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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패션, K-POP 같은 문화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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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패션, K-POP 같은 문화 콘텐츠"

[전순옥·권은정의 D-프로젝트] 디자이너 이상봉 "패션은 소통이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 일요일 저녁, 서울 강남구 역삼동 근처에 있는 디자이너 이상봉의 작업실을 찾았다. 만남이 주말 저녁이었던 이유는 시간을 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곧 있을 뉴욕컬렉션 준비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이번 만남에는 민주당 전순옥 의원이 함께했다. 디자이너 이상봉과 국회의원 전순옥, 과거 둘은 한두 번 만난 적이 있지만 이야기를 길게 나누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봉제 쪽에서 출발한 전 의원과 처음부터 패션 쪽이었던 디자이너 이 씨는 ‘한국 패션의 내일’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에 대한 지향점이 같은 이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은 뜨거운 열정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닮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서로 상대방의 의견이 궁금할 것이다.

▲ 디자이너 이상봉 ⓒ프레시안(손문상)

디자이너 이상봉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잘 알려진 깃을 높이 올린 검은색 반코트 차림으로 일행을 작업실로 안내했다. 건물 1층에 있는 전시실 벽이 온통 그의 ‘작품’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이상봉이 자신의 작업실에 걸어놓은 옷은 분명 우리 집 옷장에 걸린 옷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자신이 제작한 의상을 배경으로 앉은 디자이너 또한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이었다.

이 디자이너는 전 의원이 패션산업에 ‘관심’을 갖는 것을 반가워하며, 진심 어린 인사말을 전했다. 그동안 패션산업을 이야기하자며, 팔을 걷어붙인 ‘정치인’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먼저 전 의원은 우리나라 패션 산업 전반에 걸쳐 어떤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는지, 그리고 세계무대에서 어떤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지, 또 그렇게 하자면 정책적으로 어떤 뒷받침이 필요한지 살펴보던 중에 디자이너 이 씨의 말을 듣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다.

앞서 동대문 패션을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디자인이 어디쯤 와 있는지 궁금했다. 또 봉제인들은 봉제산업의 발전을 이야기할 때마다 디자인의 힘, 디자이너의 실력, 디자이너와의 협력과 같은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대한민국 패션산업에서 봉제와 디자인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분명하다.

▲ 이상봉 디자이너는 왼쪽, 민주당 전순옥 의원은 오른쪽에 마주 앉았다. 권은정 전문 인터뷰어는 두 사람 사이, 가운데 자리했다. ⓒ프레시안(손문상)

디자인, 디자이너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또 우리나라에서 패션산업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 디자이너 이상봉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패션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발전시키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제가 패션협회 회장을 하면서 그동안 패션 쪽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지 아무리 말해도 ‘제대로 들으려는 이가 없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수적으로 볼 때 우리 패션 관련업계는 큰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단순 수치로 보거나 실제 물리적인 규모로 볼 때 섬유 쪽이 훨씬 큰 게 사실이지요. 그래서 발언권도 그에 따라 가는 것이겠지요. 패션을 정책적인 면으로 가져가면 언젠가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패션은 자유이니까요!”

그는 첫 발언에서부터 패션은 천성이 그 어떤 것,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단순히 실용적인 정책 논리로 따지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패션산업 전체를 볼 때 ‘패션’은 분명세 삼각형의 한 꼭지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실하게 짚었다. 디자이너 이상봉은 섬유-봉제-패션의 트라이앵글을 설명한다.

“섬유, 봉제, 패션은 삼위일체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일반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패션 아닌가요? 소비자와 만나는 영역이지요. 소통이 되는 바로 그 접점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옷을 만드는 과정을 볼까요? 먼저 소재를 만지고 선택하지요. 그리고 샘플을 만들고 옷을 생산하기 위해 봉제를 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작품이 생산되는 것이지요. 다 연결된 것이죠. 결국 패션은 토탈(tatal), '오케스트라'입니다. 봉제는 봉제, 섬유는 섬유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연결고리가 이어져야 합니다. 패션이 배제된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섬유나 봉제도 패션으로 부가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한국 패션산업을 발전시키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손문상)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패션 디자이너,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사람이 더 많았던 시절이었다. ‘의식주’에서 ‘의(衣)’가 패션과 연결된다는 인식이 있었던가. 패션, 그런 것은 사치고 그게 필요한 사람은 특별히 따로 있으려니 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이상봉은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길을 개척해왔다.

