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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더러운 거래? 안철수, 어리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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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연대=더러운 거래? 안철수, 어리석다

[박동천 칼럼] 연대 혐오의 이데올로기

어느 나라에나 기득권 세력이 존재한다. 그들은 전체 인구에서 소수에 불과하지만 나머지 다수 인구보다 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자본, 지위, 정보 등 권력을 구성하는 자원을 더 많이 보유한 때문이지만, 이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득권 세력이 나머지 다수에 비해 훨씬 잘 조직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숫자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이 (또는 한국식 용어로 ‘서민’이)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눈을 뜨고, 이를 고치기 위해 조직된다면 기득권 세력이 현재 누리고 있는 특권들은 커다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다수 민중의 정치적 역량을 강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약자들의 연대를 부르짖게 되고, 따라서 기득권 세력은 연대를 막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

 

기득권 세력이 약자들의 연대를 막고자 할 때, 상책은 연대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주입하는 것이다. 연대 자체가 더럽고 치사한 짓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사회에 퍼뜨리는 것이다. 조선 왕조에서 ‘작당’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반역과 같은 나쁜 짓으로 간주되었다. 기득권 세력이 단결해서 움직이는 것은 ‘국익’을 위한 것인 반면에, 기득권에 대항하는 다른 의견이 동맹을 맺으면 ‘사익추구’로 매도되었다. 사익을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것만도 나쁜 짓인데, 패거리까지 만들면 더 이상 나쁠 수가 없다는 듯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정치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과거 군부독재 정권은 노동쟁의에서 3자 개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금지했었다. 이 조문이 삭제된 이후에도 여전히 공론장의 담론투쟁에서는 “외부세력의 개입”을 악으로 치부하는 관념이 우세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희망버스를 “외부세력의 개입”이라고 매도하던 어법이 강정과 밀양에서도 계속해서 기승을 부린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부터 기득권에 대항하는 민중의 연대는 한국의 모든 선거에서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자본, 관료, 군부, 사법기관, 언론계, 학계를 관통하는 강고한 기득권 동맹에 맞서 공권력을 민주화하기 위해서는 선거를 통한 권력의 교체가 필수적이며, 선거에서 이기려면 서민 다수가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이 고개를 든 것이다. 그 후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2012년의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도 연대는 중요한 화두였고, 당연히 이번 지방선거와 2016년의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2017년의 대통령 선거와 나아가 그 뒤로 이어질 선거에서도 연대는 중요한 화두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 기득권 동맹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으로서는 연대를 더럽고 치사한 짓으로 먹칠할 필요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두려워하는 연대의 주체들은 연대를 고려하는 것이 정상이다. 특히 국정원과 군부에 의한 선거부정, 그것을 은폐하고 오히려 부정을 고발한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둔갑시킨 경찰, 그리고 이와 같은 헌정문란 사건을 수사하려는 검찰총장과 수사검사를 찍어서 쫓아내버린 박근혜 정권에 대해 분노하는 유권자들은 민주당, 정의당, 통합진보당, 그리고 안철수 세력이 내부의 차이를 잠시 묻어두고 선거에서 연대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연대는 만만치가 않다. 무엇보다 연대를 혐오하도록 유도한 기득권 세력의 이데올로기가 도처에서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대 혐오의 이데올로기가 횡행하는 증거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몇 가지 사례들을 열거해본다. 우선 안상수는 경남지사직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접은 대신 박완수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도지사의 경우 박완수 예비후보에 대해 개인적인 지지 의사를 밝힌 것으로 이는 박 예비후보와의 연대가 아니며, 연대할 의사도 없다”고 밝혔다고 한다 (관련기사 ☞ “안상수, ‘박완수 지지는 개인적 의사, 연대 아니다’”). 안상수가 창원시장을 노리는 한 현 시장인 박완수의 지지가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한 일이기 때문에, 도지사 후보를 정하기 위한 당내 경쟁에서 박완수를 안상수가 지지하는데 창원시장 후보를 정하기 위한 경쟁에서 박완수가 안상수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아주 이상할 것이다. 따라서 말로야 “개인적 지지”라고 하든 말든, 실제로는 박완수 지지 세력과 안상수 지지 세력 간에 어떤 정도로든 연대가 명약관화하다. 그럼에도 안상수는 이것을 연대라고 부르지는 제발 말아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있다. 자기들이 실제 보이는 행태는 내용상으로 연대가 틀림없는데, “연대”라는 단어를 일종의 낙인처럼 인식하기 때문에 그런 낙인을 거부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연대의 필요성이 강조되자,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화학적 연대가 아닌 한 물리적 연대는 안 된다”는 소리가 튀어나왔었다. 하지만 2010년 지방선거에서 연대가 약간의 성과를 거두자, 그 소리는 쑥 들어갔다. 과연 그 선거에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연대가 “화학적”이어서 그랬을까? “화학적 연대”를 진실로 원하는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선거에서 “물리적 연대”가 약간의 성과를 거둔 뒤에 그 성과를 “화학적 연대”로 연결하자는 목소리를 냈어야 맞다. 실제로는 정반대로, ‘진보’라는 사람들은 그 약간의 성과에 도취한 나머지 밥그릇싸움을 벌이다가, 민주당과의 화학적 연대는커녕 ‘진보세력’ 내부의 물리적 연대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사분오열로 찢어졌다. 물리적 연대가 없이 화학적 연대가 불가능하다는 당연한 진실을 외면한 탓인데, 연대를 혐오하는 이데올로기에 빠져있지 않았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결말이다.

