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민주화는 지난 대선을 관통한 화두였습니다. 이 화두를 잘 풀어가는 것이 박근혜 정부의 주요 과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제 민주화에 관한 논의는 무성하지만 이뤄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갈 길은 멀지만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인 경제 민주화를 위해 다시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할 때입니다.
이에 <프레시안>은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을 위한 국민운동본부' 자문위원회와 공동으로 경제 민주화의 오늘을 짚고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기획 '경제 민주화 워치'를 진행합니다. '경제 민주화 워치' 칼럼은 매주 게재됩니다. <편집자>
이에 <프레시안>은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을 위한 국민운동본부' 자문위원회와 공동으로 경제 민주화의 오늘을 짚고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기획 '경제 민주화 워치'를 진행합니다. '경제 민주화 워치' 칼럼은 매주 게재됩니다. <편집자>
우리 경제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경상수지는 흑자 행진이고 외환보유액도 충분한 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조적 문제가 전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악화되는 측면이 더 강하다. 뿐만 아니라 경상수지 흑자나 외환보유액 증가가 과연 좋은 신호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그 핵심에 경제민주화가 있다. 왜냐 하면 경제민주화 현안의 대부분은 우리 경제에 내재하고 있는 각종 구조적 모순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민주화 문제를 제대로 풀어내는 것은 단순히 공정성(fairness) 증진의 차원이 아니라 경제 운용의 전반적 방향 재정립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현재 주로 “갑·을 관계” 속에서 “을 살리기”라는 목표를 지향하는 경제민주화 논의는, 매우 시급한 문제에 대한 집중적 대응이라는 나름대로의 의미에도 불구하고, 사안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만드는 단점이 있다.
경제민주화의 포괄 범위를 넓힐 경우 경제민주화는 “경제 정상화”라는 조금 더 포괄적인 개혁의제로 확장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확장을 지지한다. 왜냐 하면 갑·을 관계라는 시각만으로는 제대로 접근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편의점 주인은 프랜차이즈 본부와의 관계에서는 “을”이지만, 최저임금제 적용의 측면에서는 아르바이트 학생에 대해 예외없는 “갑”이다. 중소기업도 마찬가지다. 대기업과는 하청 또는 경쟁 관계로 만나서 “을”의 지위를 절감하지만, 소비자나 직원에 대해서는 충분히 “갑”의 횡포를 부릴 수 있다.
재벌 기업의 구조개혁이나 경제정책의 전반적 편향성 역시 갑·을 관계라는 시각에 집착하는 한, 그 중요성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재벌의 순환출자를 금지하거나, 공정거래법상 자회사나 손자회사의 소유한도를 상향시키는 문제는 일반 경제주체의 “갑·을” 문제와 정확히 대응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수출과 내수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거시경제정책은 분명히 개인 자영업자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지만 이 역시 “을 지키기”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렇다면 경제정상화의 관점에서 아직까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거나 또는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된 현안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필자는 가계부채 해결, 중소기업 지원의 방향전환, 수출위주의 경제정책 지양 등 세 가지를 꼽고 싶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계부채 문제이다. 가계부채 문제는 갑·을 관계 정상화라는 차원이나 거시 경제적 함의 차원에서 공히 매우 중요한 경제 현안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지난 1년 동안 사실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국민행복기금은 면책자에 대한 채권추심 사례에서 보듯이 채권자를 위한 채권추심기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가계부채 문제에 대한 해법의 대강은 이미 여러 차례 제기된 바 있다. 우선 가계부채 중 신용대출 문제의 해법은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통합도산법을 개정해서 개인파산과 개인회생을 상대적으로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부담을 줄여 주는 것이다. 이 말은 은행등 금융기관이 지금보다 더 많은 책임을 부담하도록 하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사전적으로 과다한 신용대출이 남발되지 않도록 이자제한법을 강화하고 약탈적 대출을 금지시키는 것도 여러 차례 논의된 바 있다.
담보대출의 문제는 조금 더 어렵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정부와 필자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부는 오직 아파트 가격 상승을 통해 이 문제를 풀겠다는 심사다. 필자는 반대한다. 아파트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인지도 회의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가계부채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가계부채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아파트 가격을 상승시키면 (정확히는 아파트 가격이 앞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 주면) 은행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구입할 사람이 생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해결책일 뿐 (또는 그 사람에게 대출해 준 금융기관이 행복하게 빠져 나올 수 있는 방안일 뿐), 새로 아파트를 사는 사람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정부가 선전하는 “환상”에 속아 그것이 폭탄인지도 모르고 새롭게 폭탄을 넘겨받은 사람들의 문제는 어쩔 것인가. 그건 다음 정부에서 고민할 문제라는 것인가.