마침내 30년이 지난 지금 이상봉은 사람들 사이에 아주 가깝게 서 있다. 국내 소비자들은 그의 옷을 백화점 매장에서 쉽게 만날 수 있고, 옷이 아닌 다른 매체에서도 디자이너 이상봉을 자연스레 대하게 됐다. 세계무대에서 ‘디자이너 이상봉’ 앞에는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닌다.

“제가 1985년 브랜드 시작할 때부터 소품종 다양화를 외쳤지만, 어림없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현실적인 시스템이 전혀 없었지요. 그때는 봉제나 섬유 모두 컨테이너로 수출하던 시대였으니까요. 주문을 받아 수출하던 시스템이었으니, 자체 개발은 어렵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때 패션으로 진작 돌아섰으면 ‘지금쯤 얼마나 좋아졌을까’하는 마음인 거죠. 패션이 산업에서 문화로 갔거든요. 섬유나 봉제 쪽도 사양 산업이 아니라 문화로 키워냈더라면, 엄청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늦은 것이 아닙니다!”

봉제산업이 왜 문화산업이 되는지, 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디자이너가 봉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봉제 안에 문화의 혼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비싼 천도 바느질이 엉망이면 싸구려 옷이 나온다. 그런데 그냥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는 광목 천, 그것에 최고의 바느질을 해봐라. 그러면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명품 옷이 탄생한다! 봉제는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디자이너로서 그는 봉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다.

“봉제로 수출탑을 쌓던 그때 우리나라 봉제는 선진국 수준이었습니다. 패션 자체가 봉제를 하면서 경쟁이 되었으니 기술이 개발된 것이죠. 문제는 지금입니다. 당시 인력들이 노화하면서 기술도 노화된 거죠. 저는 샘플 작업을 위해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일을 하는데, 역시 봉제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디자인 샘플 제작을 하려면, 봉제기술이 뛰어나면서도 임금 적정선이 맞는 곳을 찾아간다는 말이다. 어디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는 다음의 예를 든다.

“일본은 샘플 만드는 일을 자국 안에서만 합니다. 일본은 자기 것에 대한 자신감, 사랑이 의외로 강한 나라입니다. 일본 하이패션은 소재개발에서 봉제까지 자기 나라에서 합니다. 그래서 일본 옷이 비싼 거죠. 전 세계 하이패션의 중심지인 이탈리아의 경우, 사실 봉제 전부를 중국인이 다 합니다. 이탈리아 어느 도시에는 중국인 2만 명이 봉제를 맡고 있다고도 합니다. 그전에 미국에서 봉제를 하는 이들이 전부 한국인이었던 것처럼 말이죠. 이제는 어딜 가나 중국인이 도맡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합니다. 중국이 따라오기 전에 이뤄야 합니다. 지금 중국은 디자이너에게 제공하는 물질적 지원이 엄청납니다. 한국 디자이너도 중국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 지원이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중국인이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패션업계는 디자이너들이 상상력을 펼칠 수 있도록 장을 펼쳐 준다는 말입니다.”

중국 패션 산업계의 초대로 그곳 패션인을 교육하고 가르치면서 현장을 직접 본 그로서는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런 시점에서 디자인업계와 패션발전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전 의원이 어떻게 반갑지 않겠느냐며 다시 말한다.

“한국 패션이 선진화 경쟁에 나서야 하는데, 옛날 향수를 가지고 하면 안 되거든요. 이제는 개발도상국 시절을 계속 고집할 게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를 내다봐야 합니다. 중국이 무섭게 좇아오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은 4만 달러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우리가 경쟁할 상대는 아니지요. 나라마다 장단점이 있는데, 우리는 봉제 산업을 어떻게든 살려내야 합니다!”

