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싸웠던 한 노동자의 아버지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제작 과정에서도, 개봉 과정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예견 가능한 그림이었다. 투자 회사도 극장 체인들도 뚜렷한 근거 없이 눈치를 보며 몸을 사렸다. 얼마 전엔 한 언론사 대표가 해당 매체에 실린 이 영화 관련 기사에 '서운하다'는 삼성측의 말에, 사과까지 하며 기사를 내린 해프닝이 알려졌다.
기업들은 삼성에 밉보이길 원치 않으며, 언론사는 논조와 무관하게 대기업 광고로 연명한다. 물론 개별 기업이나 언론사뿐 아니라 정치권, 검찰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기억한다. 대기업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권력 집중의 원인 중 하나는 이처럼 그 주변에 있는 다른 힘들의 견제 기능 상실 혹은 유착이다.
언어학자이면서 정치학, 철학 등 다방면에 걸친 수십여 권의 저서를 발표한 노암 촘스키(1928~)는 일찍이 '시장으로 넘어가 버린' 권력을 포착하고, 그것과 유착해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권력과 비판의 기능을 상실한 언론권력 등 미국의 구조적 문제를 비판해 왔다. 또한 그가 현실에 발을 담그는 계기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었던 만큼,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대외정책은 무엇보다 강력한 비판의 표적이었다. 그는 '세계 평화' '테러 응징'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미국의 전쟁이 패권 유지를 위한 것이라며 자국을 "불량 국가, 세계 최악의 테러 국가"라 명하기도 했다.
이는 미국과의 대외관계가 안보·경제를 비롯해 국내의 많은 사안을 직간접적으로 결정하며, 매일같이 경제 권력의 힘을 확인하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지난 19일 저녁 숭실대학교 형남공학관에서 열린 '인문학의 생각읽기' 시리즈 출간 기념 강연 두 번째 시간, 노암 촘스키 편에서도 그의 지적을 한국 사회에 어떻게 교훈 삼을 것인가가 주요한 물음이 됐다. 강연은 저자인 박우성 박사가 맡았다.
'인문학의 생각읽기'는 앨빈 토플러를 포함해 노암 촘스키, 토마스 만 편이 출간되었고 향후 피터 드러커, 제레미 리프킨 등으로 이어지는 인문학 해설서 시리즈로,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 문명의 정신사에 큰 영향을 미친 현대 명사들의 저작을 중심으로 그 생애와 사상을 다룬다. 출판사 김영사on과 <프레시안>, 숭실대학교 교육개발센터는 본 시리즈와 함께 기획된 5회의 특별 강연을 진행 중이며, 그 주요 내용을 간추려 <프레시안> 지면에 싣는다.
☞11화까지 연재된 <앨빈 토플러의 생각을 읽자> 만화 보기
☞김영사on의 '인문학의 생각읽기' 시리즈 서평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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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로서의 촘스키
노암 촘스키는 1928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히브리어 연구자였는데, 아마도 노암 촘스키가 언어학자로 성장하는 데 보탬이 되었겠죠. 오늘은 그의 언어학자로서의 업적보다는 미국 사회를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진행할 텐데, 그가 "언어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라는 평가를 듣는 만큼 이 점에 대해서도 간략히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동물들도 언어를 갖고 있죠. 그런데 자연계의 소리와 동물의 언어, 그리고 인간 언어를 구별 짓는 특징은 어디에 있을까요? '시냇물은 졸졸졸'이라는 동요 구절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그게 시냇물 소리인 줄 알지만, 실제로 시냇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지요. 이처럼 자연계의 소리는 그 자체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인식할 수 없습니다. 고양이나 강아지, 닭의 울음소리를 언어마다 다르게 표현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인간 언어의 특징은 분절입니다. 제가 "엄마"라고 할 때와 다른 분이 "엄마"라고 할 때, 소리적인 차원에서는 분명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단어로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가 소리를 분명히 구분해서 인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언어의 분절은, 프랑스의 언어학자 앙드레 마르티네(1908~1999)에 따르면 일차적으로 형태소로 구분되고, 다음으로 개별 음소(음운)로 나뉩니다. 형태소는 의미를 가진 최소의 단위이고, 음운은 기역, 니은 등 의미를 갖지 않는 언어의 최소 단위이지요. 이를 '이중 분절'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발성 기관으로 구분해 낼 수 있는 음운은 대략 오십 개쯤 된다고 합니다. 개별 언어마다 그 중에 스무 개에서 서른 개쯤 사용하고요. 일본 사람들이 능력이 떨어져서 영어 발음이 나쁜 게 아니라, 일본어에서 사용되는 음운이 열일곱 개로 적기도 하고 그게 영어와도 거리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또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가 히읗으로 발음하는 에이치(h) 발음이 잘 안 돼요. 88 올림픽 당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앵커가 호돌이를 '오돌이'라고 발음하더군요. (웃음)
