동료로서 마음이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세상 밖으로 잘 안 나오려는 것 같아요. 지금만 해도 그래요. 창신동 주변 공장에서 일하시는 분 중에도 '봉제아카데미', 그런 게 있는 줄 전혀 모르는 분도 있더라니까요. 자기 일만 하니까 관심을 두지 않은 거죠. 전 깜짝 놀랐어요."

그는 전에 자신의 직장 동료들이 '참 이상한 사람, 피곤한 사람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시간 나면 수량을 더 뺄 생각을 하지. 뭘, 그렇게 배우러 다니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자기들은 그럴 시간 있으면 일하고 만다, 그랬죠.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이것보다 더 나은 생활이 있다고 얘기를 못해 주지요. 이해를 못하니까. 각자 가치관의 차이인 것 같아요. 시간이 나면 돈을 많이 버는 게 제일이라는 분도 있지요. 저는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요."

이런 분위기는 사실 진짜 기술자들을 제대로 대우 해주지 않는 사회 환경 탓이 아닌가 싶어 정말 답답하다.

"옷 판매업자들은 판로가 없는 일이 무슨 소용이냐 그러는데, 자기네 입장만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아요. 생산라인을 무시하니까 그러는 게 아닌가. 정말, 우리는 힘들거든요. 장시간 앉아서 일한다는 게, 거기다가 우리는 환경도 열악하잖아요."

그는 곧 이사할 계획인데 지하로 들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우리 봉제하는 사람들은 어디 다른 사람들 하고 섞어놓아도 금방 표시가 나요. 뭐랄까, 사람들이 햇빛을 못 보고 장시간 오래 앉아 지내니까 시든 화초처럼 생기가 없어요. 전에 지하에서 한 2년 일했는데, 건강이 안 좋아져서 이제는 절대로 지하에 작업실을 내고 싶지 않아요!"

ⓒ프레시안(손문상)

그는 어린 시절 동화시장(평화시장 옆)에서 봉제 일을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엄마들이 서로 모여 '누구네 집 딸은 어디 취직했는데 월급 많이 타왔다더라' 하는 이야기 들으면서 '나도 어서 학교 마치고 돈 벌러 가야지'라고 생각했단다. '몇 년 만 벌고 나도 학교 가야지, 가야지' 했는데 끝이 안 나더란다.

"그래도 귀 열린 이들은 야학도 찾아다니고 그러던데, 전 그런 기회도 못 얻었어요. 그때는 공장에서는 누가 그런 눈치라도 보이면 사장이 나가라고 하니까, 분위기 버린다고요. 결국 진학을 못하고 일만 열심히 했지요. 그런데 살다보니,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었어요."

그는 마흔 나이에 검정고시를 봤다. '미루면 못 죽을 것 같아서, 한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는 지금도 공부해야지하는 생각 밖에 없단다. 미싱 앞에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공부 시간을 내기가 어렵지만, 꼭 해내겠다고 다짐한다. 공부해서 좋은 글을 써보는 게 소망이란다.

▲ 김욱련 재봉사(왼쪽)와 권은정 전문 인터뷰어(오른쪽). ⓒ프레시안(손문상)


그가 옷감을 이리저리 박아내는 순간 요술처럼 한 벌의 코트가 완성된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며 참 바느질을 쉽고도 간단하게 하신다고 했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한다.

"남들보다 일을 더 쉽게 한다고 그러는데, 결코 쉬운 게 아니거든요. 한 가지 일을 긴 세월 동안 하다 보니, 손에 익어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요즘 패턴을 배우러 다녀요. 참 재미있어요. 기회가 되면, 디자인도 배워볼까 싶어요."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해 밤 11시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이제 욕심이 생겼다.


'이 일의 끝까지 가서 나만의 뭘 만들어보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신이 일개 미싱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미싱 일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임을 이제 정말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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