ⓒ프레시안(손문상)

우리 봉제 산업을 살리는 길은 먼저 오래된 기술을 가진 이들을 일깨우고, 젊은 세대에게 기술을 전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실 우리나라 하이패션 쪽 봉제기술은 여전히 훌륭하다며 인건비가 높아서 패션 제조 쪽에서 단가를 맞추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제대로 된 기술을 가진 봉제인이 우리나라 안에서 일감을 못 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술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거죠. 차라리 디자이너가 불쌍합니다. 워낙 많으니까요. 봉제인은 워낙 없고요. 일본은 패션과 봉제 시스템이 아주 잘 연계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게 잘 안 돼 있지요.”

그는 봉제인의 기술 발전은 디자이너에게 달려 있다는 말도 한다. 봉제인을 일깨워줄 책임과 능력도 디자이너에게 있다는 말이다.

“봉제사의 기술을 발전시킨다는 말은 바로 변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맞춤복 봉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을 깨야 하는 게 바로 디자이너의 역할이기도 한 것이지요. 솔직히 말해, 봉제하는 이들이 디자이너의 상상력을 따라잡기는 어렵습니다. 봉제인은 옷을 뜯어보고 뒤집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손기술에 의거해 보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좋은 봉제 패턴사라고 해도 상상력에 있어서는 디자이너가 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디자이너는 달 위를 걸을 수 있는 이들입니다! 디자이너가 보유한 최고의 감성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여 봉제사가 구체화하느냐가 발전의 관건입니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앞당기느냐가 문제입니다.”

섬유는 섬유만, 봉제는 봉제만, 패션은 패션만 이야기하는 현 상황에서 어떻게 고리를 만들어 낼 것인가. 그 연결고리가 바로 디자이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금 우리 패션산업에서 디자이너가 그 지휘자 역할을 할 만한 상황인가. 우리나라는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프레시안(손문상)

“지금 디자이너 환경 조건은 너무 영세합니다. 매년 패션쇼를 여는 이들을 리더라고 한다면, 100명 정도 됩니다. 저는 디자이너 각자를 하나의 기업으로, 그 가치를 1000억 원대 수준으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 마케팅의 의미에서 볼 때 사람들과의 소통 규모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기성복 쪽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도 1000명 정도 되는데, 그들은 쇼를 기획하는 디자이너와는 성격이 좀 다르지요. 국내에서 매년 1만 5000명의 디자인학과 졸업생이 배출됩니다. 그 중에 20% 정도만 취업할 뿐이지요. 나머지는 치열한 경쟁 속에 사라집니다. 또 중도에 포기하는 디자이너가 많습니다. 너무 힘들어서이지요. 특히 여성은 결혼하면서 포기하고, 출산하면서 포기합니다. 그래서 확률적으로 남성 디자이너의 성공률이 더 높은지도 모르겠네요. 하하하.”

그는 패션은 살아 숨 쉬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단 한 순간도 그 생명체에서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1년에 두 번씩 패션쇼를 해야 합니다. 리듬을 잃으면 다시 못 찾아요. 다른 직종의 일은 쉬었다가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나이가 들어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는데, 패션은 중단되면 다시 일어서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만뒀다가 다시 하는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패션은 언제나 살아 있어야 하거든요. 쉬면 감성이 죽어버려요. 예민하게 살아 있는 이들에게만 가능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쇼를 열고 전시회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패션을 영화 <설국열차>에 견주어 말하곤 합니다. 멈출 수 없으니까요.”

현재 우리는 세계 8위의 섬유 수출국이며, 섬유생산 기술은 이탈리아·일본·독일·미국에 이어 세계 5위다(2010년 기준). 최근 경기도 양주는 섬유 도시로 거듭나겠다고 천명하며, 시설 유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섬유가 발전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기쁘지만, 패션이란 말이 귀퉁이를 차지할 정도인 것 같아 그는 적잖이 실망이라고 한다. 변화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패션디자인을 산업으로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듯한 분위기 때문이다.

섬유나 봉제로 수출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대를 이어, 즉시 미래 문화산업으로 디자인을 선정했었더라면!

“디자인이 미래 산업인데, 우리는 미래를 못 본 거죠. 디자인 산업에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했는데, 영국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성공한 사례지요.”

만약 지금이라도 우리 정부가 정책 면에서 나선다면 어떤 지원이 필요할까. 전 의원을 바라보며 디자이너 이상봉은 열띤 어조를 이어간다.