어쨌든 20~30개의 적은 숫자 가지고 무한한 단어와 문장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참 대단하죠. 꿀벌도 물고기도 언어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지만, 그 표현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이런 동물들의 제한된 언어는 순전히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인간 언어가 가진 고차원적 생산성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것,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 이 모든 게 인간 언어의 무한한 능력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촘스키는 구조주의 언어학에 의심을 품었습니다. 기존의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학을 과학에 속한 것으로 간주했는데, 그래서 표면적으로 관찰이 가능한 것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거든요. 객관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분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생산/사용된 문장을 갖고 경험적으로 분석하는 귀납적인 방식이었지요. 그런데 촘스키는 여기에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 능력을 설명해 주는 원리가 빠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언어의 창조성에 주목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왜 생전 처음 듣는 문장을 이해하고, 그 전에 한 번도 쓰지 않았던 표현을 만들어 낼까요? 소설가나 시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같은 내용을 전달하는데 전혀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내죠.
기존의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은 아이들의 언어 습득에 대해 '무수한 반복 학습'의 결과라고 했지만, 촘스키는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보편적인 언어 능력을 타고난다고 봤습니다. 언어 습득을 생물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연결해서 이해한 것이지요. 물론 한국인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한국어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는 얘긴 아니겠죠. 누구나 보편적인 언어 능력을 갖고 태어나고, 태어난 뒤에 주어진 환경에 따라 각자의 모어를 습득한다는 얘기죠.
그가 주창한 '변형생성문법' 이론은 이런 보편 문법이 소수의 자료를 바탕으로 무한대의 새로운 문장을 생성해 내는 규칙을 만들어 갈 때, 뇌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그는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이 관찰하던 것들, 즉 표면으로 드러난,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는 구조 이전 단계가 존재한다고 보고 이를 '심층 구조'라 칭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표면적 구조가 도출된다는 가설을 세웠지요.
심층 구조에서는 기능이 다르던 것이 여러 변형을 거쳐 최종적인 표층 구조로 나타날 때, 동일한 표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결국 촘스키는 인간의 언어에서 겉으로 드러난 것에만 집착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그 이면의 단계를 상정하여 언어 현상에 대한 탐구를 시도함으로써 언어 분석의 차원을 한 단계 높였다고 할 수 있지요.
'인간 두뇌에 들어 있는 보편적 언어 능력의 메커니즘을 수학적 모델과 같은 형식적 틀로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촘스키는 그러나, 후에 많은 비판을 받게 됩니다. 언어와 맞물려 있는 인간의 관념적, 인지적 측면과 더불어 사회적 측면, 생물학적, 생태적 측면, 언어의 역사적 측면 등을 간과하고 있어 포괄적인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는 언어학이라는 학문이 갈 길이 여전히 멀고 험난하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저도 촘스키 전공자는 아니지만 언어학을 전공한 사람인데요. 정말 인간의 언어라는 게 100, 200년 가도 제대로 규명이 될까 싶습니다.
"미국은 '불량 국가'다!"