담보대출의 문제 해결은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주택 가치가 떨어져서 생긴 문제이므로 이 점을 받아들인다면 금융기관과 채무자가 손실을 분담하는 수밖에 없다. 우선 기존 대출의 상환기간을 일률적으로 적어도 10년 정도로 확장하는 만기재조정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최대한 채무자가 부채를 상환하도록 유도한다. 문제는 채무자가 이를 갚지 못할 때다. 채무자는 돈이 없어서 갚지 못할 수도 있고, 주택의 가치가 너무 떨어져서 갚을 유인을 상실할 수도 있다. 이때는 금융기관이 손실을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 한 가지 방법은 미국내 여러 주가 채택한 것처럼 담보대출이 부도난 경우 금융기관은 담보물의 처분수익 범위 내에서만 채권을 회수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금융기관은 기존 대출의 부실을 분담하게 되고, 앞으로 담보대출 시 상환능력을 고려하여 조금 더 신중하게 대출하게 될 것이다.
경제민주화 혹은 경제정상화의 두 번째 과제는 중소기업 지원정책의 방향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중소기업의 문제는 갑·을 관계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여러 측면에서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러나 문제제기의 측면이 많았던 것에 비례해서 해결책도 다양하게 제시되었지만, 그것이 중소기업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기에는 미흡했던 측면도 있었다. 정부 역시 때로는 과다하다 싶을 정도로 다양한 중소기업 지원정책을 쏟아냈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 중소기업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필자가 문제의식을 가지는 부분은 지원 방식이다. 이제까지 정부가 집중적으로 지원한 방식은 중소기업이 고용하는 생산요소의 가격(특히 자본의 가격인 이자율)을 값싸게 해 주는 것이었다. 소위 정책금융 확대가 그것이다. 그러나 판로가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요소 가격을 보조해 주는 것은 곧 한계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이 보다는 판로를 확보해 주는 지원 쪽으로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정부 조달 시장에서 중소기업 제품이나 서비스의 의무 구매 비율을 현재보다 더 상향 조정하는 것이 그것이다. 더 나아가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업무 방향을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 지원으로 완전히 전환할 필요가 있다.
중소기업 문제의 마지막 과제는 중소기업과 대기업간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두 가지 형태로 만난다. 하나는 최종 생산물 시장에서 서로 경쟁자로 만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간재 시장에서 원청기업과 하청기업의 형태로 만나는 것이다. 이 중에서 경쟁 관계로 만나는 경우는 중소기업의 판로 지원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남은 문제는 하청관계로 만나는 경우다.
여기서의 핵심적 과제는 현재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이익공유제를 폐지하고, 그 대신 “(초과)이윤공유제”를 시행하는 것이다. 이 두 용어는 겉보기로 나타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경제적 함의는 완전히 정반대다. 현재의 이익공유제는 하청기업에 이익이 있는 경우 그것은 대기업인 원청기업과 중소기업인 하청기업이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이에 비해 (초과)이윤공유제는 대기업에 이익이 생기는 경우 이를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이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이 제도는 납품가격 후려치기를 해결하는 가장 본질적 해법이다. 납품가격을 후려쳐서 이윤을 내 봐야 이윤 공유제에 의해 그 중 일부를 반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현재의 이익공유제는 이런 효과가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이익공유제는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 효과가 정책 의도와는 달리 대기업으로 흘러 들어가는 통로로 작용하기도 한다. 정책 지원에 의해 중소기업이 이익을 보면 대기업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것을 빼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경제 정상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수출과 내수의 균형을 바로잡는 경제운용정책을 정립하는 것이다. 지난 경제개발 연대 시절, 수출은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었다. 총수요도 늘리고, 고용도 촉진하고, 피보다 더 귀중한 외화를 획득하는 수단이었다. 시쳇말로 낙수효과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제품의 생산기지가 점차 해외로 이전되는 요즘, 수출증가의 효과는 옛날만 못하다. 물론 아직도 원유 수입의 귀중한 원동력이라는 점은 여전하지만 고용과 소득 증가에 미치는 효과는 크게 축소되었다. 특히 수출 지원 정책이 불가피하게 내수를 위축시킴으로써 수출과 내수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대부분의 수출기업이 제조업 중심의 대기업이라는 점에서 서비스업 종사자나 하청관계에 묶이지 않은 자영 중소기업의 위축이 극심해졌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의 처음에 언급했듯이 “경상수지가 흑자 행진을 하고 외환보유액이 충분”하다는 점은 긍정적 신호가 아니라, 아직도 우리 경제의 대내외 불균형이 심각하다는 병리적 현상의 발로일 수도 있다.
박근혜 정부는 경제민주화와 경제활성화를 대립적 관계로 파악한다. 그래서 경제활성화를 위해 경제민주화는 “그 정도 하면 됐다”고 본다. 그러나 경제민주화는 곧 경제정상화다. 그리고 경제정상화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한 발짝도 진척되지 않고 있다. 경제민주화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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