“디자이너와 섬유업체와 연결되도록 하면 아주 좋을 것입니다. 디자이너가 소재를 개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죠. 옷을 만드는데 이런 성격의 소재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런 섬유를 개발하면 되고, 이를 디자이너가 쓰면 시장에서 곧 따라서 쓸 것이며, 다른 나라에서도 즉시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섬유 수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좋은 사례 하나를 설명한다.

ⓒ프레시안(손문상)

“몇 년 전 제가 섬유회사 사장에게 실크를 합성섬유와 섞어서 짜보라고 했죠. 당장 대박이 났습니다. 디자이너가 말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장이 40대 초반이라 가능했던 것 같아요. 섬유 쪽에서 옛날 생각을 고집하는 분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지요. 섬유 발전은 동대문 시장이 대기업보다 더 낫습니다. 대기업은 큰 규모로만 섬유를 만든다고 생각하는데, 동대문에서는 카피 제품이라도 작게 짜서 내놓으니까요.”

‘누가 구슬을 잘 꿰어 내느냐’가 문제라며, 그는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디자이너 이상봉은 섬유 쪽에서 의식 있는 젊은 세대에게 기대를 걸어보고자 한다.

“섬유 쪽 신소재 개발에 대한 의식이 필요합니다. ‘옛날에 내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데’ 하는 과거 기억에 시스템이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10년 전 그 시대에는 최고의 정답이었다고 해도 패션에서 10년은 먼 옛날이니까요.”

전 의원은 우리 패션이 세계무대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 했다.

“우리나라 경제 수준과 똑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남아 쪽에서 한국은 가장 따르고 싶은 모델입니다. 인구와 자원이 많은 나라들이지요. 지금 한국의 발전상을 닮으려는 그들은 제일 먼저 한국의 패션을 따라 하고 싶어 합니다. ‘케이 팝(K-POP)’ 덕분에 한국은 그냥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문화 강국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우리나라 선진화에 패션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큽니다. 옷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구두, 가방, 화장품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한글 디자인을 새긴 그의 옷은 세계인을 놀라게 했고, 한국 문화를 세계무대로 옮겨 아름답게 그려내는 강렬한 효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패션이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어딘가에 묶여 있는 현실은 디자이너 이상봉이 보기에 안타깝다.

“우리의 경우, 정치가 패션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못하고 있어 많이 아쉽습니다. IMF 총재가 제 파리 패션쇼에 참석했습니다. 자유롭게 다녀야 합니다. 만약에 패션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면, 패션 산업의 발전은 훨씬 빨라질 것입니다. 아직도 패션은 사치라며 금기시하는데, 이제 패션산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봐야 합니다. IT산업이 마치 우리를 먹여 살리는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패션이 IT보다 더 큰 산업이거든요.”

디자이너 이상봉은 파리 진출 17년 만에 베이스를 뉴욕으로 옮긴다. 그리고 뉴욕에서 첫 번째 단독 콜렉션을 연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알려진 대한민국 디자이너. 패션 인생 30여 년, 쇼를 앞두고 좀 느긋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처음과 같은 마음입니다. 경험은 축적될지언정 옷은 계속 변하니까요. 패션은 매 시즌마다 달라지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평생 한 가지 주제로만 표현할 수도 없으니까요. 떨림, 그것은 덜할지 몰라도 늘 새로운 마음입니다.”

그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자신의 패션쇼가 시작되기 전 무대 휘장을 살짝 걷고 엿보는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의 심정을 설명한다.

“쇼하기 전, 늘 악몽을 꿀 정도입니다. 그러나 저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 어려움조차도 즐기라고요!”

ⓒ프레시안(손문상)

봉제인으로 출발한 전 의원도 이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예순 초반일 이상봉 디자이너, 그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나이를 서른일곱 살에 정지시켰다. 패션인으로서 영원히 그 지점에 머물겠다는 결심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자신의 책 제목 <패션 이즈 패션(Fashion is Passion)>(민음인 펴냄)대로 그는 열정에 사는 사람이다. 옷에 대한 열정이 한국 패션산업을 기어코, 제대로 키워낼 게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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