이제 촘스키가 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비판한 미국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자유의 여신상으로 상징되는 미국은 과연, 그들의 말대로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이자 민주주의의 모범일까요? 촘스키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봤고, '깡패 국가', '불량 국가', 심지어 '세계 최대의 테러 국가'라 비판했습니다. 어릴 때 편 나누어 전쟁놀이를 하면 '좋은 편'은 늘 미국이었던 우리에게, 특히 한국전쟁을 겪은 어르신들에게는 '빨갱이' '종북 좌파' 소리 나오기 딱 좋은 얘기죠.
미국은 2차 대전에 개입하고 난 뒤, 종전도 되기 전인 1943년경부터 세계 지도(指導) 전략을 마련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전후 일본과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을 생산 기지로 하고 여타 제3세계 국가들은 원료 공급기지 및 소비지로 삼는 전략이었다고 하지요. 미국의 외교정책은 전통적으로 불간섭을 내용으로 하는 먼로주의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중남미는 미국의 뒷마당으로서 그들의 관리를 받아왔죠.
파나마만 하더라도 대(大) 콜롬비아의 한 주(州)로서 에스파냐의 지배를 벗어난 뒤 독립 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파나마 운하 조약 비준을 둘러싼 분쟁 끝에 미국의 지원을 얻어 독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상은 독립이 아니죠. 그 대가로 미국이 파나마 운하 지대의 영구조차권, 치외법권, 무력 간섭권을 얻어 거의 100년간 배타적으로 관리했으니까요. 그 운하가 지니는 경제적, 군사적 가치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2차 대전 이후는 미국이 공산 진영과 대결한 냉전의 시대이지요. 미국의 대외 정책은 반공/반독재 중 항상 반공을 택해 왔습니다. 독재 정권이든 민주 정권이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오로지 반공 노선을 추구하면서 미국 말을 잘 듣는 정권은 지원하고, 그렇지 않으면 여러 공작을 통해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미국은 마음에 안 드는 정권을 다루기 위해 다음과 같은 여섯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회유 혹은 협상·협박, ▲공작 또는 민중의 봉기나 쿠데타에 대한 지원, ▲경제적 압력 넣기, ▲합법적 정권 교체 시도, ▲국제적 압력 가하기, ▲마지막으로 전쟁입니다. 하지만 말이 전쟁이지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일방적인 침략에 가까웠습니다. 이라크 전쟁도 베트남 전쟁도 그랬듯이 명분을 '조작'해 침공을 정당화했습니다. 미국의 베트남전 전면 개입이 왜 일어났는지 아시죠? 1964년에 월맹의 어뢰정이 미국의 구축함을 공격해서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1995년 회고록에서 이것이 조작된 사건이었음을 밝힙니다. 참 기가 막힌 일이죠.
돈, 권력의 원천
미국이 세계 권력의 중심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에서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미국 정권이 핵심인 것 같지만, 사실 촘스키는 그보다 상위에 경제 권력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 하위에서 정치 권력과 언론권력이 상호 협조 체제를 구축하여 미국 사회가 돌아가게끔 하고, 미국은 이 시스템으로 세계를 지배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미국 권력의 원천은 결국 돈이라는 건데, 이건 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본 자민당의 금권 정치를 비판하는데, 사실 마찬가지란 얘기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대선 비용으로 20억 달러를 지출했다고 합니다. 상원의원, 하원의원은 그보다는 적겠지만 어쨌든 천문학적인 액수가 들겠죠. 그런데 어느 민주주의 국가에서나 정당·후보가 선거에서 일정 득표수를 넘기면 선거자금을 보전해주는 제도를 갖추고 있는데, 이 제도가 가장 약한 나라가 미국이라고 합니다.
상원의원 출마하는 데 1000만 달러가 든다고 해 봅시다. 낙선하면 패가망신이고 당선된다고 해도 보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선거 비용을 주로 정치헌금, 기부금을 통해 마련하게 되는데요. 개인이 아닌 기업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돈 많은 대기업에서 상당한 자금을 대고, 그렇게 밀어준 만큼 후에 입법 방향을 좌우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정치인들은 앞면에 등장하는 꼭두각시이고 뒤에서 돈줄 댄 대기업들이 철사 줄로 조종하는 형국이란 거죠.