 

“화학적 결합”을 핑계로 “물리적 연대”하는 헛된 말버릇은 오늘날 “선거공학적인 연대”는 안 한다는 형태로 둔갑하여 안철수에게 계승되었다. 연대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선거에서 연대가 필요한 이유는 공권력을 기득권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민중의 손에 돌려주기 위함이다. 선거로 권력의 행방이 정해지지 않는 왕조체제라면, 연대는 혁명을 지향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왕조체제의 문법에서 연대는 반역과 동의어가 된다. 현재 대한민국은 왕조체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선거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선거가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기득권에서 배제된 다수 서민들의 연대가 필요한 것이다. 선거에서 지기 위한 연대라는 게 말이 되는가! 선거를 염두에 두지 않은 연대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지금 안철수와 그 일당이 (나는 지금 ‘일당’이라는 단어를 욕으로 듣지 말라는 의도에서 이 단어를 일부러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에서 나쁜 의도를 읽는 사람은 ‘작당’을 ‘반역’과 동일시하던 왕조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음을 반성하기 바란다) 정당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선거공학적 고려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연대에 대한 과도한 기대 역시 연대 혐오의 이데올로기를 부추긴다. 다시 아주 당연한 얘기부터 짚어보자. 선거 연대가 승리를 보장할 수는 없다. 2012년 두 차례의 선거는 피상적으로 연대의 형식을 갖추기는 했지만 새누리당의 승리를 막지 못했다. 연대가 더 잘 이뤄졌더라도 결과가 달라졌으리라는 보장은 물론 없다. 사실은 2010년의 지방선거조차도 연대 덕분에 승리를 거뒀다고 말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부족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 선거는 무승부에 가까웠지만, 2007년과 2008년에 이명박과 한나라당+친박연대가 거둔 압승에 비추면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결과였다는 점 때문에 “연대의 승리”라는 착시가 발생한 것이다.

 

기득권 세력과 민주/진보 연대세력이 얻은 득표율만을 비교하면 2010년의 지방선거 결과와 2012 총선 및 대선 결과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러한 선거 결과들은 “연대만 하면 이긴다”는 소리나 “연대해도 진다”는 소리가 모두 헛소리임을 알려줄 뿐이다. 연대를 통해 권력의 주체를 바꾸기 위해서는 일단 연대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이 현재 한국 정치가 처해있는 정확한 현실이다. 연대 이후에, 거기에 더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는 한국 사회가 아직 답을 찾아내지 못한 어려운 과제와 같다. 정치의 개선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진지하게 궁리를 해도 찾을지 말지가 불투명한 난제다. 단, 연대가 일단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을 이유가 전혀 없다. 무엇보다 ‘작당’을 ‘반역’으로 치부했던 왕조적 사고, 그리고 ‘연대’를 ‘더러운 거래’로 매도하는 기득권 세력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연대의 필요를 직시할 수가 있다.

 

이런 말을 현재 국면에서 내뱉으면 마치 내가 지방선거를 위해 안철수와 민주당이 연대하라고 주장하는 듯 오해가 발생한다. 이런 오해 역시 연대를 하나의 교조로 설정하는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다. 현재 한국에서 연대의 의미는 선거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대통령 선거라면 연대의 초점도 단순하고 따라서 연대의 필요도 가장 절실하다. 그러나 국회의원 선거만 해도 연대의 초점은 대단히 복잡해진다. 246개의 지역구에서 각각 다양한 형태의 연대가 가능할 것이고, 나아가 54석의 비례대표 의석에서는 선거공학적인 연대는 필요가 없다. 하물며 지방선거의 경우는 훨씬 다양한 방식의 연대가 가능한 만큼, 일률적인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멍청한 짓이 된다. 실제로 2010년의 지방선거에서 연대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그리고 선거의 층위에 따라 각양각색이었고, 선거구에 따라서는 연대가 안 된 곳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연대가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안철수와 그 주변의 인사들이 연대론을 매도하는 언사들은 어리석고 경박한 짓이라고 볼 뿐이다. 기자들로서야 기사 팔아먹으려니까 자꾸 가정법으로 연대 여부를 묻는 것이 당연한데, 이에 대해서는 “당도 만들기 전에 무슨 연대냐?”는 식으로 일축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 아닌가! 연대의 형태는 한 쪽에서 후보를 안 내는 방식도 있고, 두 명 또는 그 이상의 후보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단일화를 추구하는 방식도 있다. 2010년의 경우에는 경남지사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두관의 경우도 다들 “연대 모델”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이 모든 사정들은 선거구에 따라, 그리고 누가 출마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는 “연대를 한다”고 말하든 “연대를 안 한다”고 말하든 사실 별 의미는 없는 것이다. 결국 어떤 연대가 어떤 형태로 이뤄질지 말지는 나중에 전개될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제 사정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일을 연대냐 아니냐는 식으로 미리 정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발상은 교조주의적 사유형식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의식에서 교조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서 도처에서 출현하는 까닭으로는 아무래도 주자학적 명분론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자학적 명분론의 배경에는 물론 왕조적 정치질서가 있다. 이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작당’을 ‘반역’으로 간주하던 체제에서 빚어진 사유형식이 지금껏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공식적인 헌법적 원리로 표방한 지 70년이 다 돼 가는데도 우리는 이렇게 아직도 연대를 혐오하는 왕조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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