원래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 자유주의, 즉 정부의 역할을 되도록이면 축소하고 배제하는 경향이 강했다가 1929년 대공황 이후 시장 실패를 시정하기 위해 '큰 정부'가 등장합니다. 복지나 철도·전력에 대한 국영화 등 정부 개입이 활발해지죠. 그러다 1970년대 말 오일쇼크 이후 '정부가 민간 부문보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다시 자유주의가 대두되는데, 그게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통제를 최소화하고 오로지 시장 원리에 맡겨라, 이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비해 기업의 이동, 활동의 물리적 장벽이 사라지면서 이른바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수익 추구"라는 이념이 중심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래서 생산 공장은 아시아나 남미의 국가 중 비교적 정권이 안정된, 인건비가 싼 국가에 맡기고 거기서 생산된 제품을 세계 각지로 공급하며 최대 이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프로파간다 시스템과 여론 조작
그렇다면 권력을 비판하고 견제해야 할 언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미국은 어떤 나라보다 언론 자유가 폭넓게 보장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촘스키는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언론은 어떤 한계를 설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는 자유롭게 보도하지만 그 한계에 저항하면 보도 그룹에서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언론 환경이 더욱 악화되었지요. 예를 들어 종이 신문은 판매만으로는 절대로 흑자를 낼 수 없는 구조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신문 구독하시는 분 있나요? 그럼 돈이 어디서 나올까요, 광고입니다. 그러니 사회적 역할이나 사명보다는 경제적 '존속'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중요해지고, 따라서 언론의 정체성은 기업체에 가까워집니다. 광고를 주는 대기업 입맛에 맞는 보도를 할 수밖에 없겠지요.
독재 국가와는 달리 민주 국가에서는 폭력을 사용하여 국민들의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지배 엘리트의 입맛에 맞게 사회를 이끌어 나가려면, 대중의 행동을 통제하는 작업이 필요하겠죠. 그래서 그 행동의 원천인 사고(思考)를 통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이를 실행할 방법으로 고안된 것들을 우리는 '프로파간다'라고 부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사상을 강요하거나 주입하기 위한 목적의 선전, 교육 등의 활동'을 말하죠.
촘스키는 지배층이 이러한 프로파간다를 통해 민중들을 세뇌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을 실행하는 주체는 먼저 앞서 말한 언론이 있겠죠. 미국의 경우 지금껏 그들이 벌이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보도, 자국민의 희생만을 강조하는 보도를 통해 전쟁에 대한 비판 여론을 잠식시키고 나아가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참전하게 만들었지요.
그 밖에도 촘스키는 미국이 ▲학교 교육, ▲기업체의 홍보, ▲자극적·선정적 콘텐츠의 제공, ▲권력에 복무하는 지식인을 통해 프로파간다를 전파하고, 대중들을 '정치는 권력자에게 맡겨 두고, 별 생각 없이 본능에 충실한 순응적 소비자'로 거듭나게 했다고 봤습니다. '지식인=전문가'에 대해서는 책에도 나오는 헨리 키신저의 말이 유용합니다. "전문가는 강자의 의견을 어떻게 하면 분명하게 표현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요."
또한 이와 관련해 요즘 한창인 올림픽과 인기 드라마를 들 수 있겠는데요. 물론 저도 재미있게 봅니다만, 올림픽 중계는 과열된 양상을 보이고, 드라마는 갈수록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삶은 우리가 욕망한다고 해서 따라갈 수 없는 삶이죠. 하지만 계속 노출되다 보면 그게 진짜로 어딘가에 있고, 자기에게도 가능할 거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정치 혐오를 심어주는 것도 전략적이라고 볼 수 있어요. '누가 정권 잡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만들어 아예 참여를 배제시키는 거죠. 촘스키는 우리가 정말로 각성하기 위해서는 텔레비전이나 영화 등 프로파간다를 노출하는 시스템으로부터 탈출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미국 사회에 대한 촘스키의 지적은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도 유의미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문제들을 답습해 가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 싶어요. 한때는 독재 권력, 즉 정권의 힘이 셌다면 80년대 말~90년대 경제 성장을 거치며 삼성을 필두로 한 대기업의 힘이 커졌지요. 정치 권력은 결국 5년이잖아요. 최근 <또 하나의 약속> 상영관 축소 논란은 대기업의 막강한 힘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경주에서 리조트 체육관이 붕괴했습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있었고요. 이건 한 기업의 안전 불감증 문제가 아니라, 더 구조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만일 이런 사고가 났을 때 그 기업에 아주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진다면 이런 일은 재발하지 않아요. 대통령이나 총리가 굳은 얼굴로 '책임자를 엄벌하겠다'고는 하는데, 현장실무자 몇 명 고소했다가 풀려나는 정도이지 기업에 큰 타격을 주지는 않죠. 그러면 기업체로서는 생산비를 줄이기 위한 노력들, 즉 공사 기간 줄이기, 건설 노동자들에 대한 열악한 대우 같은 걸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어요. 다리가 무너졌다고 다리만 점검하고, 화학공장에 불났다고 거기만 점검하고… 이건 아니죠.
헌법에 쓰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무슨 뜻일까요? 국민에게 주권이 있단 얘기지요. 물론 국가의 중대한 사안마다 모든 구성원이 정치적 의사를 표명하고 토론하는 아테네 식 직접민주주의는 현실적으로 실행이 어렵고, 대표를 뽑아서 그 사람에게 의견 표명을 맡기는 대의민주주의가 오늘날 민주주의 시스템의 대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의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나요? 그런 분들 거의 없을 겁니다.
루소가 <사회 계약론>에서 그랬지요. "대의제를 시행하는 영국 인민들이 자유로운 것은 의원을 뽑는 선거 기간뿐이다." 이 말은 200년 후인 현대 사회의 모습을 정확히 예측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만 해도, 선거 기간에만 온갖 감언이설과 공약이 남발되고 당선 후에는 싹 사라지지 않습니까? 민주주의는 인간이 현재까지 만들어낸 정치 시스템 중 가장 이상적이지만, 현실 속에서 제대로 실행되고 있지 않지요.
작년 가을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시리즈에서 시구를 했습니다. 국정원 대선 개입 관련 논란이 한창이었을 땐데, 그걸 보고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이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나더군요. 제 생각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이 의혹에 비하면 과거 닉슨을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사건은 별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정말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석연치 않은 검찰총장 스캔들, 수사팀의 교체, 물 타기 등으로 시간이 흘러 이제는 거의 언급조차 안 되고 있습니다. 세월 지나면 다 잊는다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사회의 변화를 바란다면 가슴에 새겨야 하겠지요. 촘스키는 2000년 이후 미국 사회가 1929년 대공황 때보다 더 나쁘다고 봤습니다. 그땐 상황이 나빠도 절망하거나 다른 데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희망조차 갖기 힘든 사회라고요. 한국 사회에 속한 우리 역시 점점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노암 촘스키의 생각을 읽자>가 앞으로 후배들과 후손들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할지, 희망을 되살릴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는 2월 26일을 포함하여 3회 남은 본 시리즈 강연의 신청은 계속 받고 있습니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조합원 및 프레시앙(후원 회원)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강연이며 성함과 연락처, 동반 인원을 적어 담당자 이메일(ezhyun@gimmyoung.com)로 보내주십시오. 26일은 <토마스 만의 생각을 읽자>의 저자 윤순식 강사가 강연자로 나섭니다.
시간 : 3월 12일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장소 : 숭실대학교 형남공학관 115호 (☞형남공학관 지도)
http://map.naver.com/local/siteview.nhn?code=19022584
남은 강연 스케줄 :
3강 2월26일 수요일 <토마스 만의 생각을 읽자> 윤순식 강사
4강 3월5일 수요일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5강 3월12일 수요일 '우리 삶에서 인문학적 소통이 왜 필요한가' 강신주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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